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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작은이들의 벗, 희망을 주는 교회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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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이들의 벗, 희망을 주는 교회 (마 25:31-46)
    
영상 한 편을 보시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영혼을 감동시킨 에드워나 오바라”입니다. 

오늘은 2013년 새해 들어 첫 번째 주일, 신년주일이며, 신년성찬주일로 지킵니다. 금년 우리교회의 표어가 “작은이들의 벗, 희망을 주는 교회”라고 정해보았습니다. 

주제 성구는 마25:40의 말씀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이러한 주제를 정하게 된 배경은 본 교회가 속한 교단의 제97회기 총회의 주제가 “그리스도인, 작은이들의 벗”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우리 교단 장로교회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목회사역에 힘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총회의 주제를 따라서 “작은이들의 벗, 희망을 주는 교회”라고 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작은이들의 벗으로만 머물지 말고, 우리 교회가 사회에 희망을 주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려고 합니다. 우리교회는 총회의 주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작은이들의 벗으로 머물지 말고, 희망을 주어야겠습니다. 

우리교회가 작년 3월부터 갈월종합사회복지관을 수탁, 운영하고 있는데, 금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지역사회를 섬기면서,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우리 교회가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복지관은 지역사회로 한 걸음 다가가고, 주민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역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복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한국교회는 양적 성장에 있어 정체되어 있고, 질적으로도 사회적 공신력을 크게 상실하여 총체적인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적어지고, 떠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기쁨이 넘치고, 소망이 있고, 평안이 있고,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자부심이 있어야 하는데, 교회가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지 못하고 참된 평안과 위로를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들이 교회답지 못하고, 교인들이 교인답지 못하고,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자성해야할 때입니다. 

‘한국교회 언론회’가 2012년 1월 초부터 3월 23일까지 중앙일간지(국민, 경향, 동아, 문화, 서울, 조선, 중앙, 한겨레, 한국, 한국경제)의 종교와 관련된 보도를 조사 분석하였는데, 개신교회에 대한 기사는 총 159건이었으며, 그중에 긍정적인 보도는 4.4%, 사실 보도는 32.7%, 반면에 부정적인 보도는 무려 62.9%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부정적인 보도가 20% 정도에 머물고 있었는데, 무려 60%대로 수직상승한 것은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200만 명이라는 교인 수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수는 부풀려진 느낌은 있었지만, 어느 듯 800만 명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 800만 명이라는 수는 기독교 이단의 숫자도 다 들어간 통계입니다. 개신교회의 신도수에는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 신천지 등 기독교이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가톨릭과 불교는 해마다 신장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120년의 역사에서 병원, 고아원, 학교, 초, 중, 고, 대학교를 설립하고 우리 사회에 꿈과 소망을 심어주면서 놀랍게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는 시대요, 추수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우리사회가 경제적 여건이 좋아지면서 교회가 세속주의, 물량주의, 그리고 도덕성이 상실되면서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무슨 말을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지성인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최근에는 대형교회들이 목회자 세습으로 인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며, 대형교회들이 분열을 일삼아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자정능력도 있습니다. 주인이 하나님이시오, 우리 주님의 몸된 교회이기 때문에 반드시 새롭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회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혀 내려 보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 가운데 계시지 않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려고 육신을 입고 낮고 천한 마구간 말구유에 내려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누우셨던 마구간의 말구유가 우리의 예배처소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정말 화려한 예배당에 안락한 시설을 꾸미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안주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낮아질 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예수님을 닮아간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성육신을 본받아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낮아짐과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비우시고 인간의 몸, 죄인의 몸, 죽을 몸을 입고 낮고 천한 마구간 말구유로 오셨으니, 이제 우리 교회와 교인들도 세상으로 나아가 흩어져 살 때에 성육신적인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곳에 가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섬김받거나 존경받으려고 하지 않으시고 가난하고, 억눌리고, 멸시받고, 따돌림을 받고, 목마르고, 병든 자를 위하여 그들의 벗으로 살았습니다. 무리를 보실 때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방황하는 것을 보시면서 민망히 여기시고 긍휼과 사랑으로 보살피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그 핵심가치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공생애를 통하여 가장 심혈을 기울여 양육하시던 12제자들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꿈꿀 때마다 가장 큰 자는 섬기는 자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인격과 그 분의 고결한 성품과 가르침을 우리의 가치관으로, 우리의 영성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12제자 중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까지 모시고 나와서 주님께 부탁하였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던 10명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이런 일이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벌써 몇 번이나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자기의 할 일은 망각하고 누가 더 크냐 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섬겨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질병, 교만병에 빠져 있습니다. 신앙을 다 팔아먹었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는데, 실상은 죽은 자들이 많습니다.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저는 항상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고 살아야 작은 예수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3-45) 이 말씀을 나의 좌우명으로 알고, 나의 가치관으로 삼고, 나의 인생철학이라고 다짐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최후의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본래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으로 모든 천사를 거느리시고 당신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고 모든 민족을 모으고 심판하십니다. 모든 민족을 구별하는데,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십니다. 양들은 그 오른편에 두시고 염소는 왼편에 두시는 것처럼... 오른편에는 구원받을 사람들과 왼편에는 멸망에 던질 사람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주님이 오른편 사람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의인들은 주님에게 대답합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우리의 왕이신 주님은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멸망에 들어가는 이들이 따지고 나왔습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의 작은자들, 작은이들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예수님은 나타나시지 않지만, 예수님이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던 작은이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입니다. 40절 말씀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45절에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레고리 A. 보이드 목사는 “한 기독교 국가의 신화”라는 책에서 세상의 통치 방식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을 고찰하면서 ‘위에 서는 힘’과 ‘아래에서 섬기는 힘’을 비교한 바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결코 위에 서는 힘을 가져서는 안 되고, 반드시 아래에서 섬기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십자가와 칼’이라는 책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사는 자만이 진정 행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웃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위에 서는 힘보다 아래에서 섬기는 힘을 더 신뢰하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처럼 고통을 감수하고 아래의 힘을 택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교회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래에서 섬기는 힘’이라는 주제는 이해할 수 없고, 모호한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 위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를 선택하심으로 ‘아래에서 섬기는 힘’을 실천하시고 본 보기로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몸인 교회의 존재방식에는 언제나 골고다 언덕 위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의 본성이 근본을 이루고,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의 길은 하늘나라로 가는 우회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 직행하는 그 길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예수님이 살아가신 그 존재방식을 따르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배척하신 마귀의 유혹에 쉽게 끌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눈앞에 보이는 성장에만 급급하여 덜 희생적인 세상의 방식을 따라가지 말고, 우리 지역사회의 가난과 질병과 모든 고통을 끌어안고 그것은 그들의 문제라고 보지 말고, 우리의 문제로 여기며, 그들 속에 뛰어 들어가서 함께 고민하고, 아파할 수 있는 낮아지는 교회, 아래에서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마25:40절에서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25장에서 말씀하시는 작은 자들이란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 가난한 자, 나그네, 헐벗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우리와 우리 교회가 섬겨야 할 작은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그런 작은이들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그 작은 자들에는 가난한 자들, 우리의 기성세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다음 세대들, 장애우, 다문화가족들, 나아가 인권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가난하여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까지 그 범위를 넓혀 가야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원시림에서 90 가까운 연로하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을 돌보고 있는 것을 보고 한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당신 같은 저명한 분이 꼭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 이런 힘든 일은 젊은이들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평안히 보내시라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물었을 줄 압니다. 이때 슈바이처는 대답했습니다. “나를 동정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 이 말은 슈바이처 자신이 그리스도의 손이 되어서 예수님 대신 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에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손이 되고 다리가 되는 영광스런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사는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작은이들이 상상 외로 많습니다.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이 제 발로 교회로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찾아가서 만나고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작지만 정성스러운 물질도 마련해 가지고 가서 위로하고 격려하여 다함께 잘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에서 금년 한 해 동안 작은이들의 벗으로 한번 살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야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작은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찾아와 섬기셨고, 하늘의 소망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작은 예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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