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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율법을 넘어 성령으로 만민에게 (눅 2: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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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넘어 성령으로 만민에게 (눅 2:21-33)

: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이 아침,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에게 성탄의 종소리가 울려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탄일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로 들어가는 정문에 슈퍼마켓이 하나 있었습니다. 최근에 다른 업종으로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간판이 걸렸습니다. 그 간판에는 사자성어 두 개가 씌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개는 뜻을 알겠는데, 한 개는 모르겠습니다. 제게 모르는 사자성어는 ‘사사무소’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아는 것은 ‘공인중개’라는 말입니다. 공인중개라는 말은 ‘법적 자격을 갖춘 사람이 매매, 교환, 임대차 따위에서 중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사사무소’는 무엇입니까? ‘공인중개’ ‘사사무소’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네 자씩 띄어 읽고 엉뚱한 소리를 하면 큰 일 납니다. 간판을 사자성어로 읽고서 혼자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띄어 읽으면 큰일 납니다.

지난주일 광고시간에 제가 ‘꼭 투표하시라’고 했더니 어떤 분이 제가 선거법을 어겼다고 했답니다. 제가 ‘투(two) 표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웃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투표 인증 샷’을 하면서도 엄지를 치켜들거나, ‘V자’를 표시하는 것은 특정 후보를 연상시킬 수 있음으로 주의해야 한다는데, 목사가 투(two) 표하라고 하였다면 문제입니다.

‘공인중개’ ‘사사무소’

엔디 피어슨은 “세상을 원하는 대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데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지 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말씀이라고 우기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더욱 진지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철저하게 율법 아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시대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I. 율법  

성경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여자의 후손이라는 신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와 그 문화 속으로 오신 평범한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호적하기 위하여 고향을 찾았습니다. 구주가 구유에 뉘었습니다. 강림하신 분이 강보에 쌓였습니다. 천사가 천한 목자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목자들은 ‘가보자, 만나보자, 이야기하자’였습니다. 신비함과 평범함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21 할례 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창 17:12)고 하셨습니다. 할례는 의료적으로 포경수술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을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경건한 유대 남자라면 반드시 할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로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1.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할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성령으로 잉태된 여자의 후손이시지만 또한 한 사람의 유대인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신 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범하지만은 않으셨습니다. 율법에 따라 팔 일 만에 할례 받으셨지만, 그 이름은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을 때 아기의 이름을 짓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은 요셉이나 마리아가 짓지 않았습니다. 아기가 수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대로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으셨으나 하나님의 의하여 이름이 지어지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었다는 증거는 계속됩니다.
22절 말씀입니다.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아기 예수님은 모세의 법, 즉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셨습니다. 유대의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 정한 기한이 지나면 예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기를 낳은 산모는 부정하게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남자 아이를 낳은 경우에는 40일, 여자 아이를 낳은 경우에는 80일이 되면 산모는 정결 예식을 하였습니다(레12:1-5). 이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 마리아는 정결예식을 하셨습니다.

2. 정결 예식을 치르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정결 예식이 필요 없으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룩하신 분을 잉태하셨는데 어찌 부정하여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율법에 의한 정결예식을 하였습니다. 여기에도 역시 비범함이 평범함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어머니의 정결 예식과 아기를 바치는 일을 함께 하였습니다. 정결예식은 산모를 위하여 필요한 것인데 아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도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려질 아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아기였는데도 말입니다.

정결 예식을 치르지 않으셔도 되는 분이 정결예식을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정결예식을 하고, 아기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려졌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씻음과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 안에서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기 예수님에게 할례를 베풀고, 어머니 마리아가 정결 예식을 한 것은 모두 율법에 기록한 대로였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정결 예식을 통하여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구약에 기록한 율법의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정결 예식의 절차가 있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정결 예식의 절차도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정결 예식의 예물로 번제로 양을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하여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레 12:8). 여기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하였든 철저하게 율법대로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으시고 율법에 의하여 정결예식에 참여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머물러 계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21절의 ‘할례할 팔 일이 되매’에서 ‘되매’라는 말과 22절의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에서 ‘차매’라는 말은 똑 같은 단어[plhvqw/플레도]입니다. 이것은 ‘채우다’,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로 가득 차서 넘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시대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율법 아래에 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5)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계셨던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을 은혜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율법 아래에 계심으로 우리를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을 믿음으로 행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시대를 완성하시고 새로운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 새로운 시대는 바로 성령의 시대입니다.
  

II. 성령  

율법 아래 있는 예수님을 사람이 어떻게 옳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는지를 오늘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25절 말씀입니다.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 때,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주목하려는 시므온은 성령이 ‘그 위에’ 임하여 계셨다는 것입니다. 

1. 성령이 그 위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으려면 삼십여 년이나 더 있어야 하였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님께서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행 2:3)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령님께서 오셔서 그 위에 머물러 계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녕 시므온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었습니다. 

성령이 그 사람 위에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까? 성령이 그 위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26절 말씀입니다.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성령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2.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님이시라 할 수 없습니다(고전 12:3b).  

시므온은 성령이 그 위에 계셨고,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성령이 그에게 어떻게 일하셨습니까?

27절 말씀입니다.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에게 성령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감동이라는 말은 ‘성령에 의하여’(by) 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하여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성령께서 강권하셨습니다.


3.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는 오히려 율법이 정한 대로 행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성령에 의하여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왔습니다. 그 자리는 율법과 성령이 만나는 감격적인 자리였습니다. 율법이 완성되고 성령의 새로운 시대가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완전히 성령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활동하시는 복음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고치시는 일이 먼저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는 일이 먼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령의 시대가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오신 것은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하였습니다. 

도토리 한 알 속에 우람한 도토리나무가 있습니다. 사과 한 알 속에 사과나무와 수 많은 사과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처럼 아기 예수님의 오심에 성령의 시대가 함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율법대로 할례를 베풀고, 율법대로 정결 예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시를 받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예수님이 마냥 율법 아래에 있을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님께서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율법 아래 있게 하신 것은 성령의 새 시대를 활짝 열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함께 계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사람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령 시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만민을 향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III. 복음  

아기 예수님은 율법에 의하여 성전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하여 성전에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아기를 자기 팔로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습니다. 이제는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의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31절 말씀입니다.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에게서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공] 아기 예수님은 세상 만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1.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유대인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지만, 유대인만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유대인이 받았으나, 성령은 세상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아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민 앞에 예비하신 분’이라는 것을 달리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누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32절 말씀입니다.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예수님은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방인에게 예수님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2. 이방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백성이 아닌 자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이 짓눌리고 그늘진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2차 대전 때, 어느 일본군의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포로수용소는 전기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늘 어둠이 가득했습니다. 무더위와 굶주림 때문에 수용소 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어쩌다 쥐를 발견해서 잡아먹게 되면 그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용소 안에 남들에게 내놓지 않은 식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방 깊숙한 곳에 양초를 숨겨 두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친구 포로에게 이 양초가 위급할 때 중요한 식량이 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때는 이 양초를 친구에게 나눠주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어느 날 한 포로가 ‘오늘이 성탄이야. 내년 성탄은 집에서 보낼 수 있었으면…’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굶주림에 빠져 있는 포로들은 아무런 대꾸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양초를 숨겨두었던 포로는 그 양초를 꺼내어 판자 가운데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성냥으로 불을 붙였습니다. 갑자기 그 안에 밝음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 불빛에 포로들은 잠을 깼고 하나 둘 촛불 주위로 모여 들었습니다. 촛불은 어느 새 포로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촛불은 점점 더 환하게 비추어 포로들의 마음까지도 비추고 있는 듯 했습니다. 

“우리 내년 성탄절은 집에서 보내자고”라고 누군가가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두 환하게 웃으며 꼭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의 배는 여전히 비어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살아갈 희망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지켰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하여 어떤 날도 지정하지 않습니다.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지키게 된 것은 AD 325년에서 354년 사이에 로마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12월 25일을 지키게 된 것은 이 날이 태양신을 경배하는 이교도들의 축제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신을 숭배하던 날을 예수님의 탄생 기념일로 지킨다고 해서 우상을 섬기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빛의 축제가 세상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성 암부로스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새로운 태양’이라고 말했습니다. 한동안은 태양의 축제를 그리스도의 성탄절에 통합한 것이 많은 혼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반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2월 25일이라는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다만 흥에 겨워 즐기려고만 한다면 이것은 우상에게 바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빛의 축제라도 그 속에서 세상의 빛은 오직 예수님이시라는 굳센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은 율법의 시대를 마감하고, 성령의 시대를 여시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시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복음의 빛을 비추는 시대입니다. 우리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우상의 축제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구원의 빛을 온 세상에 비추는 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빛의 열매(엡 5:9)를 맺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온 세상에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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