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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그리스도의 날을 기다리는 자 (애 3:23-25, 빌 2: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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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날을 기다리는 자 (에레미야애가 3:23-25, 빌립보서 2:14-16)

최근 세계적으로 종말론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지구적 이상 기후와, 세계정세의 불안, 심리적 요동 등이 종말론을 부추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이비적 종말론은 어느 때나 있었습니다. 지난 12월 21일은 많은 세계인이 지구의 종말이라고 법석였습니다. 이 날이 종말의 날이라고 한 이유는 고대 마야인의 달력이 2012년 12월 21일이 마지막이며 이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나머지 달력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종말은 7,000년 뒤로 미뤄졌다고 합니다. 오래 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는 “춤추는 말의 숫자 0이 아홉 개가 될 때 고요한 아침으로부터 종말이 올 것이다”라고 하였답니다. 한국인들은 ‘조용한 아침’은 한국을 의미하고, ‘춤추는 말’은 싸이의 말춤을 의미하고, ‘0이 아홉 개’라는 것은 ‘유투브’에서 ‘강남스타일’의 조회 수가 10억이 될 때에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했습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지난 22일에 유투브 조회 수 10억을 돌파하였습니다. 인터넷 자료로 주식 시장의 변동을 그래프로 예측하는 프로그램 ‘웹봇’이 지난 12월 21일 기준으로 분석을 거부하였다고 해서 그 날이 지구의 종말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지구와 행성이 충돌하게 될 것이고, 지구의 온도가 999도까지 올라간다고 하여 종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에서도 종말론이 극성입니다. 신흥종교인 ‘전능신’(全能神)이란 사이비가 수백만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데 지구의 종말론을 퍼트렸습니다. 중국 당국에서는 이 종교를 사이비로 인정하고 지난 주간에는 신도들을 체포하였다고 합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이런 유의 이단 사이비와 시한부 종말론은 반드시 등장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1992년 이장림의 다미선교회가 예수님 오시는 날을 정해놓고 혼란스럽게 하다가 사라졌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히브리의 시간개념은 시작과 끝이 확실한 선형개념입니다. 창조는 시간의 시작점이며,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은 결정적 중간점이며, 재림은 종착점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우리의 시간은 언젠가는 종말이 있습니다. 시간의 끝이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적 종말론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시작됩니다. 시간의 종말은 분명히 있겠지만 우리는 종말적 현상만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로마서 1장, 디모데후서 3장 등에 보면 종말적 현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세계의 종말은 확실합니다. 사도행전 1:11에는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에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부인하는 자는 거짓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다시 오셨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자신이 재림주라고 하는 자는 분명한 이단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며 종말이 있을 것은 확실하지만 언제 오시는지 구체적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24:36에는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합니다. 그 날을 안다고 하는 말, 계시를 받았다는 말은 모두 거짓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날을 계시 받았다거나 계산하여 알 수 있다고 하는 시한부종말론은 확실한 이단입니다. 
  
초대교회는 기다림의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열정적이었고, 복음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찬 앞에 모이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빌립보서 2:16 하반절에는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뜻합니다. 끝까지 복음으로 견딘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수고한 대가를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도 마지막 날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첫째, 이 세대 가운데서 빛으로 살아가야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15에는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이 올 때에 빛으로 산 사람은 자랑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창조 이전의 상태를 성경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늘 함께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혼돈합니다. 삶에 빛이 없으면 삶에도 질서가 없습니다. 삶에 빛이 없으면 삶이 공허합니다. 삶이 채워지지 못하고 늘 허전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계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고 합니다. 이런 혼탁한 세계에서 흠이 없고 순전하여야 빛들로 나타납니다. 이 세계가 어그러지고 거스르기 때문에 작은 빛이라도 밝게 빛나며, 부족한 믿음이지만 빛이 날 수 있습니다. 
  
‘호프 다이아몬드’는 인도에서 발견된 것으로 사파이어 빛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크기도 중요하지만 세공이 중요합니다. 세공을 잘 해야 아름다운 빛이 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다이아몬드 세공자가 10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따질 때는 4c로 말합니다. carat(캐럿), cut(커트), color(칼러), clarity(투명도)입니다. 어떻게 자르느냐 라는 ‘커트’(cut)에 따라 다이아몬드의 빛이 달라집니다.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은 다이아몬드를 가장 빛나게 커트하는 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커트해야 다이아몬드는 빛이 나고, 빛이 나는 다이아몬드가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보석은 흠이 없게 잘 다듬어야 빛이 납니다. 거울을 만들 때 면에 흠이 있으면 빛이 굴절반사 되어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흠이 없고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빛을 발하고 빛을 발한 그리스도인이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리스도인은 빛으로 온 세상을 비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5:8에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빛으로 살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날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에봇이라는 특별한 옷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옷을 지어 대제사장 아론에게 입히라고 하셨습니다. 에봇은 화려한 예복인데 이 옷의 이름을 ‘우림과 둠밈’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림과 둠밈’의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빛’과 ‘완전’이란 의미라고 하는 해석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인 그리스도인의 옷은 빛나고 완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옷차림이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로마서 13:14에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변화산에서 황홀하게 변화된 예수님의 옷처럼 빛날 것입니다. 
  
우리시대는 누구나 명품을 좋아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명품가방 1위는 루이비똥이고, 2위는 샤넬이고, 3위는 구찌이고, 4위는 프라다이고, 5위는 에르메스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비싼 명품가방을 다 사지 못하니까 명품가방 대여점도 생겼다고 합니다. 원래 사치하다는 뜻의 ‘럭셔리’(luxury)는 ‘Lux’라는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빛’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럭셔리는 회색빛으로 일상 속에서 빛나는 밝음으로 사람에게 빛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변화산에서의 변형은 진정한 럭셔리의 경험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아름답게 변형되고, 빛을 발해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보석상에 들어와 보석을 이것저것 살피던 한 손님이 어떤 보석을 가리키며 “이 보석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가격이 왜 이렇게 비쌉니까?”라고 했습니다. 그 보석은 ‘오팔’이었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아무 말 없이 그 보석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듯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잠시 후 손을 펴자 그 보석은 무지개 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오팔은 사람 손으로 따뜻하게 감싸주면 아름다운 빛을 낸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빛을 내기를 원합니다. 빛을 발해야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으면 나도 얼마든지 빛을 낼 수 가 있습니다. 
  
심청이의 생일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심청이 생일은 구사일생이라고 합니다. “오랜 봉사활동을 거쳐 빛을 본 사람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심봉사입니다. 우리의 오랜 봉사, 신앙은 결국 빛을 보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이 찬송에도 우리가 빛 가운데 걸어가면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빛이신 그리스도는 어둠 가운데 다니는 사람은 지키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빛과 어둠은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12에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십니다. 빛의 갑옷을 입고 살면 이 땅에서 어둠을 밝히고, 마지막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거리가 있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둘째, 달음질하고 수고해야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16에는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위한 달음질과 수고는 헛되지 않고 마지막 날에 자랑이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고 고난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여 열매 맺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는 조금도 헛되지 않고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 자랑이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19에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바울은 자신의 수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위한 해산의 수고는 그리스도인의 자랑꺼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땅에서 달음질과 수고는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 애써 수고한 대가를 보상받게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7에는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받은 고난을 자랑스럽게 열거합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훈장이며, 자랑이며, 영광입니다.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종교회의는 교회 역사상 아주 중요한 회의입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소집된 회의입니다. 니케아 종교회의에 참석한 교회 대표 주교는 318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석한 교회 대표 대부분이 신앙 때문에 고문을 받아 불구가 된 사람들입니다. 눈이 뽑히고, 손이 잘리고, 다리를 잘려 절룩거리는 주교들이었습니다. 몸이 성한 주교는 12명밖에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5:10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합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날에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되어 자랑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면 하나님 앞에서 시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면 하나님 앞에서 부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시인을 받게 되면 큰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헨리 포드는 “자신이 팬 장작을 때면 남이 팬 장작보다 두 배의 따뜻함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수고한 것에 더 많은 즐거움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수고에는 따뜻함의 대가가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한 달음질과 수고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4에는 바울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열심히 달리겠다는 의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디모데후서 4:7에서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합니다. 열심히 달린 것을 고백하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스웨덴의 리나 샌델이 쓴 찬양시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습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인생의 고난과 비극에도 우리 달음질의 대가는 반드시 있습니다. 수고의 기쁨을 기대하게 합니다. 
  디모데후서 2:6에는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합니다. 달음질과 수고의 대가는 곡식을 먼저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십니다. 상급이 있게 하십니다. 면류관이 있을 것입니다. 
  
대학자 줄리안 헉슬리가 런던의 학술대회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정거장에 도착해보니  늦어서 허겁지겁 마차를 집어타고 말했습니다. “빨리 달려주시오”. 한참 가다보니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헉슬리는 “마부 양반, 어디로 가고 있소?”라고 물었습니다. 마부는 “선생님께서 저에게 빨리만 달리라고 하셨지 어디로 가라는 말씀은 해주시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빠름 빠름”이라는 광고도 있습니다. 빠른 것을 선호하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시간경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달음질 할 때 중요한 것은 달려가는 속도보다 달려가는 방향입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방향이 잘 못 되면 달리나 마나입니다. 우리는 푯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지만 아무도 도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달음질해야 합니다. 
    
존 파이퍼는 “참 군인은 갑옷을 입을 때 자랑하지 아니하고 갑옷을 벗을 때 자랑하는 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달음질이 끝나봐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달음질이 끝날 때까지 끈기 있게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결론 

이탈리아인과 유태인이 서로 선조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이탈리아인은 “얼마 전 로마의 유적을 발굴했더니 녹슨 동전이 나왔단 말일세”라고 했습니다. 유태인은 “그런데?”라고 응수합니다. “아둔하군. 우리 선조는 그때 벌써 전화를 사용했다는 증거야”라며 이탈리아인은 자랑했습니다. 그 때 유대인은 “우린 요전에 예루살렘을 발굴했지만 아무 것도 안 나오더군”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탈리아인은 의기양양하게 “그럴거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자네야말로 아둔하네. 우리 선조는 당시에 벌써 무선을 이용했더란 말이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자랑은 쓸데없는 자랑입니다. 조상 자랑이 아니라 내 자랑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자랑이 아니라 마지막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의 달음질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달음질하고, 수고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10:17에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그리스도의 날 우리가 자랑할 것이 많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날 우리의 자랑이 주 안에서 하는 자랑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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