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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임마누엘(2)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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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2) (마 1:18-25)


19세기에 미국의 무디 목사의 부흥운동과 함께 복음성가와 간증으로 민중들을 크게 감동시킨 생키(Ira Sankey)의 역할도 대단했습니다. 그가 어느 크리스마스 전날 배를 타고 여행할 때였습니다. 그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키를 다 알아보고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목자의 노래"(Shepherd Song)라는 캐롤을 불렀습니다. 
그때 한 사나이가 흥분된 모습으로 앞으로 나오더니 생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남북전쟁 때 북군에 있었지요?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생키가 “내가 북군에 종군했던 것을 어떻게 알고 있소?”하고 반문하자 그는 기막힌 사연을 고백했습니다. 

“1862년 남북전쟁 당시 나는 남군의 척후병이었습니다. 그날도 오늘 같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는데, 달빛이 밝은 밤에 나는 북군 진지에 접근해서 정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북군 병사가 언덕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보초병을 사살하기 위해 조금씩 접근해서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초병이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부른 ‘목자의 노래’였습니다. 이제 당신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어보니 그때 그 병사는 당신이 틀림없습니다. 

그때 나는 고향에 두고 온 그리운 어머니와 동생들이 생각났습니다. 교회에서 친구들과 크리스마스를 지내던 추억들도 하나 둘씩 떠올랐습니다. 당신이 2절을 부를 때에는 나는 더 이상 당신이 적으로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독실한 신자인 저의 어머니가 저에게 ‘살아서 돌아오너라. 기도하겠다’고 하셨는데, ‘저 사람의 어머니도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기도를 하겠지’ 하고 생각하니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생키는 그 말을 들으면서 그날 크리스마스 이브에 언덕에서 보초를 섰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두 사람은 얼싸안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생키는 이 이야기를 다니는 곳마다 간증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전쟁터에서도 사랑과 평화, 용서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자들도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귀한 뜻을 되새기게 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 또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는 자들은 희망의 하나님께로, 불신앙과 죄악으로 멀어진 자들은 용서하시는 하나님께로, 무관심과 게으름으로 뒤쳐져있던 자들은 우리를 위해 쉬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입니다.
평생을 아프리카 선교사로 보낸 데이빗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은 만년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위가 수여되기에 앞서 드린 예배에서 리빙스턴은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면서 겪은 일들을 참석한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소개했습니다.

칼라하리 사막 근처의 마보차에서 사자의 공격을 받고 왼쪽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바람에 평생 왼팔을 머리 위로 들지 못하는 불구가 된 리빙스턴은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설명했습니다. 한낮의 찌는 듯한 더위와 추위가 찾아오는 밤에 그는 자신과의 싸움을 처절하리만치 치렀노라고 말했습니다.
학생들은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리빙스턴은 또 온갖 짐승의 공격과 토인들의 방해 때문에 일어난 어려움을 소개했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어느 학생이 번쩍 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그 힘겨운 아프리카 생활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리빙스턴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내게는 별다른 비결이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고백처럼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결코 아프리카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33년 동안 아프리카 곳곳을 돌아다니며 선교하다가 1873년 5월 4일 현재 잠비아의 중동 부근에 있는 치탐보 마을 오두막의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보배로운 선택이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배로운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사실은 진흙 속에 뒹구는 돌덩이만도 못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는데 그 선택이 정말 보배로운 선택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건축자의 버린 돌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버렸던 그 돌을 하나님께서는 모퉁잇돌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실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선택을 처음 맛본 사람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람을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 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방패와 상급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해 아브라함은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 이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고백이 있기까지는 아브라함 역시 삶의 여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하는 땅으로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옮긴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고 아이를 못 낳던 사람이 나이 백세가 되어 그 몸이 죽은 자와 같이 되었을 때 네가 네 아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게 되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래 아브라함과 사라도 속으로 웃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농담도 잘 하시네” 그런 뜻이었을까요? 이미 갱년기를 넘어선 부부입니다. 하지만 다시금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내 사라에게서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했던 아브라함과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그 결과 한 때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고 해서 아브라함을 무시했던 그랄 왕 아비멜렉이 그 군대 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같이 평화 조약을 맺자고 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항상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심함 가뭄으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그 아들 이삭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그래 약속대로 순종하였던 그 해에 농사를 지으매 백 배나 거두었고 골짜기에 우물을 팠더니 샘이 솟지 않습니까? 그걸 보고 그랄 목자들이 와서 빼앗습니다. 하지만 다시 옮겨서 우물을 팝니다. 그랬더니 또 물이 솟아 나옵니다. 또 그랄 목자들이 그것도 자기네 거라고 우겨대니 그 우물도 내 주고 다시 얼마큼 가서 우물을 팠는데 또 물이 나옵니다. 사막에서 로또 당청보다 어렵다고 하는 우물이 파는 족족 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이 동일한 은혜와 약속이 그 아들 야곱에게 이어집니다.

야곱이 왜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을 때 벧엘 광야에서 노숙을 하게 됩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래 그가 떠날 때는 지팡이 하나 의지하고 밧단아람으로 갔는데 돌아올 때는 떼를 이루어 돌아오지 않습니까? 비록 저가 험한 나그네의 세월을 살았을지언정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셨고 그 마지막에는 아들 요셉을 통해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 대를 이어내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나간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왜 그들이 마음이 바뀌었습니까? 때마침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미디안 상인이 그들 곁을 지나가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상인들을 준비하셨고 그들을 보는 순간 형들의 마음이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팔아버리자. 그러면 멀리 사라지니 더 이상 눈에 뛸 것도 없고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미디안 상인들이 저를 사서 애굽에 내려가서 노예로 파는데 그를 산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입니다. 
이렇듯 우연처럼 이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꿰뚫어 볼 줄 아는 눈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던 요셉이 형들의 시기 때문에 죽을 뻔 하다가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멀리 타국 애굽에 팔려가 노에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그래서 보디발이 나이 어린 요셉을 가정의 총무로 삼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거기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많은 어려움들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요셉에게 꿈을 거듭 꾸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형들이 모두 요셉에게 절을 하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다시 꾼 꿈은 부모 형제가 모두 요셉 앞에 무릎을 꿇는 꿈이었습니다. 당시는 아버지의 권위가 아주 절대적입니다. 

자녀들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한이 다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축복권도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는 것도 아버지의 권한입니다. 자식을 집에서 내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릎을 꿇는다니 이건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를 이루셨습니다. 아니 그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작은 부분이기는 해도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됩니다. 그래 그를 가정 총무로 삼았더니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되어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주인 마님의 유혹을 물리쳤다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감옥에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랬더니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애굽 왕에게 범죄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있는 옥 다시 말해서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에 가둡니다. 그런데 친위대장이 요셉으로 하여금 그들을 수종들게 합니다. 

그런데 때마침 그들이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 꿈을 요셉이 해몽해주고 그 해몽해준 대로 한 사람은 복직되고 한 사람은 사형을 당합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지난 후에 놀랍게도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 신분의 요셉이 하루 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요셉은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셔서 형통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을 요셉은 보았습니다. 비록 조금 세워지는 듯하다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세워지는 듯하다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망정 저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은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세워질 듯 세워질 듯 하면서도 나락으로만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윽고 하나님이 세우실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누구에게 속하여 일을 하든 요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시듯 우리로 말미암아 복을 내리시는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그런 역사가 나타나느냐 하면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아직도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왜 이토록 어려운 길로만 가고 있느냐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한번도 어긋남이 없다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요셉과 함께 하시며 세워 가시는 그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과도 함께 하시며 형통한 자가 되게 하시는 귀한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광야에서 목자로서의 삶을 살아간 지 자그마치 40년이나 지난 후입니다. 이미 그 나이 80세입니다. 무엇을 하기에는 좀 늦지 않았나 싶은 그 때 광야에서 양을 치는 평범한 삶을 살기 시작한 지 자그마치 4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모세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 

모세를 만나 주셨고 모세를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단강 너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있습니다. 마지막 요단 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여호수아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어서 형통한 자가 되게 하셨다면 이제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모든 땅을 점령할 담력과 함께 모든 승리의 보장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여호수아 너와 함께 하겠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들에게 차지하게 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니 강하고 담대할 것이요 오직 말씀을 따라 행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수아 그 이름은 예수님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를 믿어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길에는 건너야 할 강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기가 되어 강둑까지 흘러내리는 물이 빠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요단강에 들어서는 것처럼 우리 역시 믿음으로 구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누구에게 요단강이 열렸습니까? 법궤를 둘러 멘 제사장들이 주신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요단강에 들어서니 발목이 물에 잠기게 될 때 요단강물의 흐름이 멈추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하늘 문이 열려진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또 하나의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리고를 마주하고 진을 친 상황에서 모든 남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면 그 사이에 적군이 습격이라도 하면 이건 변변한 싸움 한 번 하지 못하고 다 죽을 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순종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걸림돌이 있으니 그것은 아주 단단한 성 여리고입니다. 결코 무너져 있는 성이 아닙니다. 그 당시 그들은 성을 공격할 수 있는 어떤 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데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그토록 든든한 성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다던 여리고 성이 어떻게 무너집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령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한데 우리들의 삶이 온전히 열려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허덕이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 너무 높고 두꺼워서 도무지 어찌할 길이 없습니까? 하지만 믿음으로 순종하십시오. 그래서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고 명령과 더불어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 여기셨던 하나님이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의 길을 아름답게 여시어서 날마다 이기고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이런 승리가 주어집니까? 누가 승리할 수 있습니까?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강으로 들어서라 할 때 들어서고 할례를 행하라 할 때 할례를 행하고 날마다 여리고 성을 돌라 할 때 도는 것입니다. 일곱 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하셨지만 그대로 순종합니다. 아무 말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건 불평 불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딴 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말 좌절의 말 절망의 말 낙심케 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상하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 앞에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 말하라고 하는 것만 말하십시오. 누가 말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말을 하십시오. 감사와 찬양만으로도 족합니다. 긁어 부스럼이요 사서 고생이라고 스스로 구덩이를 파지 마십시오. 망할 소리 혼날 말은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마십시오.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삶에 지쳐있어도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신 말씀을 따라 강하고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는 믿음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날마다 이기고 또 이기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설립한 양로원에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방문해서 노인들에게 양로원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들은 빅토리아 여왕이 지었다고 답했습니다. 이어 방문객이 여왕이 한번이라도 이 양로원을 방문했느냐고 묻자 노인들은 가끔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방문객이 “그러면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은 여기 오셨습니까?” 하고 묻자 노인 한 분이 “아니, 예수님이 왜 오십니까? 예수님은 오시는 분이 아니고 처음부터 여기 계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처음부터 같이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 계시며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성 버나드는 “예수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든지 걸어오시는 것은 못 봤어도 예수님은 항상 내 곁에 계셨다”고 고백했고 웨슬리는 항상 빈 의자를 곁에 놔두고 예수님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요 또 다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다움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처럼입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보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때든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한 마디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처럼 친구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친구를 위하여 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엇그제 권목사님과 그런 말을 나누었습니다. 바나바 훈련원의 이사장이신 송대웅 목사께서 암으로 투병 중이니 기도해달라는 문자를 예전에 받았습니다. 폐암이라고 했습니다. 1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래 안타까워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지난 주 디모데 정도사님 부부 결혼식에 바나바 훈련원의 원장 대리로 수고하시는 김정호 목사님이 축하차 오셨습니다. 

사실 정목사님이 우리 교회로 옮겨오시도록 강력히 말씀하셨던 분이 김정호 목사님이십니다. 아마 권목사님이 김정호 목사님에게 이사장님의 안부를 물었던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건강하시다고 아무 이상 없으시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나눈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나바 훈련원에서 문제가 하나 들어왔는데 송 이사장님이 소천하셨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마음 아파하고 있는데 다시 동기회에서 연락이 오는데 장례식장도 장례 날자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모든 것을 정하는 대로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만 합니다. 

사실 그 친구 목사는 처음 바나바 훈련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여 교회에 6개월 휴직을 청하여 교회의 허락을 받아 제주도의 예수 전도단 훈련소에 온 가족이 함께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온 교회 체제를 선교 중심 교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 훈련원의 이사장도 맡았습니다. 자녀도 선교사의 자녀와 결혼을 시켜 선교지로 파송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결과는 암이었습니다. 

길어야 1년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데도 그의 선교의 열정은 누구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 아픈 몸을 이끌고 그는 또다시 중국 선교지 방문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랬기에 그곳에서 화장을 해서 유골이 돌아오면 비로소 장례를 치르게 되니 지금은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였던 그는 진정으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람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지금은 다른 보혜사 즉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모든 능력의 근원이 되어 주십니다. 이 함께 하시는 성령의 은혜완 능력으로 날마다 이기고 또 이기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프랑스 어느 마을에 새로 부임한 목사가 성도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다녀간 후에 남편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오늘 새로 오신 목사님이 다녀가셨어요.”
“목사님이 뭐라 하셨는데?”
“목사님은 제게 묻기를, ‘이 가정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까?’ 하시는 거예요. 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럼 당신은 우리가 점잖고 훌륭한 가문의 자손이라고 말하면 되잖아.”
“저도 처음엔 그러려고 했지만, 목사님이 물으신 것은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아, 그러면 우리 식구들은 매일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책을 읽고 있다고 그래야지.”
“그렇지만 여보, 그것도 목사님이 질문하신 것은 아니잖아요?”
남편은 점점 더 초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우리 식구들이 매주일 항상 교회에 출석한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것도 목사님은 묻지 않으신 걸 어떡해요. 단지 그 분은 그리스도께서 여기 이 집에 거하시느냐고만 하셨단 말이에요.”
이 부부는 여러 날 동안이나 목사님이 하신 이 심상치 않은 물음의 의미가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부부는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되었고, 죽으신 분이 아니라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사랑이라든가 그 분의 영광의 신비의 놀라운 체험을 통하여 그 분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그 가정에 진정으로 거하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까?”
“아니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사십시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한 요일 3:18의 말씀처럼 진실한 사랑의 사람 되십시오. 

예수님께서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또한 요한 사도는 요일 3:23~24을 통해 말씀합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하나님이 누구와 함께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요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은혜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웃을 때나 울 때나 그 언제라도 심지어는 우리가 시궁창에 빠져 헤맬 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로 인하여 웃으시며 기뻐하시도록 “내가 아무개를 참 잘 택했지 나의 선택이 정말 탁월했지” 하고 말씀하시도록 그렇게 믿음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시는 성도요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항상 나타내며 날마다 형통한 자요 날마다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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