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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깨어 근신합시다 (살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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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근신합시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6천년 전 고대 수메르 설형문자 기록에 ‘요즘 젊은이들 버릇이 없어 장래가 염려된다’는 글이 적혔다고 합니다.그런데 그후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글에도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도 요즘 젊은이들의 버릇 없음을 탄식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어른들은 ‘요즘 젊은이들은 통 버릇이 없으니 세상이 어찌되려는지 참 말세다’라고 걱정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든 젊은이들의 버릇 없음은 어른들의 염려거리였습니다.  버릇없다던 젊은이가 어른이 되면 또 다시 젊은이들을 향해 너희는 왜 그렇게 버릇이 없느냐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아직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는 것이 신기합니다.어른이라고 무조건 젊은이들을 경망스럽고 미숙한 세대라 꾸짖기만 할 것은 아닙니다.젊은이들은 어른들을 향해 고리타분하고 이기적이며 고집만 부리는 무기력한 세대라고 손가락질 할 것도 아닙니다.

어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남겨주어야 할까 고민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순발력과 패기가 넘치는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지혜와 경험을 존중하며 귀기울임으로 그들의 풍성한 자원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상호간 이해와 존중, 책임지는 마음이 없이 세대간의 불신과 불평으로 서로를 비난하기만 한다면 그런 세상이야말로 정말 발전이 없고 곧 망하게 될 세상입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불문하고, 신자와 불신자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언젠가 세상의 종말이 오고야 말것이라 생각합니다.인류의 멸망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 정면 충돌하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빚어낸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파괴가 지구에 가져다 줄 대재앙을 의미하기도 하며, 갈수록 지능적이고 포악해지는 범죄와 잔인한 인간성으로 보건대 결국 모두 멸망하는 길로 갈 수 밖에 없다고 탄식하는 두려움입니다.  민족과 국가들이 전쟁을 준비하며 쌓아놓은 핵무기가 실제로 사용되는 그날이 인류 멸망의 날이 될 것이라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세 혹은 인류 최후의 날에 대한 의미는 이렇게 다양합니다.  옛날에도 사람들은 말세라고 탄식하였지만 지금 우리들이야말로 마지막의 끝을 살고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충만하다.지구 최후의 날에 관한 종교적인 예언들과 소설, 영화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과학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우주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여 최후의 날을 대비하라고 경고하는 과학자들의 예측 등은 이 시대를 사는 인류들에게 충분히 겁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요?중국에서는 대홍수나 쓰나미를 대비해서 현대판 노아의 방주를 만든 사람이 있다던데 우리도 그런 것을 준비하면 다가올 지구의 종말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중국인이 만든 현대판 방주는 3억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 만들었다니 가난한 사람은 만들 엄두를 낼 수도 없습니다.  노아 홍수 때는 세상 사람들이 홍수 심판을 경고했지만 믿음이 없어서 멸망했는데 우리 시대에는 어쩌면 가난해서 멸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이 정말 최후의 날을 대비하는 방책일까요?

고대 마야인들이 만들었다는 달력을 근거로2012년 12월21일이 지구 종말의 날이라 예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런 예언을 소재로 ‘2012’라는 영화가 개봉되었고 어쩌면 그 영화의 이야기가 실제로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슴 졸였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날에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자 어떤 이들은 날짜를 수정하여 24일이라고 발표했습니다.24일 밤 성탄축하예배에 보이지 않던 분들이 혹시 그날의 무슨 일에 관여되어 뿅하고 사라졌나 했는데 오늘 다시 교회에서 만나게 된 것을 보니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만든 해프닝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서기 2천년대를 전후하여 종말에 관한 거짓 예언과 종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비상식적인 행동들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권력와 이득을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죽고 죽이는 살상이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이것이 세상의 종말을 호기심이나 웃음거리로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감이나 준비를 소홀히 하도록 만드는 거짓 영들의 미혹입니다.늑대가 나타났다고 심심풀이로 거짓말을 반복했던 양치기 소년의 우화처럼 반복되는 가짜 종말에 대한 예언에 속은 사람들이 진짜 종말에 대한 긴장감을 풀어지게 만드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얼마나 많은 거짓 종말론자들이 종말의 날을 예언했다가 불발되고 또 번복하고 있습니까?날짜를 정해놓고 그날을 기다리던 거짓 예언자들과 추종자들의 어리석은 행동들은 이미 거짓으로 판명이 났습니다.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직도 정해진 어느 날이 마음에 걸려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그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하신 말씀을 따르면 날짜를 계산하여 발표하는 그 자체가 바로 거짓이라는 증거입니다.  마지막은 분명이 있지만 그 시점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경고처럼 그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경을 자기 뜻대로 해석하는 사이비 종말론자들은 세상의 종말이 꼭 밤에 온다고 생각합니다.오늘 읽은 말씀처럼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른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그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결정적 오류를 범합니다.옥스포드의 밤이 서울의 밤과 같은 시간입니까?한국과 영국의 9시간 시차는 어떻게 해결하지요?예수께서 다시 오실 그날, 세상의 마지막이 임하는 그 밤의 시간이 영국과 한국의 시간차를 두고 이루어진다는 말일까요?

한국에 예수님이 도착하셨다는 소식이 인공위성을 통해 영국에 알려지면 아직 낮시간에 뉴스를 들은 사람들이 빨리 예배당으로 몰려가 통성으로 회개기도하다가 밤이 되어 오신 주님을 맞이하면 된다는 말일까요?만일 그렇다면 한국에서 주님 맞이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얼른 초음속 로켓트를 타고 영국으로 날아오는 도중에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기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놓고 영국 땅에 착륙하여 기다렸다가 밤이 되어 오신 주님을 어서오시옵소서 하고 맞이하면 될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주님은“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24:27) 하셨습니다.  한국에 있든 영국에 있든 모든 사람이 동시에 재림하신 주님을 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미혹되어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해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 해도 믿지 말라 하셨습니다.다시 오실 주님은 어느 특정 장소에 모여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있던 그 자리에서 뵙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밭을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맷돌을 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 하신 주님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0-44) 하셨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악용하여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을 읽고 믿는다는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잘 미혹되고 있습니다.약속의 말씀이 아니라 어려운 자기 형편과 상황에  집중하거나 사람에게 정신이 쏠리고 그 사람들의 말에 혹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날이 도적같이 이를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자세히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때와 시기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부정하거나 혹은 무시하며 세상의 일에만 몰두하던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마치 도적이 밤중에 몰래 침입하는 것처럼 갑자기 찾아와 당하게 됩니다.

‘봐라!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이렇게 평안하고 안전한데 무슨 세상의 마지막이 다가왔다고 호들갑을 떠느냐?’하며 그날에 대한 대비가 없이 살고 있는 그것이 곧 어두움이며 밤의 시간입니다.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어두움에 있기 때문에 그날이 오고 있음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그런 사람들에게는 마치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찾아온 것처럼 그날이 갑자기 임하게 되리니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밤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절하고 죄악의 어두움에 잠겨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는 어두운 삶을 의미합니다.그러나 우리는 낮의 자녀들이요 빛의 자녀들입니다.세상에 참 진리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고백하며 사는 성도들은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고 빛 가운데 살기 때문에 그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즐거움과 죄악의 깊은 밤을 지내는 사람들처럼 잠에 취해 있고 술에 취해 방탕한 삶을 살지 말고 깨어 근신하라 하셨습니다.  

근신하라는 말은 맑은 정신으로 자기 자신과 생활을 조절하며 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정신을 차리고 깨어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무장하여 어두움의 세력과 맞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승리의 날을 바라보는 이것이 그날을 기다리는 빛의 자녀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에게는 주님의 날이 도적이 찾아오는 것처럼 몰래 임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고 기대하는 상태에서 맞이하는 승리의 날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시며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신랑이 더디 오자 열 처녀들은 모두 졸며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맞으러 나가는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 불을 켤 수 없어 결국 신랑을 영접하여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어쩌면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이 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기다림에 지쳐 졸거나 잠이 들 수 있습니다.그러나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던 사람은 자다가라도 깨어 갑자기 찾아오신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올 지구의 종말, 다가올 최후의 날에 대한 공포와 염려로 겁먹지 말고 항상 준비하며 기다림으로 오늘을 행복하게 삽시다.최후의 날은 언젠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쓸데없이 엉뚱한 날짜를 계산하여 예언자인양 선포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미혹하여 혼란에 빠뜨리는 거짓말장이들입니다.  

20년 전에 다미선교회 이장림이 그랬던 것처럼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런 거짓말로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리고 있습니다.  심약한 사람들을 정신적 공황상태로 몰아넣고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들의 재산과 육체를 빼앗아 탐욕을 채웁니다.  예언된 날이 불발되어 거짓말에 속은 추종자들이 허탈감에 젖어 정신적 충격으로 자살을 하거나 폐인이 되어버리는 것을 보고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또 다른 날을 발표하여 거기 목매여 사는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버립니다.

진정한 종말론자는 그런 황당한 거짓말장이들이나 그런 속임수에 현혹되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을 성실하게 사는 사람입니이다.초대교회 지도자들이었던 사도들,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 등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목격한 성도들은 그 누구보다 종말의 긴박감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주께서 곧 다시 오신다 하신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렸던 성도들은 어느 시대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확실한 종말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종말의 긴박감 속에 그날을 기다리는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 중에 허무주의에 빠져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도 나왔습니다.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며 자기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주님이 곧 오시면 썩어질 물질들과 육체는 헛된 것이니 일할 필요 없이 있는 것으로 먹고 살면서 그날을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부추겨 일하지 못하게 하고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여 문제만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을 오해하며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경고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시대에 벌써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거짓 종말론자들을 경계하고 침착하게 자기 할 일에 충실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라 당부합니다.

이런 식의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은 지극히 작은 수효에 불과하지만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돌출행동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마련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허무주의자들과 비관주의자들, 현실도피주의자들, 약속의 말씀에 대한 분별력이 없고 아무런 목표도 목적도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무책임한 사람들에게서 똑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자니 뭔가 허술하지만 말도 안된다고 무시하자니 왠지 꺼림직하고 불안하여 우왕좌왕합니다.  정신적인 공황에 빠져 맥을 놓아 자살을 하거나 집단 자살을 하는 일도 생깁니다.  이판사판이니 원없이 하고픈 일 하다가 망해도 망하리라 하며 탈선하는 사람도 나옵니다.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장이들에게 속아 패가망신의 길을 걷습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점술가나 과학자들 혹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주장하는 우주적인 종말론에는 귀를 기울이며 걱정하지만 정작 개인의 종말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가 없이 삽니다.

우주적인 종말이 있는 것처럼 나의 생이 마치는 개인 종말도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건강한 종말론자는 오늘 나에게 주어진 날을 종말의 날로 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오늘을 마지막 날로 여기고 산다면 너무 스트레스가 될까요?그러나 생각을 바꿔 나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이 마지막이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스트레스가 아니라 내일을 잘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오늘의 양식 12월31일자 읽을거리에 나온 글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자신의 죽음을 늘 내다보며 날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프랑소와 페넬롱은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주 생각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것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의 무지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죽음은 세상적인 사람들에게나 두려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당신은 앞으로 3개월 밖에 살 수 없으니 준비하시오 했다면 시한부 인생을 사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삶의 마지막을 맞이해야 좋을까요?3개월 내내 분노하고 슬퍼하며 억울하다 부르짖으며 곁에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두려움 속에 살다 끝내 고통스럽게 떠나는 사람도 있고,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아쉽고 부끄러웠던 일을 정리하고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 속에 용서와 사랑을 주고받으며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지내다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떠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어느 쪽이 개인 종말을 지혜롭게 맞이하는 사람입니까?  

우주적인 종말이든 개인 종말이든 마지막을 앞두고 사는 교우 여러분 서로 사랑하며 삽시다.사랑하며 살기에도 모자란 시간인데 이 소중한 시간들을 서로 미워하고 싸우며 허비한다면 얼마나 아깝습니까?지금 당장은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루만 지나도 아니 몇 시간만 지나고 나면 금방 후회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내가 그때는 왜 그렇게 마음에 여유가 없었을까?  왜 그렇게 분노했고 미워했으며 모진 말을 내뱉었을까?그때 조금만 더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고 용서했으면 지금 이렇게 어색하고 힘들지는 않았을텐데, 내가 그때 나의 시간과 물질을 나누며 마음을 조금만 더 나누었으면 지금보다 훨씬 즐겁고 행복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마음을 넓혀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여유를 가져봅시다.그 마음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오늘에 충실하며 감사하는 사람은 내일을 소망 중에 기다리며 맞이합니다.내일도 오늘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리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세상의 마지막 날은 그 때와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종말이 분명히 임한다는 것, 그 마지막 날의 중심에는 다시 오시겠다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진리를 강조하려는데 있습니다.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통과하면 새생명을 생산합니다.그렇다면 진통이 몇월 몇일 몇시에 시작될까 그것이 중요한가, 아기가 분명히 출생한다는 것이 중요한가요?당연히 생명이 태어나 내 품에 안기는 그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간표 속에 있으니 아무도 그 날과 시를 알 수 없지만 그날이 오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이며 세상은 그분의 주권 아래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언제 오실런지 아무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주님이 홀연히 오셨을 때 지난 일은 다시 되돌릴 수 없고 그분의 주권을 따라 선과 악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그래서 그분의 오심이 어떤 이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되고 두려움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수고와 눈물이 그치고 쉼을 얻는 위로가 됩니다.

한 해를 마감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와있습니다.어제와 오늘을 시간으로 나누어 구별하는 것처럼 2012년과 2013년으로 나누는 것 역시 묵은 해와 새로운 해로 구별하여 매듭을 짓는 과정입닝다.  사람들이 우주의 비밀을 연구하여 예측한 어느날이 결코 지구의 종말이 될 수 없지만 그날이 하루 혹은 한 해 더 가까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날짜와 시간을 계산하여 어제와 오늘, 금년과 내년을 구분하며 사는 것은 과거를 거울삼아 어제보다는 오늘과 내일을 그리고 금년보다는 내년에 더 가치있는 삶를 살고자 하는 결단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만이 가진 지혜요 복입니다.  

속이 텅빈 대나무가 곧게 서고 단단하게 보이는 것은 키가 자라면서 생긴 그 몸에 마디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느다란 줄에 매듭을 만들면 더 질기고 튼튼한 줄이 됩니다.우리가 한 해를 지나며 또 하나의 마디를 만들고 매듭을 만들고 있습니다.지나온 1년 동안 기쁨과 즐거움, 아픔과 슬픔, 사랑과 미움이라는 온갖 상황과 경험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한 매듭을 짓고 있습니다.뒤를 돌아다 보면 후회되는 일들도 많고 부끄러우며 죄스러운 시간들도 있지만 이 모든 시간들을 뒤로 보내며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크신 은혜임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이것이 깨어 근신하는 성도가 가진 건강한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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