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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하나님은 내가 받을 몫의 전부 (시 73: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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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내가 받을 몫의 전부 (시 73:21-28)


[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 나는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주님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나를 주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가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오,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망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정절을 버리는 사람은, 주님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

•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상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한다면 어쩌면 붉은 색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지금 산 자의 땅에 서 있습니다. 비틀걸음일망정 조금씩이나마 앞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거세개탁擧世皆濁’을 택했습니다. ‘온 세상이 모두 탁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초나라의 충신인 굴원이 지은 ‘어부사’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거지꼴이 되어 강가를 거닐며 시를 읊고 있는 그를 보고 어부가 왜 그런 행색으로 다니느냐고 묻자 그는 “온 세상이 흐린데 나만 맑고, 사람들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 그래서 쫓겨났다”(擧世皆濁我獨淸 衆人皆醉我獨醒 是以見放)고 말합니다. 거세개탁의 대구는 중인개취입니다. 뭇 사람이 다 취해 있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탁하고 취해 버린 세상이라니 참 답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고단한 일상을 살아내야 합니다. 

며칠 전 이른 아침, 병원에 가느라 전철을 탔습니다. 시청역을 지나면서 자리가 나길래 앉아 책을 펼쳐들었는데,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젊은이의 몸에서 나는 찌든 담뱃내 때문이었습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다른 곳으로 피할까 생각도 했지만 괜히 유난을 떠는 것 같아 참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 내 몸과 영혼은 어떤 향기를 발하고 있는가?’를 묻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인가?’ 그 젊은이는 내게 그 질문에 답하도록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젊은이가 어디서 밤을 지새웠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피로에 찌든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그래서 화살기도를 날렸습니다. ‘하나님, 이 젊은이에게 오늘 하루를 살아갈 생의 보람과 명랑함과 기쁨과 삶에 대한 복된 전망을 허락해 주십시오.’

기도를 드린 후에도 여전히 어질어질하여 책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책을 접자 한 해 동안 내 인생의 동행이 되어 주었던 이들의 고마운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어둡고 탁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모되어 버렸던 신앙의 칼날을 예리하게 벼리도록 도와주었던 사람들, 응달진 마음에 마치 한 줌 햇살처럼 다가왔던 사람들, 생의 열매가 부실한 데도 ‘애썼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말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 삶의 현실을 돌아보며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야 합니다. 시편 73편은 우리 삶을 비춰볼 좋은 거울입니다. 

• 어처구니없는 현실

시인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믿음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사뭇 다릅니다. 정직하게 사는 이들이 번번이 손해를 보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조롱거리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악스러운 사람들, 자기 이익에 발밭은 사람들, 공교로운 말로 사람들을 호리는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합니다. 착하고 어수룩한 사람들은 그들의 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눅16:8)고 탄식하듯 말씀하셨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어놓습니다. 악인들이 평안을 누리고 교만한 자들이 거들먹거리며 거리를 휩쓸고 다닙니다. 그들은 죽을 때도 고통을 겪지 않고, 사람들이 흔히 당하는 고통도 재앙도 그들을 비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돈이 많으니 좋은 음식, 멋진 옷, 안락한 집을 누리고, 마음 내키면 여행도 잘 다닙니다. 세상에 거리낄 것, 무서울 것 하나 없다는 듯이 그들은 거만한 눈을 치켜뜨고,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이들을 비웃고, 악의에 찬 말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곤 합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는 데는 기민하고,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절망에 빠진 노동자들이 여럿 세상을 버렸습니다.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던 생의 터전이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를 지지했든 그런 자리에 선 이들의 절망과 고통에 눈 감으면 안 됩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전지전능하신데 어째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고통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도 커져만 갑니다. 하지만 이 물음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은 없습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답 없는 물음을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그러하다 보니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11)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면서 그들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가 됩니다. 서서히 세상과 타협할 준비를 갖추는 겁니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인습적 신앙이 무너진 자리에 남는 것은 당혹감 혹은 허무함입니다. 

• 회의를 넘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묻게 됩니다.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13)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매사에 조심하고, 더 많이 갖고 더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을 애써 절제해 온 것이 다 허사란 말인가? 자기에게 부여된 몫 이상의 것을 누리는 이들이 우리를 보고 ‘왜 그렇게 살아?’ 하고 비웃던 일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얽히고설킨 생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지만 역시 답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전3:11)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답답하고 고통스럽게 이어지던 시가 17절에 와서 갑작스럽게 전환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악인들이 행복해 보이지만 그 삶에는 지속성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자각합니다. 지금은 행복해 보여도 제삿날을 위해 준비된 짐승처럼 최후의 날이 급작스럽게 그들을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인간의 시간에 입각해 바라보면 암담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에 입각해 바라보면 오히려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우리의 시간을 조율하는 과정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지금 부요한 사람, 지금 배부른 사람, 지금 웃는 사람, 지금 사람들에게 높은 평판을 듣는 사람은 화가 있다고 말합니다(눅6:24-26). 모진 말입니다. 조금 불편하게 들리는 말씀인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말 앞에 감히 사족을 달아보면 뜻이 명확해집니다. 

“지금 굶주리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도 홀로 ‘배부른 사람’, 지금 고통과 슬픔에 잠겨 울고 있는 이들 곁에서 홀로 ‘웃고 있는 사람’, 지금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끝에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자리에 있지만 정의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사람은 화가 있다.” 

인생은 유한합니다. 당장은 실패자처럼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인은 땅의 현실에 사로잡혔던 눈길을 거두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게 도래합니다. 

시인은 성소에서 하나님만 만난 게 아닙니다. 자기처럼 선한 뜻을 가지고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이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자기 홀로 세상의 모순을 다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아 삶이 암담했는데, 세상에는 자기 못지않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안인지요? ‘이제 남은 것은 나 하나뿐’이라고 투덜거리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 칠천을 땅에 남겨 놓았다(왕상19:18)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 공동체야말로 우리 믿음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지켜주는 버팀목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은 우리를 든든히 붙잡아주는 하나님의 손과 발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들은 자꾸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절망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 홀로, 인생이라는 광야에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관점이 새로워지니 오히려 지금 행복한 자, 지금 거들먹거리는 자들이 딱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고,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시리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보입니다.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질 운명인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탄식하고 원망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우둔한 한 마리 짐승과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 신앙의 재정위

현실에 대한 속상함, 원망, 탄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현존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 눈이 밝아지면 현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됩니다. 신명기 말미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그는 “주님께서 광야에서 야곱을 찾으셨고,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황야에서 그를 만나, 감싸 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신32:10)고 노래합니다. 놀라운 돌보심입니다. 노래는 이어집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님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다른 신은 옆에 있지도 않았다”(신32:11-12). 

모세의 이런 깨달음은 고스란히 시인의 고백이 됩니다. 시련과 탄식과 영혼의 어둔 밤이 물러가고 은총의 아침이 밝아오자 삶이 든든해졌습니다. 붙잡아 주시고, 교훈으로 인도해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실 하나님이 바로 곁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26) 

송년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마음에 떠올라야 하는 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경제는 어려워지고, 정치는 혼잡하고, 문화는 음란해지고, 교육은 파탄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심은 사나워지고, 연약한 이들의 절망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요즘은 고형원 님이 만든 <오직 믿음으로>라는 곡을 자꾸 되뇌게 됩니다.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나는 주를 신뢰해/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우리가 세상에서 누릴 진짜 복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28)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을 뻔했던 시인은 영혼의 어둔 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신 일을 전파하는 것을 자기 생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힘겨웠지만 주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온 한 해였습니다. 후회스러운 일이 많지만 너무 자책하지는 마십시오. 지금은 다만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받을 몫의 전부’라는 시인의 고백을 자꾸만 떠올리십시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금년의 마지막 시간을 혼돈 속에 헛되이 보내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보내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현실의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을 기쁘게 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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