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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그리스도인, 작인이들의 벗 (레 19: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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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작인이들의 벗 (레 19:17-18)

어르신들이 가지는 네 가지 고통(四苦)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빈고(貧苦)입니다. 나이가 들면 돈이 없어 고생합니다. 두 번째는 고독고(孤獨苦)입니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없어지고 외로움의 고통이 심해집니다. 세 번째는 무위고(無爲苦)입니다. 할 일이 없어져서 고통이 따릅니다. 네 번째는 병고(病苦)입니다. 나이가 들면 몸이 쇠약해지고 병이 많아져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친구가 없어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이지만 어르신들에게는 큰 고통입니다.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장수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친구 수라고 합니다. 친구 수가 많은 사람이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접하는 다접(多接)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합니다. 만나는 친구가 많아야 오래 살고 건강합니다. “만일 당신의 가치를 계산하고 싶다면 당신의 친구들을 세어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 수는 행복의 요인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진정한 친구를 ‘아킵’(akib)이라 불렀습니다. 이 말은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도 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친구는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친구와 행운이란 말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가슴 깊은 곳에 들일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것은 인생의 행운입니다. 
  
친구를 가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동시에 친구가 되어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5:15에서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하십니다. 내가 나보다 형편없는 사람을 친구라고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아무리 봐도 친구할 만하지 못한 형편없는 나를 친구라 하시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14에는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친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친구라고 할 용기를 가집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을 친구라고 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이 나를 친구라고 하니 내가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이 친구라고 하신 작은이의 친구가 될 수 있고, 친구가 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34에는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귀신들린 자, 과부, 고아 그리고 죄인이라고 멸시하던 세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친구가 되셨다면 우리도 그들의 친구가 돼야 합니다. 
  
작은이가 누구입니까?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멀리 생각할  것 없이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보면 작은이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이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작은이니까 그렇습니다. 
  
“친구는 가장 좋은 보약이다. 건실한 우정은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작은이의 가장 좋은 보약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작은이의 친구가 되어 생명을 공급하고 연장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1:11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친구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친구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십니다. 이런 예수님 마음으로 작은이를 벗으로 삼읍시다. 작은이의 벗이 되어 예수님께 대하여 선행을 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작은이의 벗이 되어 예수님의 벗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 주위에는 벗이 되어야 할 작은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태복음 25:37-39에는 “주리신 것, 목마르신 것, 나그네 되신 것, 헐벗으신 것, 병드신 것, 옥에 갇히신 것”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이런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작은이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여러 곳에는 “작은 자 중의 하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작은이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관심,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작은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잃은 양의 비유에는 한 마리 양에 대한 관심이 아흔아홉 마리에 대한 관심보다 보다 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한 마리가 작은이이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큰 아들보다 둘째 아들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둘째 아들은 잃었다가 얻었으며,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잘 순종한 큰 아들보다 둘째 아들이 작은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최근 세계적으로 ‘부익부빈익빈’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 중 가장 부유한 1%인 6천만 명의 재산은 가장 가난한 60%인 35억 명의 재산보다 더 많습니다. 가장 부유한 20%의 인구는 가장 가난한 20%의 인구의 약 135배나 부유합니다. 우리의 지구는 큰 자보다 작은이가 급증하는 세계입니다. 
  
2011년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에 추정되는 장애인의 수는 약 268만 명입니다. 인구 1만 명 당 561명입니다. 전 인구의 5.6%가 장애인입니다. 우리나라 인구 19명 중의 한 사람은 장애인입니다. 지난해 선천성 기형아의 발생률이 3%에 육박했으며, 발생률은 다운증후군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우리 주의의 장애인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 작은이들이 이렇게 많은 것입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의 심리학자 지오프리 레오나르델리 박사팀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외로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추위를 더 느끼고 이를 보상받기 위해 방의 온도를 높이거나 따뜻한 음식을 먹으려 하는 경향이 높다고 하였습니다. 작은이는 늘 춥고, 배고프고, 외롭습니다. 군대에서도 졸병은 왜 그리 자도 졸리고 먹어도 배고픈지 모르겠습니다. 작은이들은 항상 그런가 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에게 기적으로 먹이신 것은 그들은 한 끼 식사가 궁하고 절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병든 자들에게는 “일어나라, 걸어가라, 나으라”고 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자들에게는 귀신에게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에게는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달라고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작은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 정신의학자인 칼 메닝거가 강의 중 어느 청중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으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집밖으로 나가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내서 도와주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극복하고, 신앙을 성장시키고, 본질을 회복하는 최선의 방법 중의 하나는 자기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나의 도움을 기다리는 작은이를 섬기는 것은 가장 좋은 길입니다. 
  
최근 미국의 총기사건은 심각한 상황에까지 온 것 같습니다. 급우들과 교내 청원 경찰들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 초등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무작위로 발사하여 죽이고, 쇼핑센터에서 총을 쏘고, 집에 불을 질러놓고 불을 끄러 온 소방관 두 사람을 쏘아 죽였습니다. 총을 쏜 원인은 대부분 친구들의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면 성장과정에서 비뚤어진 자아가 형성된 경우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우리가 나서서 벗이 되어 주어야 할 작은이들입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정이 모든 사랑 중에 으뜸이라고 합니다. 배우자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우정보다 더 큰 사랑도 더 진정한 사랑도 없습니다. 부부의 사랑도 친구의 사랑이 되어야 진정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잠언 27:17에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작은이들의 벗이 되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작은이의 벗이 됩시다. 우리가 작은이의 벗이 되어 그들의 얼굴을 빛나게 합시다. 작은이는 하늘에서 큰 자입니다. 세상에서 작은이들이 세상에서도 큰 자 될 수 있게 우리가 그들의 벗이 됩시다. 

  
둘째, 작은이의 벗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벗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0에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이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소외 되고, 궁핍하며, 고통 받고 살아가는 작은이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강한 연대성을 표현하십니다. ‘내게’라는 헬라어 ‘에모이’는 개인적 관심과 배려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작은이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시려는 뜻이 실현된 것을 말합니다. 
  
친한 친구를 욕하면 내가 화가 납니다. 친구가 어려움에 처하면 친구를 변호합니다. 이성을 사귀는 방법도 이전과 요즘은 너무 다릅니다. 요즘은 직접 문자도 보내고 전화도 하지만 오래 전에 제가 학생 때는 친구를 대신해서 애인에게 쪽지를 전달해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쪽지를 전해주다가 친구의 애인이 내 애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친구를 대신해서 죽어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 우리나라에는 양반의 아들이 잘못을 하게 되면 대신 그 집의 종이 곤장을 맞기도 했습니다. 또 지체 높은 양반이 잘못을 하게 되면 천민이 돈을 받고 곤장을 대신 맞아주다가 죽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은 신분제도의 폐단입니다. 
  
옛날 프랑스의 징병제도에는 친구를 대신하여 군대에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친구는 자신의 친구를 위해 대신 군대에 갔다가 전투에 투입되어 죽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시 징집을 받았을 때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하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다시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 친구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친구 되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작은이의 벗이며, 작은이의 대변자이셨으며, 작은이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작은이를 괴롭히면 가만히 계시지 않으십니다. 출애굽기 22:22-23에는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언제나 약자 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작은이들의 신음소리를 귀담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래 전 제가 대학교 재학시절에 수녀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녀원은 일반인은 자유롭게 왕래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제 친구의 큰 고모가 수녀원장이기 때문에 특별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친구는 들어가서 수녀원장에게 “고모, 제 친구예요”라고 한 마디만 하니 무사통과였습니다. 제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수녀원장 조카의 친구라는 한 가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라는 관계가 엄청나게 중요한 배경이며 힘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라는 한 가지 배경 때문에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작은이들의 벗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하나가 됩니다.  
  
사울과 다윗은 악연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과 다윗은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사울의 군사와 다윗의 군사가 싸울 때에 사울과 요나단이 함께 죽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유모가 그가 다섯 살 때에 안고 도망가다가 떨어트려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친구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극진히 대해 주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극진한 마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삼하 9:11),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삼하 21:7). 다윗은 친구 요나단 때문에 그 아들인 므비모셋에게 아들처럼, 왕자처럼 극진히 대해 주었습니다. 아들 므비모셋을 통해 그의 아버지인 친구 요나단을 도웁니다. 그 아들을 통해 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들에게 극진하게 해 주는 것이 아버지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이를 통해 예수님을 섬깁니다. 작은이를 통해 예수님과의 관계를 유지합니다. 
  
인류학자들의 이론 가운데 ‘마을이론’(Village Theory)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의 머릿속에 하나의 마을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정원이 채워지면 그 이상 마을사람을 늘릴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친구 수를 제한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은 동심원적 사고를 한다고 합니다. 한 가운데 원은 자신이고, 그 다음 원은 가족이고, 그 다음 원은 친척이고, 그 다음 원은 이웃이고, 그 다음 이웃은 동족이고, 원의 바깥은 이방인입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누가 내 친구입니까?” 우리는 이웃과 친구를 더 넓혀야 합니다. 흔히 돈이 떠나면 친구도 떠난다는데 돈이 없어도 친구가 되게 친구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개같이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구의 범위를 훨씬 더 넓히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항상 원수에 대해 좋은 말만 하는 링컨대통령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여 항의하였습니다. “원수는 없애야(죽여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그의 말에 링컨은 웃으면서 “옳습니다. 없애야 하구 말고요.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원수를 없애버리는 걸요”라고 하였습니다. 원수도 친구로 만든다고 하는데 하물며 우리 주위의 작은이들을 친구로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레위기 19:18에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합니다. 작은이를 이웃으로 만드십시오. 작은이를 벗으로 삼으십시오. 작은이를 자신 같이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가 먼저 친구가 되는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친구에게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작은이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15:13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었고,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신 후에 친구인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작은이들을 친구로 삼고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결론 

탈무드에는 “친구를 선택할 때는 한 계단을 올라가고 아내를 선택할 때는 한 계단 내려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이의 벗이 되는 것은 한 단계 내려서야 하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한 단계 올라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작은이의 벗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벗이 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벗이 되려면 한 단계 올라서야 합니다. 
  
친구는 내가 누구인지 깨닫도록 나를 비추어 보게 합니다. 그리고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 기억하게 해 주는 존재입니다. 작은이들의 벗이 되므로 내가 참 그리스도인임을 보일 수 있습니다. 작은이를 통하여 내가 그리스도의 친구임을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봅시다. 
  
본문은 의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과 마음가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작은이들의 벗이 되어 주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 됩시다. 내가 작은이의 벗이 될 때에 그리스도는 나의 벗이 되십니다. 작은이의 벗이 되어 그리스도의 벗으로 사는 한 해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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