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이요 생명 되신 주님 (요 11:17-27)

첨부 1


부활이요 생명 되신 주님 (요 11:17-27)


얼마 전에 나와 함께 신나게 떠들고 놀던 누군가가 갑자기 유명을 달리할 때 마음이 이상하다 못해 정말로 뭔가 표현하기 어려운 심경, 다들 경험이 있죠?
1997년 외환위기로 웃음을 잃은 대한민국에 신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원조 ‘힐링 전도사’, ‘신바람 박사’ 황수관 연세대 외래교수가 30일 오후 1시 별세했습니다. 향년 67세. 
황수관 박사는 해방동이로 1945년 8월 30일에 일본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집안이 가난했던 그는 중학교에 다닐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비를 벌기 위해 1년 동안 산에서 나무를 해 적으나마 학비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다가 포항에 가면 공짜로 공부를 가르쳐 주는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래 소년은 5시간 동안 뛰고 걷고 하며 물어물어 학교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만난 여선생님은 그 먼 곳에서 어떻게 매일같이 학교를 통학할 수 있겠느냐고 하며 사정은 딱하나 안 되겠다고 거절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자 아이는 그 자리에 엎드려 통곡을 합니다. 그런 아이를 안타까운 마음에 감싸 안던 여선생은 아이의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보고 그만 감동하여 그 자리에서 학교 입학을 허가합니다. 그렇게 그는 공짜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이유로 4시간 거리의 영일 중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중학교 시절 그는 이렇게 매일 새벽 4시에 책 보따리를 동여매고 집에서 나와 학교까지 오가며 공부를 합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 후에도 고등학교 입학금이 없어 가까운 안강농고에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966년 그는 대구교육대를 졸업하고 1979년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지냈습니다. 이후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서 문학 학사, 경북대 교육대학원에서 체육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의학에 뜻을 품고 안정적인 초등학교 교사직을 버리고 의과대학 청강생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는 아이가 셋이었습니다. 교수들은 의대생도 아닌데 청강한다고 수모를 주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청강생이다 보니 중간고사를 보는데 했고, 어떤 교수는 시험지를 안 줬다고 합니다. 

그래 그는 뻔뻔스럽게도 앞으로 나가 “교수님 저도 어제 밤에 밤을 새워서 공부했으니까 시험지 주십쇼.” 하니까 던지다시피 줬다고 합니다. 그래 그는 울면서 답안지를 써서 제출했더니 다음 시간 교수가 교실에 들어오더니 자기 시험 답안지를 들고 “야 이놈들아 청강생 시험지가 모범답안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0여 년 동안의 경북대 의대 연구원 과정을 거쳐 국민대 대학원에서 생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황박사는 연세대 의대 교수 공개 채용에 지원해 연세대 출신도 아니요 의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과 교수를 선택되어 지금까지 교수로 봉직했습니다. 
그는 교수로 채용해준 교수님들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정식으로 의대를 나오지도 않은 저를 청강생인 저를 뭐를 봤는지 교수로 임용해줬다며 연세대학교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은혜를 갚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가 세인들의 관심을 받은 건 1997년 SBS 예능 프로그램 ‘호기심 천국’에 출연하면서부터입니다. 외환위기 직후 고단한 삶에 지쳐 있던 국민들은 그의 신바람 강연에 열광했습니다. 황수관 박사는 가난 속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삶의 비결을 황수관만의 특유 입담으로 재치 있게 풀어내어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의 저서 ‘황수관 박사의 신바람 건강법’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황수관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길지 않은 삶을 마치고 하늘로 떠나며 남긴 건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와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해맑은 미소에 대한 기억, 그리고 이름 석 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사회 곳곳에 만연한 특권의식을 버리고 가장 중요한 인생의 가치로 삼았던 ‘작은 원칙’을 몸소 보여주고 떠났습니다. 

빈소는 고인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마지막 장소입니다. 이날 오후 6시께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지하 2층 특 1호실 빈소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조화를 필두로 주요부처 장관, 국회의원 등 한국사회의 명사들이 보낸 조화들이 도열했습니다. 조화들만 봐도 그는 한국사회의 특권층이자 오피니언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난 12일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에 들러 중환자실로 옮겨지기까지 보여준 행동은 한국사회에서 슬며시 잊혀져가는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줬습니다. 진료를 받기 하루 전인 11일 감기몸살 증세를 보인 고인은 다음날 오전 10시에 병원을 찾아 입원했습니다. 

그를 알아본 의료진이 ‘급행’ 진료를 제안했지만 평소의 밝은 표정으로 고사하고 일반 환자들과 똑같이 대기 순서를 기다렸다고 유족 측은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고인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5시간에 걸쳐 병실에서 검사를 받던 그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의료진은 오후 3시 넘어서 중환자실로 황 박사를 옮겼습니다. 간 농염(간에 고름이 생기는 증세)과 급성 패혈증이 진행된 게 확인된 황 박사는 중환자실에서 수면상태로 치료를 받았지만, 급성 패혈증이 여러 장기에 영향을 미쳐 손쓸 수 없는 상태로 악화돼 끝내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고인의 친동생 황수철 씨(56)는 “평소 정기검진을 받을 때도 ‘진료순서에 차별을 둬선 안 된다’며 새치기 진료를 끔찍이 싫어하셨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누구보다도 건강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도 죽음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우리는 어쩔 줄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마르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라면 신앙입니다.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의 저서 ‘승리하는 신앙’에 이런 예화가 실려 있습니다. 
한 랍비가 어느 유대인에게 물었습니다. 
“길에서 돈이 많이 들어 있는 지갑을 주웠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 유대인은 대답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 드려서 제게는 아이가 많이 딸려 있고 게다가 몹시 가난합니다. 저는 그 돈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알겠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그대는 도둑”이라고 말했습니다. 
랍비가 같은 질문을 다른 유대인에게 던지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즉시 지갑 임자를 찾아 돌려주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랍비는 말했습니다. 
“그대는 바보로군.”
랍비는 세 번째 유대인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는 그 돈을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제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 그 지갑을 제가 어떻게 처리할지 제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습니다.” 
랍비는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대의 대답이 옳도다.”
가정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 했더라면 무엇 했을 걸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랍비가 물어본 말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만일 돈이 많은 지갑을 주웠다면 이라는 말 자체가 가정법입니다. 현실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돈이 생긴 것도 아니고 지갑을 주은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처럼 애매한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와 보니 이미 나사로를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은 죽은 당일에 장사를 지내니까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면서 그런 말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이라고 하는 말은 단지 아쉬움에 하는 소리일 뿐이지 이미 주께서는 여기 계시지 않았고 나사로 역시, 벌써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말은 안타까움에 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안타까워하며 과거를 돌아보아도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이미 끝난 일입니다. 과거는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미래는 오늘로 다가올 수 있어도 과거는 오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하고 아쉬워해도 그런다고 해서 모든 것이 없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하지는 마십시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라면 또는 그럴 걸 하고 탄식을 한다는 것은 오늘에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만스러워 한다고 해도 과거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가 불만스럽다면 오늘에 최선을 다해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이야 과거가 뒷받침이 되지 못했다고 해도 오늘부터 내일을 위해 갖추고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필요를 따라 나를 사용하실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오늘까지 있었던 날들에 대해서도 재평가를 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앞에서 보았던 황수관 박사의 어려웠던 어린 시절 눈물어린 청강생 시절이 있었기에 오히려 그가 더 존경받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나는 이래서 안 된다고 탄식만 하고 있었더라면 그의 길이 그토록 열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독실한 신앙인으로 평생을 살았던 그는 한때 “나도 장로가 되고 싶어요”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귀한 직분을 허락받는다고 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다고 그는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하나님과 교회와 주의 사자를 섬긴다고 고백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준비된 자를 쓰시며 또 쓰시기 위해서 준비시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오히려 저를 가장 낮은 노예의 자리까지 낮추셨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감옥의 죄수로까지 내리셨습니다. 한데 바로 거기가 일국을 다스릴 수 있는 훈련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의 신앙으로 머물러 서서 탄식만 하는 자가 아니라 앞을 내다보고 주님과 함께 날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처음부터 접근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잘못되었습니다.
보세요.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니까 마르다의 믿음은 예수님이 여기 오셔야만 됐다는 것입니다. 오셨으면 죽지 않았고 고침을 받았을 텐데 주님이 미처 오시지 않았으니 저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일종의 원망도 됩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뭐라고 합니다. 자기 중풍 병으로 누운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고쳐달라고 하면서 하지만 “내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내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만 하시지요. 그러면 낫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수께 사람들을 보내어 요청할 때 “말씀만 해주세요. 오시지는 않더라도 말씀만으로도 나사로가 나을 것입니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였더라면 나사로는 그 시간 고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 지금 만일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하면서 예수님께 원망처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임마누엘 신앙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나사로야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아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어서 우리 안에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까 만일의 신앙이 아닌 확신 있는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주께 간구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아는 신앙입니다.
이제 마르다가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전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해도 이제부터는 주께서 원하시고 주께서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무엇이라도 주실 것임을 안다고 마르다가 고백을 합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도 살리셨던 주께서 나사로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하나님께 구하시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입을 열어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주실 줄 안다고는 하는데 그렇다면 당당하게 주님 살려달라고 구해 주십시오 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눈치만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는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것은 아는 것이지 확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고백하지를 못합니다.
주님이 그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해서 주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으면 그냥 아멘 하면 되지 여기 마리아가 하는 말을 보십시오. 뭐라고 합니까?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아니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는데 거기에 대고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는 건 또 무슨 경우입니까?

이게 우리네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구하기는 하는데 하나님 제 마음을 아시지요 아시지요 하는데 예수님이 “그래 내가 네 마음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너 그거 받을만한 믿음은 있는 거니?”라고 주님이 물으시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이게 바로 지식적인 믿음입니다. 알기는 다 알아요 그런데 믿지는 못해요. 아미 마지막 날 부활 때 다시 살아날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마르다의 마음도 알고 그래서 나사로가 살아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녀의 마음의 바람대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으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아멘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는 말이 바로 아멘입니다.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는 고백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많은 약속을 주셨어도 믿지 않으면 그 약속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마 10:40~42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은 각각의 직분에 따른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선지자를 선지자로 영접하라고 합니다. 

그에 합당한 대접을 하라고 합니다. 그건 의인도 마찬가지고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배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다섯을 남긴 사람에게는 열 달란트요 열 고을의 권세가 주어지고 둘을 가지고 둘을 남긴 자에게는 더하여 네 달란트가 주어지고 네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맡은 자의 상급입니다. 물론 직분에 따른 권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의 책임도 따릅니다. 

하지만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하여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머리로는 아는데 내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자꾸만 힘들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정말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을 공급받으면 얼마나 힘이 나고 신이 나고 그냥 넘어졌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알고만 있어서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써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출31:2~6은 말씀합니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또 출 36:1~2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라고 하십니다.
모든 직분자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시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모든 성도들 역시 그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만을 믿고 주님께 아뢰며 부르짖어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믿는 믿음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정곡을 찌르십니다. 마르다의 말을 마르다의 믿음을 바로 잡아 줍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지막 부활 때의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그런 일이 있느냐 하면 나를 믿는 자 즉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여기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믿는다는 말을 우리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니까 한번 믿기만 하면 그냥 그것으로 다 된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물론 믿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에 다른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무엇이 믿음이냐 하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러니까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야 하는데 여기 믿는 것과 시인하는 것이 단 1회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현재 동사는 언제든지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계속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우리가 한번 믿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믿어야 하고 반복적으로 믿어야 하며 습관적으로 믿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가 항상 계속해서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 6:4~6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서도 다시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무엇이냐 하면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믿음의 고백을 하며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나며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요일 3:23~24은 말씀합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누가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살아갑니까? 서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한번 사랑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까지 이르도록 계속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면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고백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요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진흙탕 같은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그것도 베들레헴 산골의 외양간 구유가 그분의 첫 자리였습니다. 그분은 마지막 자기의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부활할 것은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고 이미 주님을 믿고 있는 사람은 이 영원한 삶을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죽음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죽음은 오히려 새 출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새 출발 하나님과 영원히 하나님이 허락하신 천국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 삶을 오늘 우리가 누려야 합니다. 이 땅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썩어지는 육신에 매이는 자가 아니라 나중에 용광로 속에서 녹아내리는 쇳덩이처럼 녹아질 세상에 미련을 두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삶을 항상 마음에 그리고 날마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으며 우리의 입을 열어 그 주님 앞에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며 실천하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무리 마음이 인색한 사람이라도 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축하의 전화 한 통이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부터 새 생명의 출생은 모든 인류 가족 경사의 대명사였습니다. 이런 축복 속에 태어나는 그 생명이 출생 시부터 죽음의 그늘에 덮여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참혹한 일일까요?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행진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역사 이래로 사람들의 소원은 죽음을 이겨보는 것, 즉 불사(不死)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불사에 관한 신화를 만들거나, 있지도 않은 불로초를 찾아 떠나는 정도였습니다. 현재까지도 인류 최대의 숙제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저주가 풀리는 아침이 열렸습니다. 바로 인류의 죄를 걸머지시고 무덤에 들어가셨던 예수께서 부활하신 아침입니다. 이 부활은 예수 자신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소망, 즉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열 번째, 백 번째 그 이상의 열매들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아마추어 사진사가 암실에서 작업하는 것을 지켜 본 적이 있습니다. 암실에서 처음 보는 네거티브 필름은 퀭한 음화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질산은 용액에 담겨진 후에는 살아있는 사진, 즉 양화로 서서히 바뀌었습니다. 마치 생명이 돌아오는 듯한 변화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의 인간의 모습은 네거티브 필름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만일에 이 부활이 없다면,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거짓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빈 무덤, 이 모든 것은 너무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혹시 이런 장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달려오는 왕의 전령, “사형 중지!” 이 소리만큼 감격스러운 것이 있을까요?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 이 소리는 그것 이상으로 놀라운 소식입니다. 죽음을 심어 영생을 거두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할렐루야!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다시 일어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아니 그것은 곧 십자가에 죽게 될 예수님 자신이 다시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만일의 신앙이 아니라 지나간 날을 뒤돌아보며 한숨짓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또한 단지 머리로만 믿고 머리로만 아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죽음도 이기는 부활이요 생명 되신 주님과 함께 하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