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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 (고전 14: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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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와 화평의 하나님 (고전 14:20-33)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그들을 신령한 자들을 대하듯이 말할 수가 없고 육신의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하듯 한다고 쓴 바 있습니다(고전3:1). 다시 말하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영적으로 아직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이제 영적으로 더 이상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어른같이 될 것을 권면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지혜에 있어서 어린아이같이 되지 말고 어른같이 되라 했는데 여기서 “지혜에는”이라 한 것은 “생각하는 일에 있어서” 또는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어린아이 같이 하지 말고 어른 같이 하라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여기서 다시 방언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방언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어린아이 같이 하지 말고 어른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언을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이 하는 것이며 또 어른 같이 하는 것이겠습니까? 방언이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 여기는 것이 어린아이 같은 것입니다. 방언을 하되 품위 없이 하고 무질서하게 하며 특히 통역 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언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어른 같은 것입니까? 방언을 성령의 은사의 하나로 인정해서 금하지는 않되 예언을 더 사모하고 무슨 은사를 따라 무엇을 하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며 차례를 따라 질서 있고 품위 있게 해서 교회 안에 화평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어른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해서 방언보다 예언이 더 유익한 이유를 본문 21-25절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로,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가 교인들이 방언하는 것을 들으면 소외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신자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들이라는 이질감과 그것은 결국 자기들이 정죄와 심판 아래 있는 자들이라 여기게 되는 소외감입니다. 

22절에서 “그러므로 방언은 ...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는 말은 바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들들로 하여금 신자들이 하는 방언을 듣고는 자기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만드는 표지의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방언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고 보이는 반응이 어떤 것인지를 사도 바울은 본문 23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고, 따라서 이해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자기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신자들을 향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미친 자들”이라는 말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본문 23절). 

이렇게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어야 하는 선교적 사명을 가진 교회에 방언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미 성령의 은사들을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방언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갖는 그런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22절 앞부분에서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한다” 한 말의 뜻이 그것입니다. 

둘째로, 교회를 위해서 방언보다 예언이 더 유익한 다른 이유는 예언에는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깨달아 알게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백성이 알아야 할 것과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유익한 것입니다. 예언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유익한 점에 관해서는 사도 바울이 24-25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즉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서 책망 받을 일들을 깨달아 알게 하고, 회개하게 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교회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언보다는 예언이 더 유익함을 설명한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며 그가 줄곧 강조해온 문제에로 되돌아옵니다. 즉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본문 26절을 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너희가 모일 때”라 한 것은 모여 예배드릴 때를 말합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이들은 각자가 예배에서 무엇을 하게 되든 그것이 예배하는 모든 이들에게 유익하도록 해야 할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회중에 대한 사랑의 관심과 교회의 덕 세움이 모든 일의 주된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방언이나 예언뿐 아니라 찬송, 기도, 말씀, 계시, 통역의 은사 등 그 밖의 모든 은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다른 다양한 은사를 가진 이들이 모두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까? 우리는 그 원칙을 사도 바울의 두 가지 말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본문 33절에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한 말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 안에서 모든 일은 질서를 따르고 화평을 좇아서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일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고전 14장의 제일 끝 절에서 보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질서와 화평과 품위가 유지되게 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다시 방언과 예언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 27-33절을 다시 읽어 봅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기본질서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첫째,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말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순서를 따라 하는 것도 중요하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하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회의하다 보면 어떤 문제에 대해 두세 사람이 발언하면 대개 할 말 다 나왔는데도 나도 한 마디 해야겠다고 어디서 자다가 나온 것처럼 이미 다른 사람이 다 한 말을 또 다시 반복해서 다른 이들을 짜증나게 하고 회의가 길어지게 만드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즉 무슨 말을 하든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게 독백을 늘어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다른 사람이 할 말이 있을 때에는 그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발언을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데도 쉬지 않고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며 발언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 한 것은 앞에서 이미 충분히 발언한 사람은 새로 하나님으로부터 할 말을 받은 사람에게 발언의 우선권을 넘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넷째, 누구든지 말을 할 때는 질서를 지킴으로써 모든 사람이 배울 수 있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권면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예배뿐 아니라 한 신앙공동체 안의 모든 활동과 삶에 있어서 참으로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질서 있고 화평하며 품위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잘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 가르침을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교회 안의 모든 구성원들과 그 각자가 가진 은사와 달란트를 다 존중하며 귀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우리들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했습니다. 이 말은 찬송시든 가르치는 말씀이든 계시든 방언이든 통역이든 다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는 일차적인 의미를 갖지만, 그 말 속에는 교회의 덕을 위하여 말씀이나 계시나 방언이나 통역이 다 필요하다는 뜻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말씀사역이나 찬양봉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안내봉사나 식당봉사나 주차봉사 같은 일도 다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나 교육을 관장하는 부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교, 봉사, 관리 분야의 제직부서들도 꼭 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부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부서이기주의는 배격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특정부서를 기피하는 경향도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예산을 많이 집행하는 부서만 선호하는 경향도 사라져야 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평신도가 모두 다 소중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큰 두 번째 가르침은 질서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의를 하거나 어떤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 발언과 의견을 독점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사건건 혼자 말하고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만 이루어지도록 고집부리는 행태는 공동체에 해를 끼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회의를 하면서 매사에 간섭하며 발언을 독점하려 하거나 다른 사람이 발언하고 있는데 수시로 끼어들어 말을 막거나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자기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남의 말을 존중해야 합니다. 끝까지 들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발언 중인데 그 발언에 대해서 야유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나중에 발언권을 얻어 자기의 다른 견해를 얼마든지 피력하면 됩니다. 또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되 다른 이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평가를 해서는 안 됩니다. 말을 가려서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싸우듯이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주고받다 보면 서로 핏대를 올리고 삿대질하며 싸우게 됩니다. 

그것은 질서도 화평도 품위도 다 저버리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게 하면 비난을 면할 수 없는데 하물며 교회 안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인격과 생각을 존중하며 질서를 지켜서 화평하고 품위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금년 한 해 교회를 위해 여러분 모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내년에는 보다 성숙한 모습과 기쁨으로 함께 교회를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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