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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마 22: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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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마 22:33-40)

 
우리 기독교의 기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대체로 율법이라고 하면 엄격한 율법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단순히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고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올바른 사랑을 실천하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십계명의 기본 정신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한번은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613 가지의 세부적인 계명으로 되어 있지만 이 모든 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율법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첫 번째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에 대하여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바른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강제로나 우격다짐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발적인 것이지 강요에 의한 사랑이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임의로 선택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부여하신 신성한 본분입니다. 이 점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인간 사이의 사랑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명하실만한 무슨 근거를 갖고 계신 것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란 우리의 육체적인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이고 정신적인 성품을 말합니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창조하시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보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께 바칠 찬송을 제 스스로 차지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을 보면, 무언가 그럴듯한 성과를 이룩하면 재빨리 인간 승리를 외치며, 마치 신이라도 된 듯이 인간의 위대함을 칭송하기를 좋아합니다. 인간들에게 지혜와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교만하여 인간 스스로가 영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 인간을 존귀한 존재로 만드셨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시되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으니 얼마나 파격적으로 대우하신 것입니까! 그런데도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존귀한 위치에 세워주셨건만 도리어 이에 반발하면서 인간이 아메바에서 진화한 존재라고 강변하기를 좋아합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진화론을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시편 49편 20절에 이르기를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존귀한 존재로 지으셨건만 인생들은 스스로 짐승의 수준으로 추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0장 20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사들이나 인간들이나 짐승이나 초목을 막론하고 이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요구는 알고 보면 우리 인생들의 행복을 위한 복스러운 배려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타락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한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용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며 인간의 삶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의 종이 되어 살게 된 것입니다.

마귀에게 종 된 사람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마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마귀에게서 해방되려면 마귀보다 강한 자가 구출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인생들을 해방시키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3장 8절에 이르기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아낌없이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한 이유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적에,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였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 때에, 일방적으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피 흘려 죽게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 성도여 찬양하세“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이같이 말씀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이 감격스러운 고백이 성도님들의 입술을 통해서도 고백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신 신명기 6장 5절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 하셨는가 하면, “37)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남편과 아내보다 더 사랑하고, 자식보다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재물이나 명예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이란 숭배할 목적으로 나무나 돌이나 철로 무슨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로 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그 성격상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를 둔 남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되고, 남편을 둔 여자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이 부부의 도리입니다. 이를 어기면 부부의 관계가 파탄되고 맙니다. 이처럼 사랑은 배타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하신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열과 성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본질이 뜨거운 것입니다. 미지근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얌전한 사람도 한번 사랑에 빠지면 아주 열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만약에 이 열정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총독 베스도와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사도는 자기를 변호할 시간이 주어졌을 때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총독 베스도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대답하기를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고 했습니다. 아그립바가 대답하기를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고 하니,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네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죄 방면되기 위해 자기를 적극 변호해서 할 그 시간에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전했으면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겠습니까! 이 같은 열심에 대하여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3)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3장 11절에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서 주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대속의 고난을 기꺼이 받으실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행할 때 수고가 고통스럽지 않고 고생이 고생으로 생각되지 않고 기쁨과 보람이 되는 법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아직 많은 봉사자를 필요로 합니다. 찬양에 소질이 있는 분들은 성가대원으로 봉사하십시오.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분들은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음식 솜씨가 좋은 분들은 만나실에서 봉사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주일에 차량 운행이나 예배 안내를 위해서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원해서 봉사에 동참할 때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본질상 같은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국법과 공공질서를 지킵니다. 이제 곧 대선이 다가옵니다. 후보들이 저마다 나라사랑, 국민사랑을 외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입으로 애국 애족을 외칠지라도 그 사람이 법을 어기고 탈세를 하였다면 그 사람의 애국 애족은 헛것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살려고 힘쓰고 애씁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자기의 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승전비를 세웠습니다. 이처럼 사울 왕은 불신앙으로 행하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시편 18편 1절에서 그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이었기에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은혜롭고 복된 승리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승전비를 세우지 않았으나 시편에 기록된 수십 편의 신앙시가 그의 신앙의 아름다움과 신실함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입술로 고백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복이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는데,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역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시편 91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그리고 로마서 8장 28절에 이르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합력성선(合力成善)! 얼마나 마음 든든한 약속입니까! 우리가 당면하는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 선을 이룬다면 근심,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한 세상 살다보면 좋은 날도 만나고 궂은 날도 만납니다. 기뻐할 때도 있고 슬퍼할 때도 있습니다.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건강할 때도 있고 병약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면하는 문제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 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나머지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자라고 일컬음 받는 성도들은 영혼뿐 아니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복을 받아 누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과 성도들은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몇 가지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첫째는, 부부 관계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남편이시고, 이스라엘은 아내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우상 숭배는 영적 간음과 같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불같이 노하셨던 죄입니다. 부부가 서로에 대하여 정절을 지켜야 하듯이,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지조를 지켜야 합니다.

둘째는, 부자 관계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성도들은 그 자녀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를 졸라서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아 먼 나라에 갔던 아들은 오래지 않아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들판에서 돼지치기가 되었으나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제야 이 아들은 말하기를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고,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매일같이 대문을 열어놓고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상거가 먼데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 나가 목을 껴앉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여,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아주소서” 하였으나 아버지는 하인에게 명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발에 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라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셋째로, 목자와 양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목자는 한 마리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우리에 두고 산과 들판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리고 찾은즉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 벗들을 불러 모우고 “자,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생명과 능력과 축복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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