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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마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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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마 23:1-12)

신앙생활이란 본받을 것은 본받고,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은 본받지 않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본받아야 할 것은 본받지 않고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본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① 죄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②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③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④ 할 수 있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본받지 말 것을 본문에서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 지를 우리에게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서기관은 율법 연구가이며, 바리새인들은 율법 행동가 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두 가지 건방을 떨었습니다. 

하나는 자기들 스스로가 모세의 제자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들만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요9:28) 했으며 더 나아가서 그들은 아예 스스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2)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말은 자기들이 모세와 같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너무나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 말만 하고 행동이 없는 사람 3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말만 있지 행동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말만 하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하는 행위는 본 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3)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두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너무나 좋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것은 잘 들어도 행동은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뿐인 사람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아내가 시장을 가려고 하는데 아이가 따라 나섰습니다. 그는 "시장 갔다 와서 엄마가 돼지를 잡아 맛있는 고기를 줄께 집에 있어라"라고 달래고 갔습니다. 아내가 시장에 다녀와 보니 증자가 돼지를 잡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깜짝 놀라서 "아니 장난으로 한 말인데 돼지를 어떻게 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애들에게 거짓말하면 애들이 누구를 믿어요?"라면서 태연하게 돼지를 잡아 아이를 먹여서 한마디 말은 그대로 실천으로 옮겨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말만 많은 사람을 본받지 말라고 주님은 가르쳤습니다. 유대인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 유대인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산책을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나무를 가르치면서 "저 나무에 올라가라"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무서워서 올라가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괜찮다. 내가 있다"라고 말하며 재촉하니까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밑가지에 걸터앉았습니다. 아버지는 더 높이 올라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들은 점점 무서워진다며 거절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자기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뛰어 내려라"라고 말하니까 "아빠 무서워요"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괜찮아. 아빠가 받아 줄께"라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이 높은 나무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아버지는 받아 주기는커녕 팔짱을 끼고 있었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져 아픔을 아기지 못하는 아들이 "받아 준다고 하면서 왜 팔짱만 끼고 있어요"라고 항의하였습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이제 알았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말만 하는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해!" 체험적인 경험을 심어 주는 아버지의 교육이었습니다. 

말뿐인 사람을 예수님은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모세를 보십시다. 모세만큼 큰 일을 한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렇지만 모세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출4:10)라고 말했습니다. 행동 없는 말보다 말없는 행동을 주님은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2, 짐만 지우고 짐 지지 않는 사람 4절

예수님은 남에게 짐만 지우며 자기는 짐을 하나도 지려고 하지 않는 이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4) 자기는 일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일을 시키는 사람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폐만 끼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시68:19)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례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짐을 지우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놀리지 않는 사람이지만 주님은 남의 짐을 날마다 그리고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대신 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죽음까지 대신 지어 주신 분이십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10년간 선교사로 일했던 로엘 케네디의 경험담입니다. 어느 날 원주민 두 명과 함께 어떤 마을로 전도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돌무더기가 보이자 그들은 각각 무거운 돌을 한 개씩 들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에게도 무거운 돌을 하나 들라고 하였습니다. "왜 돌을 들어야 하나?"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에 그냥 나갔습니다. 곧 강에 도착하였습니다. 물이 불어 넘치고 있었습니다. 동행하던 두 친구는 무거운 돌을 메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 돌의 무게 때문에 떠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건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건넌 후 소리를 질렀습니다. "선교사님! 그냥은 건널 수 없습니다. 무거운 돌을 메고 건너야 합니다. 그래야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때서야 선교사는 무거운 돌을 메고 온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자기가 이길 수 있는 큰 돌을 메고 와서 건넜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물로 들어오니 물 때문에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그 돌 때문에 자기가 떠내려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 무거울 것 같지만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시험의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무거워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십자가 때문에 고난의 강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새벽기도의 십자가가 무거운 것 같지만 사실은 강을 건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자동차를 누가 주었다면 무거우라고 준 것이 아니고 타고 편리하게 가라고 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짐은 좋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건국에 공헌한 영웅 가리발디는 애국가를 부르면서 "나는 그대들에게 부상을 주지만 명예도 제공한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짐을 주는 것 같지만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을 주시려고 하는 큰 계획이 있습니다. 짐만을 지우고 자기는 손해 안 보려고 하는 이들은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3, 보이려고만 하고 속이 없는 사람 5절

내세우기만을 좋아하고 남에게 공치사하기만을 좋아하는 이를 본받지 말라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5)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명에 따라서 경문을 차고 기도하였습니다. 경문은 이마나 몸에 지니는 네모난 상자입니다. 그곳에는 4가지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출13:2-10, 11:6, 신 6:4-9, 11:3-21) 

예를 들어서 신명기 6장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 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네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경건하게 보이게 하려고 큰 경문을 붙이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옷 술을 크게 하여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였습니다. 옷의 술을 크게 하면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그들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자세를 예수님은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아주 고약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구두쇠였는지 옆집에서 굶어 죽어 가는 사람이 있어도 못 본 체 하는 지독한 구두쇠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구두쇠 영감은 이상하게 돌연변이 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이제 내가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이상 구두쇠 소리를 들었다가는 죽어서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 우선 동네 사람들에게라도 인심을 얻어야 하나님이 나를 천국으로 부르실 것이다" 

그래서 그 부자는 그 부자의 높은 담 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붙였습니다. "모두 오세요.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병든 사람에게는 약값을 나누어 드립니다. 언제든지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대문밖에 나온 부자는 이 글을 한번 읽어보더니 서쪽에서 해가 떠올랐다며 신나서 말했습니다. 
"허허허 나도 이제 착한 사람으로 소문 나겠는걸!" 

그로부터 두 시간 뒤였습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서 배고픈 사람들, 병든 사람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부잣집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일어났습니다. 부잣집으로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밝고 명랑하고 기대감에 쌓여 있는데 그 집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찡그리고 있었고 어두워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이상하여 가 보았습니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조금 더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문 안쪽으로 10마리도 넘는 사나운 사냥개들이 밖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한 사람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고약한 구두쇠 영감의 계획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문이 나게 하여야 하겠고 물질을 나누어주기는 아깝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이런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보이려고만 하는 이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4, 상석을 좋아하며 심김이 없는 사람 6-7절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6)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은 좋아하느니라"(7) 

그들은 잔치에 가거나 회당에 가거나 상석에 앉는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잔치에 가도 먹고 분위기를 즐기고 축하하여 주는 것보다 상석에 앉아서 대우받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회당에 가서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상석에 앉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상좌에 앉으면 사람들과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늘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가 있고 그들의 경건을 과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그들을 과시할 수 있는 자리를 원하였습니다. 

마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막12:39) 마태는 잔치의 상석을 강조하였고 마가는 회당의 상석을 강조하였습니다. 타락한 명예욕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거스리게 하는 행동을 삼가라는 말씀입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7) 

이 말은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인사하고 높여 주고 최고의 호칭인 랍비라고 불러 주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랍비는 부모보다 더 존경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를 향하여 엘리사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왕하2:12) 이들은 상석을 좋아하고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하였지만 섬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맺는 말(8-12)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지위가 높고 가장 지식이 많고 세상의 주인 되신 부자이셨지만 가장 낮은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우리가 높여야 할 것은 우리의 지위나 우리자신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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