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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기 (행 2: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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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기 (행 2:17-18)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 사탄으로부터의 시험에 승리하시고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이끌려 금식하실 때도 그랬지만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사역을 하실 때 처음으로 펼치신 말씀이 6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말씀이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의 영이 임하는 곳에는 가난한 자가 자유하게 될 것이다.  포로 된 자가 자유하게 될 것이다.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눌린 자가 자유하게 될 것이다.  생명이 감격과 환희가 없는 사람 속에 자유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신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해방 운동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어떤 지식 운동이 아닙니다.  신앙은 어떤 종교 운동도 아닙니다.  더구나 신앙은 교파 운동도 아닙니다.  신앙은 엄밀한 의미에서 무슨 성경운동도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에서만 머물러 있다면 그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오늘 나에게 선포되고 들려지는 말씀이 될 때 그 말씀이 바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영적 해방운동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어둠의 세력에 포로된 자는 오늘 성령의 능력으로 자유함을 누리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비밀한 일들을 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죄에 억눌리고, 상처에 억눌린 모든 사람은 성령의 치유하심으로 자유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생명체는 그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살수 없습니다.  혼자의 힘은 무수한 속박과 구속과 환난의 연속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의 것을 받으면 살아납니다.  대지가 그렇게 타는 듯이 더워서 다 갈라지고 다 죽어 가지만 하늘의 것이 내리면 살아납니다.

금년 이 한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믿음으로 사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십시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붙드십시오.  내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으로 하늘의 것을 한 점만이라도 붙들면 살아날 것입니다.  그렇게 낙심하고, 그렇게 어려움 가운데 있었어도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날이 가면 갈수록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사람은 할 수 없되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걱정되십니까?  염려가 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래도 걱정되십니까?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떠나시면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을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고 거칠어도, 그 길이 아무리 캄캄하고 고달파도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보십시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은 지치고 낙심하고 배신자의 반열에서 아무 기대도 없고, 삶의 소망을 잃어버렸던 실패자의 집단이었습니다.  절망과 불안과 염려와 분열로 상처받은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신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는 분명히 붙잡았습니다.  그들은 그 절망의 순간에도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삶의 자리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을 붙잡는 자, 그는 다시 소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믿고 붙잡는 자, 그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 영광의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비록 주님을 배신하고, 그래서 낙심하고 절망했지만 그들은 뭔지는 모르지만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기까지는 이 성을 떠나지 말라는 그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졌던 그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계사년 이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여야 됩니다.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모이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여서 함께 하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특별히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왠지 혼자가 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탄의 전략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안타까우셔서 돕는 자로서 하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허락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교회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서 갇힌 인생이 아니라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서 함께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된 우리는 모이기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여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절망과 낙심과 불안과 염려 속에서 모였던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저들은 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120여명의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고도 전무후무한 새로운 사건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한 번의 성령의 사건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3천명, 5천명을 주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날이 갈수록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는 역사의 주역들로 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들의 답답함을 한 번에 바꾼 성령의 사건이 오늘 하나님을 믿는 이 자리에 온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동일한 사건이 이 자리에,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난다고 하면 저는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황무한 땅은 축복의 땅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주여!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물 붓듯이 부어 주시옵소서.  비둘기 같이 임하시옵소서.  바람같이 임하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시대가 정말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이 시대가 종말이라고 한다면 모든 교회와 모든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성령의 충만을 외쳐야 합니다.  이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이것만이 더 많은 생명이 살아나는 길입니다.  이것만이 이 땅 위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더욱 강력하게 증거하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2절 말씀에 보면,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것이 확!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늘 문이 열리면서 바람이 이리 치고 저리 치는데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낙심과 좌절과 실패와 불안에 죽고 싶었던 저들 위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저들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니까 생기를 얻었습니다.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뛰어서 골목골목을 다닐 때 저들의 그림자만 닿아도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사모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정말로 꿈꾸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탐내야 할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종교를  탐내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에 취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를 보기 전에 저들의 삶에는 아무런 의욕도 없었습니다.  저들의 마음에는 불안과 낙심뿐이었습니다.  기쁨도 감격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이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저들 속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크고 놀라운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도 제자들이 누렸던 그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무엇보다 시간마다 때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사모하십시오.  더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절대적으로 사모하십시오.  말세에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는 예언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는 환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는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충만은 논쟁의 주제가 아니라 축복의 주제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는 성령의 충만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것이 무슨 성령의 충만이냐?  그것이 무슨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는 것이냐?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충만은 논쟁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은 우리 기독교에서 최고의 축복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우리 모두가 성령의 눈이 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에 대한 감화와 감동의 세계를 깨달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600여년 전 이스라엘 민족은 짐승처럼 줄줄이 잡혀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벨론의 그발강가에 정신병동에 갇힌 것처럼 갇혀서 포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아무런 용기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낙심 밖에 무슨 길이 없었습니다.  저들에게는 아침에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절망과 한 숨 밖에는 없었습니다.  저들이 그렇게 눈물과 한숨으로 지낼 때 젊은 청년 에스겔이라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현실의 절망적인 환경을 보면서 탄식하고 있을 때 에스겔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여전히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영이 그를 어디론가 데리고 갑니다.  보니까 골짜기마다 마른 뼈들로 가득합니다.  골짜기마다 마른 뼈들로 가득했다는 것은 그 골짜기에 소망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낙심과 절망으로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아!  예언을 해라!"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경제 소식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세계 경제나 우리 나라 경제를 들여다보면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이 땅의 경제가 정말 살아날까?  내 남편의 직장이 정말 살아날까?  내 가정이 살아날까?  그러나 여러분, 그때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당시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 정신병동 같은 그발강가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귀가 열렸던 믿음의 사람 에스겔은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에스겔아! 예언을 해라!"
"하나님, 뭐라고 예언을 할까요?"
"생기야 임해라!  생기가 임해서 사망을 당한 이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살게 해라!"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신앙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신앙은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손 을 들고 하나님 앞에서 그 골짜기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생기야 임해라! 생령야 들어가라!"  그랬더니 죽었던 뼈들이 턱턱 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저들이 일어나 군대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둘로 나누어졌던 나라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에 보이는 현상만 바라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이니까?  믿음이란 보이는 현상 너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분열되었던 마음들이 다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강한 하나님의 군대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에스겔 골짜기에서 성령의 생기의 역사가 오늘 우리들 머리 머리마다 감싸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금년 이 한 해를 주의 성령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들 주위에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한 번도 신령한 영적 체험을 해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인 권능, 절대적인 능력에 사로잡히지 못하고 그냥 남이 믿으니까 믿고, 남이 하니까 하는 훈련된 신앙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바른 신앙은 훈련된 의지나 훈련된 지식이 아닙니다.  훈련된 사상도 아닙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그렇게 자기 훈련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까?  천만의 말입니다.  솔직히 내 아내도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내 자식들도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생포되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권능에 사로잡히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논쟁의 주제가 아니라 축복의 주제입니다.  논쟁가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올 때의 발길이 갈 때의 발길과 달라져야 됩니다.  올 때의 눈빛과 갈 때의 눈빛과 달라져야 됩니다.  올 때의 심령과 갈 때의 심령이 달라져야 됩니다.  올 때의 모습과 갈 때의 모습이 달라져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야 됩니다.  이런 은혜와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마지막 종말의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때마다 시간마다 하나님의 절대 능력에 사로잡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에 사로잡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눈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에 대한 눈이 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는 건강한 어린아이가 되십시오.  건강한 어린아이는 부모 앞에서 부모가 하는 대로 웃고, 울고, 자연적인 자기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병든 아이는 절대로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 자기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우십시오.  웃으십시오.  성령의 감화와 감동에 민감하십시오.  이것이 영적인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고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제일 무서운 질병이 무엇이냐?  영적 질병입니다.  영적 질병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베소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에베소 질병은 첫 사랑과 첫 은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부가 사는데 첫 사랑과 첫 은혜는 다 끝났습니다.  그저 법률 조문 때문에, 남의 눈치와 부끄러움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듭니까?  얼마나 불편합니까?  그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첫 사랑과 첫 은혜를 잃어버리고 그저 습관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신앙생활이 힘들겠습니까?  그러므로 첫 사랑과 첫 은혜를 회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받았던 첫 사랑과 첫 은혜를 잃어버리면 그것이 바로 영적 질병입니다.

두 번째는, 버가모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빠진 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적당히 짓고 그만 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만 짓고 그만두어야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만 짓고 그만 두지.  아닙니다.  절대로 적당히 짓고 물러날 수 없는 것이 죄입니다.  이 버가모 병이란 것이 무엇이냐?  세상과 정욕과 육신의 쾌락을 좇아서 우상숭배와 행음과 철학의 교언에 좇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잡히면 내 영이 힘듭니다.  거기에 잡히면 내 영이 죽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 빠지면 안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살수는 없지만 그러나 세상에 빠지면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며 이끌어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두아디라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두아디라 질병은 그의 삶에 감화와 감동이 없습니다.  재미도 기쁨도 감사도 없습니다.  전혀 입에 감사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하십니까?  얼마나 감사한 생활을 하고 살아갑니까?  감사할 것이 없습니까?  저를 보십시오.  무릎이 구부러진다는 사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아십니까?  저처럼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으면 넘어졌을 때 바로 다리가 부러집니다.  생활 속에서 감사를 찾아보십시오.  감사가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넉넉한 사람입니다.  감사를 회복하십시오.  감화와 감동이 체질이 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주 앞에 감사의 예물을 드릴 줄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감사해서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 그 마음에는 더 감사함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질병은 라오디게아 질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서 그냥 미지근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차든지 덥든지 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토해 내리라."  하나님이 불어 버리고 토해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불면 어떻게 당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토하면 어떻게 당할 것입니까?  영적 교만입니다.  세상의 자랑에 푹 빠진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심령에서 촛대를 옮겨 놓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떠나고 능력이 떠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가 떠나면 다 끝난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아프리카 사막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메마른 땅, 황량한 들판, 그 막막한 사막에는 식물이 살지를 못합니다.  타 들어가는 대지 위에 시들어 가는 식물은 확실히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렇지만 그 황량한 벌판 사막 한 가운데 비가 내리면 잎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자연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황량한 사막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심령이 아무리 황량하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권태롭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타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시들한 인생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심령에 하나님의 생기의 바람만 들어가면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의 샘이 솟아날 줄을 믿습니다.  이것만은 꼭 기억하십시오.  어떤 좌절의 늪에 있다고 할지라도, 어떤 낙담과 고난과 고통과 실패의 늪에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생기의 바람만 불면 살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비만 내리면 어느 가정이든, 어느 자손이든, 어느 생명이든 생기의 우물물이 터지게 될 것입니다.

금년 우리교회의 표어로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기!"로 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 교회와 성도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님의 역사를 지극히 제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판단을 앞세워서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시대는 경험되지 않는 것을 거부하는 시대입니다.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적인 신령한 문제를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유한한 인간이 결코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와 역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가 되어서 살아가십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주의 이름으로 몇 가지를 권면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성령의 능력을 소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대 성령의 능력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는 성령의 능력을 훼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성령이 하는 일이야?  점잖게 예수  잘 믿으면 되고, 점잖게 교회를 잘 다니면 되지.  그것이 무슨 성령이냐?"고 성령의 능력을 훼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세 번째는,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라는 말은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어느 순간 내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그렇다면 거역하지 말고 즉각적으로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더 크신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 공부를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감입니다.  영감이 없는 지식 공부는 종교인을 만듭니다.  더 굳어진 인간을 만듭니다.  더 경직된 인간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되지 않는 하나님의 지식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에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하늘이 주시는 힘입니다.  가장 큰 소리는 내면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가장 큰 재산은 내면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된 영감에 취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에 취하여 영감을 따르십시오.  다시금 첫 사랑과 첫 은혜를 회복하십시오.  다시 하나님의 영에 취하십시오.  다시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되어서 오열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성별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이 한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도전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에 취해 생명의 미래에 도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과 우리들의 신앙의 소문과 영향력이 많은 사람들 속에 파도같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섬기는 우리 교회에 성령의 강 같은 평화가 넘쳐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세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소멸하지 말라.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라.  무엇보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음으로써 성령의 역사가 경험되고 증거 되는 우리들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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