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여자 (계 12:1-6)

첨부 1


여자 (계 12:1-6)

이기는 자와 지는 자가 분명히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불신앙으로 사는 두 세력의 대결이 인류 역사요, 현재의 역사요, 장래의 역사다. 그리스도와 사탄, 교회와 세상의 대결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는 종국에까지 계속되는 영적 전쟁이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이 세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①계12:1~6, ②계12:7~16, ③계12:13~18로 구분된다. 사실 첫째 단락과 셋째 단락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여인이 누구냐’ 그리고 ‘용이 누구냐’ 를 알면 된다. 여인과 용의 대결, 이것이 신구약 66권의 성서 이야기이기에 요한계시록의 해설을 듣고 지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2장은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일어난 그 다음 내용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 전체가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해설하는 장이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12장의 여자와 뱀의 대결은 창세기에서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먼저 여자가 누구인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여자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다양하게 해석한다. 

1. 가톨릭에서 말하는 마리아가 이 여자다. “아니다”

이 해석은 계12:5에 나오는 아이의 출생이 예수의 탄생이라는 것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계12:6의 여자가 1,260일 동안 보호를 받는 이 본문과 계12:17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는 이 본문에 적합하지 않다. 즉 계12:16~17은 이 여자가 마리아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여자는 마리아가 아니다.

2. 이스라엘 민족이 이 여자다. “아니다”

계12:5, 17의 아이, 즉 메시야의 어머니가 이 여자고 그 밖의 자손은 그리스도인을 언급한 것으로 성도의 어머니가 이 여자다. 이들은 다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이니 이 여자는 이스라엘이다. 하지만 요한은 억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무리한 해석이 된다. 이 여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다.  

3. 교회가 이 여자다. “아니다”

계12:17에서 여인의 남은 후손이 그리스도인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이 여자가 교회라면 계12:5에 나오는 아이, 즉 메시야의 출생을 교회가 하는 셈이다. 메시야인 예수를 통해서 교회가 세워진 것인데 교회가 여자라면 어떻게 교회가 메시야를 낳은 것이 되겠는가? 따라서 교회가 여자라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여자는 교회가 아니다.  

4. 하나님의 나라가 이 여자다. “그렇다”

이 해석은 겔36:26~28, 렘31:31~34의 구약의 옛 계약과 눅22:19~20의 신약의 새 계약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준 하나님 나라의 예고와 교회를 통해서 보여 준 실현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으나 예수의 초림으로 시작되었고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것이다. 구약은 오셔야 할 예수에 대한 이야기라면 신약은 오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차이를 철폐시켰고 하나 되게 하는 통일성을 만들었다.

엡2:11~22을 보면 본래 선민이 아닌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나라 밖에 있었고 소망도 없었던 자들이 복음 안에서 함께 기업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여자다. 메시야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도록 되어 있고 메시야가 오셨을 때 하나님 나라가 되셨고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증언으로 세워졌고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택하신 족속으로 서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여자는 하나님의 나라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여자는 구약에서의 광야 교회이고 신약에서는 부활을 증언하는 교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야의 오심이 여자로부터 나왔고 여자의 남은 자손이 성도들이라는 계12:5과 계12:7은 충돌됨이 없이 해석될 수 있다. 이 여자는 하나님이 세우실 「바실레이아 투 데오스」즉 하나님의 나라다.  

이 여자는 어떻게 되는가?

계12:1을 보면 그는 해를 옷 입은 여인이고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다.

해를 옷 입고 발 아래는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이 있으니 해와 달과 별은 빛의 총체다. 이 빛으로 인해 해의 영광의 빛, 달의 영광의 빛, 별의 영광의 빛이 다 다르지만 그 빛을 내는 장식품으로 인해 여자는 빛나는 것이다. 아6:10을 보면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 하구나! 신부 술람미의 모습이 빛들과 비교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여인은 빛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움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구약의 광야 교회와 신약의 부활을 증언하는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뜻한다.

둘째, 승리하는 하나님 나라가 됨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나라가 끊임없이 사탄의 도전을 받지만 결국 종말론적으로 승리한다.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는 이상 면류관은 아무도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승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는 조금도 위축되거나 바람 빠진 공처럼 쭈그러들지 않는다. 이 여자는 승리하게 되어 있다.  

셋째, 고통을 견디는 하나님의 나라다.

계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이 여인의 해산의 고통은 마지막 때의 사건임을 드러낸다. 해산의 고통은 메시야가 오기 전 일어날 은유였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가 경험하는 종말론적 고난을 뜻한다. 그리고 부르짖는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교회가 마지막 때를 지나는 고통의 형편을 알려준다. 해산의 고통은 견뎌내야 할 고통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곧 기쁨이 된다. 어떤 아이를 낳았는지를 따지기도 전에 감격이 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고통의 때다. 마지막 때, 제대로 된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애쓰는 때다. 

계12:5을 보면 이 여자가 낳는 아들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다. 하나님의 나라인 구약의 교회, 부활의 증인된 교회가 이 다스릴 남자를 낳기 위해 당연히 애를 쓰고 부르짖어야 한다. 여기 나타나는 메시야, 다스릴 남자는 이제 베들레헴 말 구유에 오시는 약한 아기가 아니다. 다스릴 남자,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통치자로서의 남자다. 진정한 통치자, 그가 오실 때까지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해산의 고통을 지나 고통은 기쁨이 된다. 고통은 잠깐이다. 의와 희라과 화평이 된다.  

넷째, 환난의 때에도 양육받는 나라다.

계12: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12: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이 여자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광야에 피할 수 있다. 그 광야는 지구상의 어떤 지점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지만 광야에서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은 보호를 받았다. 종말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나라인 부활을 증언하는 교회도 광야가 준비되어 보호를 받는다. 거기서 양육을 받는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한 것은 신8:2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광야는 시험하시는 곳으로 거기서 양육을 받는다. 

신8:3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광야 교회가 구약에도 있었듯이 하나님은 부활의 증인된 교회를 보호하고 양육하신다. 3년 반은 불행과 고난의 수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에서 그 3년 반, 1260일을 양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광야 같은 곳을 지나야 한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다. 양육의 시간들이 불행과 고난의 수다. 그러나 보호 받는 가운데 그것을 통과하고 양육되는 가운데 그것을 통과하니 얼마나 흠이 없고 티가 없는 나라인가?  

우리는 요한계시록 10장에서 말씀-두루마리 책,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증인-주의 종, 요한계시록 12장에서 하나님 나라-이스라엘과 교회를 보고 있다. 고통이 있고 불행이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용 때문이다. 여자가 누구냐 라고 물어야 하듯 용이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여자가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라면 그 용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공격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불행의 때를 보낸다는 것은 그 나라의 기업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는 시간들이다. 하지만 보호 받을 장소가 정해져 있다. 보호 받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힘들고 어려워도 용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호하고 양육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용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를 최후까지 반대하고 덤벼드는 영적 전쟁의 침입자, 반대자를 알아야 한다. 여자와 용의 대결을 바로 보면 신앙 생활의 빛과 어둠이 틀려진다. 우리의 싸울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인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도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싸워나간다. 우리의 대적자를 알고 신앙 생활에서 승리하는 천국의 백성이 되기를 축원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