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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방을 준비하는 사람 (왕하 4:8-10,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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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준비하는 사람 (왕하 4:8-10, 눅 2:1-7)

노벨의 7가지 모순점(irony)이 있습니다. 첫째는 중학교도 졸업을 못하였지만 스웨덴어, 불어, 영어, 독일어, 라틴어에 능통하였습니다. 둘째는 발명가로서 공장의 주인이었으며, 20여 나라에 80개의 회사를 세웠지만 평생 문학과 철학을 사랑하였습니다. 셋째는 부자였지만 생활이 소박하였습니다. 넷째는 길을 닦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였지만 후에 전쟁에서 대형학살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섯째는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쾌활하였지만 혼자 있을 때는 고민과 사색에 빠졌습니다. 여섯째는 전 인류를 사랑하였지만 아내와 자식이 없었습니다. 일곱째는 조국을 그토록 사랑했지만 이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삶도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모순투성이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함과 오해로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왕으로 오셨지만 이 땅에 오실 때 태어날 방도 없었습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오실 때 태어나실 방도 없었고, 십자가에 죽으신 다음에 묻힐 무덤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방법이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나라들은 14년마다 호적을 하고 보고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0년 만에 아우구스투스(B.C. 27-A.D. 14)가 호적하라고 영을 내렸습니다. 요셉과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도 호적하기 위하여 갈릴리에서 베들레헴까지 약 120km를 갔습니다. 당시에 호적을 위하여 다들 고향에 가느라 길도 여관도 붐볐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설날이나 추석에 고향에 가느라 고속도로도 집들도 얼마나 붐빕니까? 아마 그 이상으로 복잡했을 것입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고 하신 미가 5:2을 아우구스투스가 이루어드린 것입니다. 
  
성경은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라고 합니다. 요셉도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다윗의 동네로” 호적하러 간 것입니다. 다윗의 동네는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1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예수님의 혈통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육신 상으로는 다윗의 후손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 초라한 시골, 시골가정에서 태어나셔서 작은 자의 주님이 되심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방의 진화’라는 말을 합니다. 옛날에는 안방, 사랑방, 문간방 등으로 말했지만 이제는 노래방, 산소방, PC방, 찜질방, 전화방, 남성방, 비디오방, 만화방, 수면방, 빨래방, 머리방, 인터넷방, 게임방 등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우리사회는 방이 너무 많다’고도 합니다. 오늘 또 다른 방이 생겼을지 모릅니다. 방이 많은 이유도 ‘나만의 시간을 위해 방으로 몰린다’고 미화합니다. 아마 우리 사회에 이렇게 많은 방을 가진 것은 현대인의 폐쇄성, 도피성, 고립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현대인은 좁은 방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많은 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방이 누구를 위한 방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방이 무엇을 하는 방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방은 삶의 주체와 목적을 위한 방이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이렇게 많은 방들 가운데 주님을 위한 방이 없습니다. 자신을 위한 방들은 많이 있지만 주님을 위한 방이 없습니다.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지만 주님께 비워드릴 방이 없습니다. 영어에서 ‘no room’이란 여유가 없다는 말인데 자신을 위해서는 온갖 여유를 가지지만 주님을 위한 여유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성탄주일에 주님이 태어날 수 있는 방을 잘 준비하여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은 고향에도 방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2:3에는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이 호적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갔을 때에 태어나셨습니다. 요셉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습니다. 고향인 베들레헴에 갔지만 고향에도 주님이 태어나실만한 방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왜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입니까? 화려하고, 편안하고, 깨끗하고 좋은 곳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헤롯의 궁전이나, 총독의 저택이나, 대제사장의 저택에도 예수님이 태어나실 자리는 없었습니다. 왕 중의 왕이 나신다면 궁전에서 태어나시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예수님이 태어나실 곳은 궁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인 작은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 가신 것입니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가장 친밀한 곳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에 가도 있을 곳이 없는 이 땅에 이방인으로, 타향민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땅은 예수님이 영원히 계실 곳이 아닙니다. 잠시 계시다가 다시 영원한 나라로 가실 것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보면 고향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고향’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을 강하게 주는 말이면서도, 정작 ‘이것이 고향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운 단어이다.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는 곳이며 일정한 형태로 내게 형성된 하나의 세계이다. 고향은 공간이며 시간이며 마음, ‘인간’이라는 세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이다”. 
  
고향이란 장소라기보다 심성입니다. 요셉의 고향은 더 이상 요셉의 지리적 고향도, 심성적 고향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고향에 왔지만 고향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작은 방 하나도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나에게 고향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친구들 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향은 친구들 안에 있다고 하지만 요셉은 고향을 가진 친구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라고 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향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지리보다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보다 친척을 의존하고, 하나님 섬김보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런 고향을 어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조상들이 살던 고향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고향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방을 많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락방 강화에서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방이 많은 예수님은 이 땅 고향에는 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왜 고향이 의미가 없습니까? 왜 태어나실 만한 방도 없습니까? 예수님의 고향은 이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땅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놀라고 이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왔느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형제는 야고고,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 것은 정상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태어날 방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스트랠리아’라는 영화에서 주술사 킹 조지가 사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넌 이제껏 여행을 한거야. 이제 집에 가자. 우리 고향으로”. 그 때 사라가 “꼭 들를께”라고 답합니다. 고향을 찾으려 하고, 고향을 늘 마음으로 그리워하지만 고향에 가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시문학파 시인 정지용의 ‘고향’이란 시가 있습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 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을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고향에 대한 상실감, 안식처의 상실을 표현한 시인의 마음입니다. 동향이니 지연이니 하는 것이 중요한 우리 심성에서 고향을 잃는 것은 굉장한 아픔입니다. “고향 어디냐?”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 질문인데 고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슬픔입니다. 고향이 어디냐고 따지는 우리들이지만 예수님은 고향에도 마음의 방이 없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함께 1차 전도여행을 잘 마쳤습니다. 두 번째 여행을 떠나기 전에 두 사람이 마가의 일로 결별하였습니다. 결별 후에 바울은 실라와 함께 길리기아로 가고,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갔습니다. 두 사람이 다 자신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왜 두 사람이 다 고향으로 갔을까요? 고향은 마음에 위로가 되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고향은 친밀한 곳입니다. 고향은 아는 사람이 많은 곳입니다. 이런 모든 사람이 편안한 고향에도 예수님을 위한 방이 없었습니다. 

  
둘째, 여관에도 방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합니다. ‘여관’이란 말은 ‘카탈뤼마’라는 헬라어인데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드신 ‘객실’과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마구간은 여관에 붙어 있는 여관의 일부분일지 모릅니다. 
  
여관은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누구나 다 들어가는 곳에도 예수님을 위한 방은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다 들어가는 여관에는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미국의 흑인들은 1960년대까지 멸시천대를 받았고, 차별이 아주 심하였습니다. 흑인이 차를 타고 주유소에 가도 기름을 안 주었습니다. 흑인이 호텔에 가도 방을 안 주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만해도 흑인들은 한인들을 시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랜 인종차별의 고통 후에 삶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동양인들은 늦게 와서 차별이 적은 시대에 대우를 받으니 대가없는 대접에 그들이 분노하였던 것입니다. 
  
1957년 미국의 존 하워드 그리핀은 흑인들이 고생하며 멸시 천대를 받은 것을 체험하기 위하여 피부를 검게 하는 약을 먹고 햇볕에 타게 하여 검은 피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세상으로 나가서 멸시와 고통을 겪었습니다. 기차를 타려고 하였지만 승차거부를 당했습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려고 했지만 출입금지를 당했습니다. 호텔에 가서 잠을 자려고 했지만 숙박거절을 당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블랙 라이크 미’ 라는 책을 썼습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고 금지 당하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열면 주님은 들어와서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베푸시는데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누구나 다 들어가는 여관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비바람이 부는 늦은 밤, 미국의 어느 지방 호텔에 노부부가 도착했습니다. “예약은 안했지만 혹시 방이 있습니까?” 호텔 직원은 방이 없어 인근의 다른 호텔에 연락을 해보았습니다. 근처에 있는 호텔들도 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객실이 없습니다만 새벽 1시가 다가오고, 밖에는 비가 오고 있으니 누추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제 방이라도 사용하시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노신사는 “당신은 미국에서 제일 좋은 호텔의 사장이 되어야 할 분 같군요. 당신을 위하여 호텔을 하나 지어 드리도록 하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2년 후 이 호텔 직원은 비행기 표와 함께 뉴욕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뉴욕에는 아름다운 호텔이 지어져 있었고 이 직원은 노신사에 의하여 이 호텔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아스토리아 호텔의 사장이 된 조지 볼트입니다.  
  
구약 열왕기하에는 마음씨 아름다운 수넴의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를 위하여 방 하나를 준비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이곳에 올 때마다 이 방에서 편하게 머물 수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배려로 언제나 쉴 수 있는 곳이 생긴 것입니다. 그 후에 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는 여인의 아들을 다시 살게 하여 주었습니다. 여인의 마음씨에 상응하는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언제든지 환영받고 평안하게 쉴 수 있는 방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준비된 방도 하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미리 그 방들을 다 차지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마음의 방처럼 예수님보다 먼저 다른 것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방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위한 방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우리 방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까? 수넴여인처럼 항상 계실 방이 있습니까? 별의 별 잡동사니로 우리 마음을 채워도 주님으로 채우지 못한 것 아닙니까? 그 여관의 주인처럼 모두 환영하면서도 주님을 환영하지 않는 우리가 아닙니까? 
  
세상 일로 너무 바쁜데 주님을 위해서는 바쁘지 않습니다. 신문이나 TV 연속극은 볼 시간이 있어도 기도하고 성경 읽고 봉사할 시간은 없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돈을 펑펑 쓰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인색합니다. 친구를 만나면 온갖 대화와 잡담은 하면서도 전도의 입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예수님을 위한 방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곳간을 늘여도 예수님을 위한 방은 마련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예수님을 위한 방을 가지지 못합니까? 소유에 대한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 풍성하니 예수님을 위한 방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위해 필요한 것이 너무 많아지니 남을 위한 것들을 잃고, 주님을 위한 것을 잃었습니다. 
  
‘달팽이의 고민’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을 갖고 싶어 하는 달팽이가 있었습니다. 이 달팽이가 집을 크게 만드는 비법을 알아냈습니다. 근사하고 아름답고 큰 집 뽐내며 과시하기 위하여 양배추를 자기 집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양배추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사를 가야 하는데 집이 너무 크고 무거워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기 달팽이는 “나는 작고 알맞은 집을 지어야지, 그래서 언제든지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다닐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어미 달팽이는 그제야 소유로 인해 자신이 자유를 잃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방을 키우다가 주님을 위한 방을 잃고, 자유도 잃고, 가지고 다니지 못할 것들에게 구속을 당함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고향,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거절을 당하고, 배척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한 자들, 가장 가까워야 할 대제사장,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유대인들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고향의 주인이고, 그들이 여관의 주인이고, 가장 예수님을 영접하고, 방을 준비해야 할 자들인데 이들로부터 거절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인데 우리 마음에는 모실 방도 없이 거절하고 있는 미련한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리츠칼튼 호텔의 모토는 “We are ladies and gentlemen serving ladies and gentlemen”(신사 숙녀를 모시는 우리는 신사 숙녀)라고 합니다. 손님을 모시는 호텔은 모든 손님을 정말 신사 숙녀로 모셔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serving Jesus Christ’) 신사숙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방을 잘 준비하고 온 마음과 기쁨으로 환영해야 합니다. 
 
‘방’이란 말은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을 베푸신 ‘객실’과 같은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월절 만찬을 먹을 객실(방)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방은 우리와 함께 하실, 우리를 위한 방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방, 성탄 맞을 방을 우리 마음에 준비합시다. 그 방은 예수님을 위한 방일뿐만 아니라 내가 함께 할, 나를 위한 방입니다. 방을 잘 준비하여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예수님과 내가 함께 하는 복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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