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송년] 용서의 영성 (마 18:15-35)

첨부 1


용서의 영성 (마 18:15-35)


오늘은 2012년도 마지막 주일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주일 예배의 설교 주제를 ‘용서’로 정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준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새 해를 맞이할 때 긴장을 하며 맞이합니다. 왜냐하면 새 해를 맞이할 때 지난 한 해 동안에 선한 일을 많이 했으면 자신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면 새 해에 하는 모든 일들이 형통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가운데 어려운 일이 있어도 도리어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건강 문제, 자녀 문제, 직장과 사업의 문제 등 모든 문제가 형통하게 되는 한 해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반대로 지난 한 해 동안 나쁜 일을 많이 행했다면 그의 이름이 저주의 책에 기록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저주의 책에 기록되면 새 해에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되는 일이 없습니다. 가정도 어려움을 겪게 되고, 건강에도 문제가 생기고 되는 일이 없게 됩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에게 새해에는 자신의 이름이 어느 책에 기록이 될지 긴장하게 됩니다. 새해의 설날은 축복과 저주가 결정되는 두려운 날이고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한 일을 많이 해서 그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는 것이 확실한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또 악한 일을 많이 해서 그의 이름이 확실하게 저주의 책에 기록되는 사람도 적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될지, 저주의 책에 기록될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될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것이 바로 대속죄일입니다. 대속죄일은 히브리어로 ‘욘 키퍼(YON KIPPER)’하고 합니다. 

욘은 ‘날’을 의미합니다. 키퍼는 ‘덮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욘 기퍼’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덮는 날’입니다. 죄를 씻음 받는 날입니다. 대속죄일은 매년 1월 1일부터 10일까지 행해집니다. 대속죄일의 정점일인 1월 10일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 죽은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죄를 고하고 용서를 받습니다. 

대속죄일 기간이 1월 1일부터 10일인데 유대인들은 1월 1일부터 9일까지 9일간에 걸쳐 자신이 이웃들에게 지은 죄와 잘못을 그 사람을 찾아가 고하며 용서를 빕니다. 대속죄일 기간의 열흘 중에 9일은 사람들에게 지은 죄를 빌고 용서 받은 후에 10일은 하루 종일 금식하며 하나님께 지은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은 죄를 용서받는 기간이 9일이고, 하나님께 지은 죄를 용서받는 기간이 1일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해서가 아닙니다. 용서해 주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고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무소부재 하신 분이시기에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죄를 고백하면 용서를 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곳을 찾아가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빌었을 때 그 사람이 용서를 해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찾아가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시간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시간보다 훨씬 깁니다. 이 기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몇 번까지 용서를 구해야 할까요? 유대 랍비들은 탈무드에서 세 번까지는 용서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세 번이나 증인을 동행하여 용서를 구하였는데도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 집에 신발을 털어버리고 자유해 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용서 해 주는 사람은 세 번까지는 용서해 주라고 말합니다. 세 번까지 용서를 해 주었는데 또 다시 악한 일을 행하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라고 물으면서 ‘일곱 번이면 됩니까?’라고 말합니다. 유대주의에서 랍비는 세 번을 용서하라고 말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후에 율법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일곱 번을 용서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의 관대함과 넓은 마음을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이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490번까지만 하라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것은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달리 말하면 상대방이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살다보면 용서해 달라고 해서 용서를 해 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시는 그 못된 말, 못된 짓을 하지 않습니까? 개중에는 정말로 뉘우치고 다시는 그와 같은 나쁜 말과 나쁜 짓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80% 이상의 사람은 다시 반복해서 나쁜 말을 하고 나쁜 짓을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의 죄된 모습을 알고 계십니다. 용서를 하려면 용서를 비는 것과 관계없이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용서를 빌어도 용서해 주기가 어려운데 예수님은 용서를 빌지 않아도 용서할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떠나 방탕한 삶을 살던 작은 아들이 집에 돌아 왔습니다. 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집이 그리워서 돌아온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이 어디 보다도 편해서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용서를 비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용서를 빌기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아들이 돌아오는 것 자체로 이미 용서해 주셨습니다. 진정으로 용서를 빌면 받아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하고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들이기에 이미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용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로마 병사들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통을 겪으시는 가운데서도 ‘아버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용서의 기도를 하십니다. 로마 병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비웃고 조롱하며 낄낄 거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미 그들을 용서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셨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아 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실 때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그들에게 너희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정색을 하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화를 내시지도 않았습니다. 서운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너희들 평안하냐?’고 물으시며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바보이십니다. 쓸개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당하시고도 그냥 용서해 주십니다. ‘바보 예수’입니다. ‘정말 바보 중의 상 바보’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구해도 용서를 해 주기가 어려운데 예수님은 용서를 빌기 전에 이미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셨고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보면 예수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후에 하나의 비유를 들어 천국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임금으로부터 약 3조원에 달하는 빚은 탕감 받은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하는 자신에게 천만 원 빚진 동료를 빚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임금이 신하에게 노하며 그에게 탕감해 주었던 빚을 갚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예수님께서 결론으로 주시는 말씀이 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입는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빌고 용서 받는 사람도 복됩니다만 용서를 해 주는 사람은 더 복됩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도 불행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더 불행합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자존심을 내세우게 하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마음을 갖게 함으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게 합니다. 한편으로는 상대방이 용서를 구한다 할지라도 마음을 더 굳게 만들어 용서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단이 원하는 것은 관계를 깨고 그 깨어진 관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진실 된 마음으로 고백하며 용서를 구할 마음을 주십니다. 한편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을 두드려 열게 하셔서 용서하는 마음을 품게 하십니다. 용서를 구하지도, 용서를 하지도 않는 관계와 상황은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관계와 상황은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은 용서를 구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성숙한 성장을 이루십니다.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계십니다.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셨는데 10대 때에 트랙터를 그렇게 운전하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졸라 트랙터 운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트랙터를 몰고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트랙터를 가르쳐 주시면서 트랙터에 기름을 넣을 때는 반드시 시동을 끄고 기름을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멀리 출장을 가졌습니다. 

하이벨스 목사님은 트랙터를 몰고 벼를 수확했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다 떨어진 것입니다. 트랙터에 기름을 넣는데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시동이 걸려 있는 상태에서 기름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불이 났습니다. 불길은 삽시간에 트랙터 전체로 번졌습니다. 타이어가 불에 타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저녁이 되어 아버지가 돌아오셨습니다. 하이벨스 목사님은 아버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라 사실을 말씀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가족이 저녁을 먹었는데 식사 후에는 아버지가 항상 아이스크림을 두 개씩 후식으로 주었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에 아버지가 아이스크림을 한 개만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하이벨스 목사님은 아버지가 이미 트랙터에 불이 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입을 열어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버지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트랙터는 보험에 들어 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 나는 단지 네가 몸이 다치지 않았는가 하는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건강하니 되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해야한다’ 고 말씀하시면 하이벨스 목사님을 가슴으로 안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하이벨스 목사님은 그 아버지의 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배웠다고 말합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그것을 꾸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꾸중과 화냄이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잔소리와 분노가 절대로 우리의 자녀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부부가 서로의 단 향한 고함과 날카로운 언어들이 부부의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용서를 빌라고 요구하는 닫혀진 마음과 경계심이 상대를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 변화와 평화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용서하고 품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 방법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2012년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 해를 맞이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에 맺혀 있는 감정과 굳어지고 굳게 닫힌 마음들이 하나님의 어루만지심 속에서 녹아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서운한 감정과 원망의 마음, 좁은 마음, 미움의 마음, 분노의 마음 등을 내려놓읍시다. 서로 용서하며 삽시다. 아버지를, 어머니를 용서합시다. 자녀를 용서하고, 교우들을 서로 용서합시다. 영적인 심호흡을 크게 들이 쉬고 우리의 용서의 영성을 풍성하게 만들어 한 해를 더 귀한 모습으로 발전적이고 성숙한 모습으로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용서의 영성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