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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임마누엘(4)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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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4) (마 1:18-25)


어느 시골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도시교회로 청빙되어 떠나게 되었습니다. 목사의 네 자녀는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고 목사 부인도 기쁨에 넘쳐 있었습니다. 고생스럽던 시골교회의 생활을 끝내고 대도시의 이름 있는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떠나보내는 가난한 농부들이 그 목사를 모시려는 승용차 앞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가지 마십시오. 목사님께서 가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여 성도들은 울고 남 성도들은 슬프게 고개를 떨어뜨리며 마을에서 멀어지는 트럭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트럭이 멈추어 서더니 방향을 되돌려 다시 마을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차에서 내린 목사님은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가족은 계속 여러분과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하고 교인들과 포옹을 하였습니다. 그날 밤 그 목사는 시를 하나 썼습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다 기도 드리니 /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 앞에 하나라
피차의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 늘 동고동락하면서 참 사랑 나누네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 주 안에 교제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이것은 찬송가 221장을 쓴 존 파우셋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그 후 파우셋 목사는 54년 동안이나 그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영국의 국왕이 그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아 그 목사에게 “귀하가 희망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고 싶으니 서슴지 말고 말해 주시오”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는 국왕에게 답장하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우리 교회 성도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국왕의 총애보다 값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지은 시에 나타난 것처럼 슬픔도 수고도 함께 나누며, 서로 위로하고 서로 울며 사는 삶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요 최고의 가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교회 공동체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향남교회’라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용서함으로써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고락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인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와 아픔을 함께 나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하는 일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소서.” 
이것은 선명회(World Vision)의 창설자 밥 피어스 박사가 생전에 늘 하던 기도입니다.
얼어붙은 동태 모양으로 굴러다니던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보고 하나님과 함께 마음 아파하던 나머지 그는 수백 채의 고아원을 설립하고 수만 명의 고아들을 구제했습니다. 같은 심정으로 그는 아시아 여러 나라와 남태평양 원주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을 수없이 전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옳은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그대로 가지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상하실 때, 같이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음 아파 우셨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집결소인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고 우셨습니다. 마음 상할 정도로 관심 있는 일이면 어찌 하나님이 모르는 척하실까요? 

왜 하나님께서 독생자 즉 외아들 인간 예수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우리와 똑같이 아픔을 겪기 위해서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수님과 같이 아버지로 섬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고생을 해 본 사람이 아니고는 고생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파하는 사람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다름 아닌 나도 겪어 봤다는 말입니다. 나도 그 아픔 안다는 것입니다. 

올해 유행하는 말 중 하나가 “너나 잘해”입니다. 그런데 건배를 하면서도 “너나 잘해”라고 한답니다. 예전에는 개나발이라는 말이 유행했었습니다. 이 개나발은 “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너나 잘해”는 뭐냐? 이게 무슨 욕을 하는 거냐 하면 그게 아니랍니다. ‘너와 나의 잘나가는 새해를 위해’라는 뜻이랍니다. 단순히 비아냥거리는 말로만 들리기 쉬운 말도 이렇게 해석을 붙이니 아주 정겨운 축복의 말이 되는 것을 봅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픈 일 한 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뭐 그까짓 일 가지고 그러냐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까짓 일이 어디 있습니까? 같은 아픔이라도 사람마다 다 느끼는 아픔의 정도는 다릅니다. 음식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싱겁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픔을 느끼는 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없는 고난을 겪어온 사람들은 웬만한 어려움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합니다. 하지만 어려움이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작은 어려움에도 그냥 쉽게 넘어지고 맙니다. 배를 늘 타본 사람은 어지간한 파도에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배를 처음 타보는 사람은 작은 너울에도 금방 멀미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성경에 보면 욥과 같이 어려움을 당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웠던 이웃이 도적으로 변하여 빼앗아간 것입니다. 거기다가 태풍에 무너져 내린 집에 아들 딸 10남매가 한꺼번에 깔려죽습니다. 그나마 몸에는 심한 병까지 생겨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로 아픕니다. 그런데 멀리서 위로하겠다고 찾아온 친구들마저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보다는 회개하라고 남들 앞에서 아주 의로운 척 행동했던 모든 것이 이제 너의 이런 모든 재난으로 다 드러났으니 회개하라고 윽박지르고 있으니 사실 몸보다도 마음이 더 아픕니다. 

몸이 아픈 것은 그래도 약이라도 있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어떤 약을 써야 합니까? 위로라는 약, 격려라는 약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위로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지켜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죽음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 예수를 팔았다고 하는 자책감을 견디지 못한 가로 유다가 스스로 목을 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결국 그 마음아 황폐해진 것입니다. 스스로는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옆에서 누군가 그를 지켜 주었다면 그가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를 갈릴리 바다로 찾아오셨던 주님께서 유다도 찾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때를 기다리지 못했을까요? 그건 그의 옆에 그를 위로하고 그를 붙잡아 주기위해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는 스스로 사람들을 피했습니다.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라도 그 곁에 좋은 친구가 있었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어둠 속으로 그리고 마침내 결국은 멸망의 길로 빠져들어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누군가가 나와 함께 아픔을 함께 한다고 하는 것 나의 아픔을 알아준다고 하는 것만큼 큰 위로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보다도 더 큰 아픔을 겪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태어나자 외국으로 목숨을 위해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산골짜기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랍니다. 그것도 가장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많은 동생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그나마도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동생들을 돌보는 장남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합니다. 

그랬기에 배고픔도 알고 없는 자의 서러움도 압니다. 오죽 하면 사람들로부터 갈릴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하는 비아냥거림도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촌놈 주제에, 촌뜨기가 그런 말입니다.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고 나서도 그는 변변한 대접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까지 하셨을 정도니 그 형편이 어떠했겠습니까? 가끔은 그를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는 사람도 있지만 바리새인 시몬처럼 대접한다고 청해 놓고도 그 발 씻을 물조차 주지 않는 아주 모욕적인 대접도 받아보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섭섭해 한 적도 없습니다. 그랬기에 우리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바울 사도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많은 고난을 당했다고 하면서 그러나 이로서 내가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노라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먼저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벧전 2:19~2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주님이 우리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실 수 있는 것은 이토록 주님이 몸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위로로 새 힘을 얻고 주를 위하여 당하는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평간과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힘차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악마는 우리의 문제를 부풀립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 큰 시련이 왔구나" 하고 먼저 낙담부터 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재난도 단순히 하나의 문제 정도로 만드는데, 이 악마는 사소한 문제도 큰 재난인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들 중에 비관을 잘하고, 우울증에 자주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어릴 때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이 문제를 확대시키곤 했습니다. 어느 날 얼굴에 작은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자 “이제 죽었다. 

이제 죽고 있는 거야”하면서 슬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우울증의 악마는 우리 주위에 만연되어 있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영적 파산자도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단순히 실수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우리는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런 암울한 심연에 빠지면 악마는 내 속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희망이 없구나. 이 불쌍한 인생은 어디에서도 도움을 얻을 수 없다. 벌레보다 못한 나는 이제 아무런 희망도 없는 거야.” 
“그래 너 언제까지 이런 삶을 살고 있을 거니? 너무 힘들지 않니? 이제 그만 끝내버리자.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니?”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의 문제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 나와 함께 다시 시작하자.” 

악마는 조그마한 영적 결함에도 세상이 끝난 듯이 말하고, 작은 문제만 생겨도 큰 일이 벌어진 것처럼 야단법석이지만 주님은 큰 재난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로 바꾸어놓으십니다. 이 악마를 내쫓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욥이 그토록 고난을 당할 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절망입니다. 앞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오죽하면 그토록 입술로 범죄 하지 아니하던 욥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따져보고 싶다고까지 하였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따끔하면서도 확실하게 욥이 무엇을 착각하고 오해하고 있는지를 지적하시고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레의 하나님, 나를 위해서 준비하시는 하나님, 목자가 되신 하나님, 나의 모든 필요를 따라 채우시는 하나님 라파의 하나님, 건강을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 닛시의 하나님, 우리로 마지막 승리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 모든 싸움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지키시며 이끌어 승리케 하시는 닛시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뜻하시면 못 하실 일이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언제든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신 말씀대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결국 우리에게 영생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흔들어도 우리가 믿음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요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들에게 기도의 특권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염려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낙심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답답함을 아뢰십시오. 아니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데 임마누엘 하나님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어찌 구석방에 처박아 논 짐짝마냥 아니면 꿔다 놓은 보리마냥 그렇게 여기십니까? 주님은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사정을 말씀드리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주님께 나아가기를 주님이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마음도 아시고 우리의 형편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거절치 아니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고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다고 했으며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을 줄을 또한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마침내 최후 승리를 얻게 될 것이요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역사를 얻게 될 것인데 누가 이런 승리를 얻느냐 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요 하나님께 주의 뜻대로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으며 이렇게 주의 듯대로 무엇을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늦은 시간, 남자는 피곤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아홉 살 난 아들이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안에서 기다리지 않구.”
“아빠,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 궁금한 게 뭔데?” 
“아빠는 한 시간에 돈을 얼마나 버시나요?”
남자가 짜증난 말투로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그건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냐. 왜 그런 걸 물어 보는 거냐?” 
아이가 대답합니다. 
“그냥, 알고 싶어서요. 말해 주세요. 한 시간에 얼마를 버시나요?”
“네가 정 알아야겠다면 … 한 시간에 만원이다.” 
“아아 ….” 
아이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다시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묻습니다. 

“아빠, 저에게 오천 원만 빌려 주실 수 있나요?” 
아버지는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네가 돈을 빌려 달라는 이유가 고작 멍청한 장난감이나 쓸모없는 것을 사려는 거라면, 당장 네 방에 가서 잠이나 자거라. 나는 매일매일 힘들게 일하고 있고, 그런 것에 낭비할 돈은 없다.”
아이는 말없이 자기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습니다. 남자는 아들의 질문에 대해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돈을 빌리기 위해 감히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좀 가라앉자, 남자는 자신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오천 원으로 꼭 사야만 할 뭔가가 있었던 거겠지 ….’ 게다가 평소에 자주 돈을 달라고 하던 녀석도 아니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남자는 아들의 방으로 가서 문을 열었습니다. 
“자니?” “아니요, 아빠. 아직 안자요.” 
“생각해 봤는데 …. 좀 전엔 내가 좀 심했던 것 같구나. 오늘 힘든 일들이 많아서 네게 화풀이를 했던 것 같다. 자, 여기 네가 달라고 했던 오천 원이다.” 

아이는 벌떡 일어나서 환하게 웃으면서 “고마워요, 아빠!”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는 베개 밑으로 손을 넣더니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아이가 돈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고 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천천히 돈을 세어 보더니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돈이 있었으면서 왜 더 달라고 한 거냐?”
아버지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왜냐면 … 모자랐거든요. 그치만 이젠 됐어요. 아빠, 제게 만원이 있어요. 아빠의 시간을 한 시간만 살게요. 내일은 조금만 일찍 집에 돌아와 주세요. 아빠랑 저녁을 같이 먹고 싶어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애써 외면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세상에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건 우리들과 아픔을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우리들이 아파할 것을 예수님은 대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내가 못 박혀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그 죄는 내가 형벌을 받아야 할 죄였습니다. 

그런데 내 죄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 손과 발에는 못이 박히고 옆구리에 창이 찔린 것은 다 내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토록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토록 주님은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을 혼자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과는 단 한 마디로 말을 섞지도 않고 주님을 바라보지도 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단 한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시선을 응시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과 소곤소곤 마음을 나누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주님이 멀리 계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 계신데 나와 함께 계신데 지금도 나를 바라보고 계신데 나는 왜 먼데만 바라보고 있는 걸까요? 왜 세상만 바라보고 있는 걸까요? 

주님은 멀리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를 다시 찾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지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미웠습니다. 큰 소리 칠 때는 언제고 왜 그토록 쉽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얼떨결에 주님의 무덤도 찾았었고 그래 드디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없으십니다. 

그렇다고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보신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야단이라도 치셨다면 그렇게 마음이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 답답한 마음에 고기나 잡겠다고 나선 길입니다. 그런 마음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기에 나도 나도 하고 따라 나서 고기를 잡느라 시늉을 했지만 그런 그들에게 잡힐 고기는 단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주님이 찾아오셨고 단 한번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졌더니 커다란 물고기가 153 마리나 잡혔습니다. 

주님이신 것을 깨닫고 주님 앞으로 헤엄쳐 나온 베드로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한 마디로 너 나 사랑하는 것 맞냐 하는 말씀입니다. 비록 죽을죄를 지었어도 말은 바른 말이지 그건 당연한 질문이 아닙니까? 그래 그렇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나는 너를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그분은 우리를 책망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좌절에 빠뜨리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요 우리로 하여금 새 힘을 내도록 오신 분이시오 우리로 하여금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시오 우리가 구하는 그것을 또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을 우리는 바라보아야 하고 그 주님 앞에 우리 마음을 열고 아뢰며 구하여야 할 것이요 주님을 보듯 서로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더욱 우리는 되도록 상대편의 장점을 많이 보고 단점은 덮어주는 아량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함께 서로 조화를 이루며 나눔의 삶이 될 때 우리가 함께 하는 사회, 교회, 가정은 사랑과 행복의 꽃향기로 그윽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 값으로 거듭난 예수님짜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 값으로 우리를 성도라고 칭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서로를 가장 귀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서로 챙겨주고 돌보며 책망하기보다는 위로하고 격려함으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저희들이 되기를 소망하고 그렇게 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주님의 양을 치듯 주님의 양을 돌보듯 그렇게 사랑과 돌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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