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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레 19:18, 마 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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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레 19:18, 마 25:40) 
 
  
❚작은 자란?

우리 효자교회는 예배를 마치면 광고 시간에 제일 먼저 교회 표어와 목적을 함께 제창합니다. 하도 많이 해서 여러분이 이미 외우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교회 목적은 해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주님 오실 때까지 같습니다. 바로? “말씀 위에 든든히 선 건강한 교회”지요. 이것은 우리 효자교회의 존재이유요 비전이기 때문에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표어는 해마다 바뀝니다. 

최근 우리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 총회의 뜻을 따라 총회가 정한 주제를 그대로 따라 교회 표어를 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97회기 총회 주제인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을 따라 우리 교회도 2013년 교회 표어를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작은 이’들이란 누구를 뜻하는가? 이 말이 옛날 우리가 보던 개역성경에는 ‘소자’(小子)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마태복음 18:6은 개역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그런데 새로 번역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 개정판에는 이 ‘소자’를 쉬운 말로 고쳐 ‘작은 자’라고 바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자’ ‘작은 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주님께서 이들을 실족시키느니 차라리 커다란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져죽으라고 하신 것일까요? 이 ‘작은자’(소자)란 한 마디로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총회에서는 구체적으로 이 작은 자들을 이렇게 정의하여 부제를 붙여 놓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벗, 다음 세대의 벗, 장애인의 벗, 다문화 가족의 벗, 북한동포의 벗, 갇힌 이들의 벗, 국군장병의 벗, 농어촌교회의 벗’입니다. 저기 표어에 붙어있는 것보다는 좀 더 많지요? 그렇습니다. 시대마다 나라마다 약자의 개념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이 시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작은 자, 약자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작은 자, 약자는 더 있겠지요. 하지만 올 한해는 구체적으로 이 분들을 대상으로 총회와 교회와 성도들이 힘을 모아 이 작은 이들의 벗이 되자,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자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 어느 시대고 가난한 사람들은 늘 있었지만 최근 우리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가난한 이들의 문제가 이만저만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이번 추위에 자식 부담 안주려 보일러 기름 값 아끼려고 끄고 자다가 동사한 할머니의 안타까운 이야기). 교회가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돕는 작은 벗이 되어주자는 것입니다. 

또 다음 세대, 바로 교회의 미래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자녀들과 새 가족들도 아직은 어리고, 아직은 미숙해서 작은 이들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또 장애인, 그리고 다문화 가족(제3세계 배우자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2세들)도 점점 늘어나는데 그에 따라 차별이나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에 교회가 어떻게 하면 이들의 진정한 벗이 되어줄까? 또 우리의 영원한 작은 자인 북한동포, 그리고 순간의 실수로 자유를 잃고 영어(囹圄)의 몸이 된 갇힌 이들, 그리고 이 나라를 지키며 오늘도 고생하고 애쓰는 우리 국군장병들, 인구가 점점 줄고 너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어촌교회, 이들이 바로 이 시대의 작은 이들이며, 우리 교회가 이런 작은 이들의 작은 벗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 사명은 올해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쭉 해왔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교회의 사명이지만 특별히 올해 2013년에는 우리 교단과 교회가 이 일에 더 열심을 가지고 노력하자는 뜻인 것입니다.

❚왜 중요한가?

그렇다면 교회가 이들 ‘작은 이’들의 벗이 되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가 생각해 봅시다. 사실 이런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것은 교회 말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 다니는 분들 중에 어렵고 힘든 이를 돕는 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이들의 벗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은 대표적으로 오늘 본문 레위기 19:18입니다.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또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뜻이 대표적으로 오늘 본문 마태복음 25:40입니다. 읽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우선 이 두 말씀을 살펴보면서 작은 이들의 벗이 되라 하신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25:40 말씀을 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약한 자들에 대해 정말 관심이 많으셨고 특별히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절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종교권력자나 당시 세상의 권력을 누리던 권세가들, 또 부자들,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반대로 주님은 당시 가장 소외되고 손가락질 받던 가난한 자, 여성들, 어린이들, 그리고 세리나 창기 같은 이들과 주로 어울리고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가 바로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영과 염소의 비유’인 것입니다. 비유는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나오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님이 마지막 재림 때 천사와 함께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다 그 앞에 모으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구분하여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 받을 성도는 오른편 양 쪽에, 심판 받을 죄인들은 왼편 염소 쪽에 두게 되는데 그 기준이 특별합니다. 35~36절을 봅시다.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즉, 예수님이 주릴 때 먹을 것 주고, 목마를 때 물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주고, 병들었을 때 돌봐주고, 옥에 갇혔을 때 와봤다는 것인데 오른편 양 쪽에 선 성도들은 놀라서 되묻습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저희가 언제 주님이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했습니까? 언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습니까? 언제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습니까?” 그런 적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40절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직접 그렇게 해드린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 약한 자, 소외된 자를 보고 그렇게 해준 것이 곧 주님에게 해드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왼편 염소 쪽에 선 사람들은 반대로 우리가 그렇게 주님께 잘 하려고 애를 썼는데 왜 우리를 이쪽에 서게 하시냐고 따지는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5절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참 이 비유는 파격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 중에서 힘들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베풀어 주면 그것이 곧 주님께 해드리는 것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도 나는 교회 가야 하니까, 나는 교회 충성해야 하니까 하며 안 돕고 벗이 되어주지 못하면 그것이 곧 주님을 외면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정말 충격적이고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는 것이 하면 좋고 안 하면 할 수 없는 선택(옵션)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나아가 단순히 그들을 불쌍하다고 안 됐다고 동정 베푸는 수준이 아니라 ‘벗’이 되어주는 것, 그들을 내 친구요 벗으로 여기고 진정한 형제애로, 우정으로 돌봐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안 하면 주님께도 용서 받을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제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번에는 레위기 19:18에 나온 하나님의 뜻을 알아볼 차례입니다. 이 본문이 들어있는 레위기 19장은 소위 ‘성결법전’(聖潔法典)이라 불리는 레위기 17~26장에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왜 레위기 17~26장을 말이 좀 어렵지만 ‘성결법전’이라고 부르느냐? 간단합니다. 레위기 19:1~2을 읽읍시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깨끗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거룩할 성(聖), 깨끗할 결(潔), ‘성결’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성결, 즉 거룩하고 깨끗한 게 도대체 뭘 뜻하냐? 그래서 성결을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규정과 법을 레위기 17~26장에 모아놓았고 그것을 ‘성결법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정말 구체적인 규정과 법이 아주 자세히 나옵니다. 첫 장인 17장에는 가장 먼저 ‘예배생활’에 대한 법을 말씀했고, 그 다음으로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생활 즉, 가정생활, 결혼과 출산, 부부간의 성생활, 농업과 상업, 먹고 입고 잠자는 의식주 생활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중요합니까? 거룩은, 깨끗한 삶은 교회에서만 나타나서는 안 되고 실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생활에서 나타나고 직장과 사업에서, 먹고 자고 옷 입고 살아가는 데서 나타나야 진짜 성결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척 하지만 집에 가서는, 또 세상에 나가서는 그렇지 못하면 가짜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으로는 깨끗한 체 하지만 속마음은 더럽다면 가짜 성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나오는 레위기 19장을 보면 아주 구체적인 규정들이 나옵니다. 성경을 펴고 제가 말하는 대로 눈으로 따라오세요. 3절에는 부모를 공경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우상숭배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보세요. 부모 공경이 거룩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32절에는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계속해서 5절부터는 제물 드리는 법, 즉 예배생활에 대한 규정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9절부터 어떤 규정이 나옵니까?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다음 주에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농사하고 곡식 거둘 때나 포도 열매 딸 때 다 거두지 말고 좀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거룩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또 12절에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남 속이지 말라는 겁니다. 13절에는 “이웃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말라” 14절에는 ‘귀먹은 자’와 ‘맹인’ 즉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괴롭히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15절과 35절에는 재판할 때 공의롭게 하고 장사나 사업할 때도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를 사용해 정직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이 사회정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게 도대체 거룩이나 성결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예, 있습니다. 있어도 너~무 있습니다. 그 답이 바로 오늘 본문인 18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첫째,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우리도 거룩해지는 길이라는 겁니다.

둘째,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려면 그냥 불쌍하니까 도와주자, 내 것 조금 떼어주자 수준이 아니라 네 이웃 사랑하기를 어떻게 하라고요?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내 가족처럼도 아니고 친구처럼도 아니고 아예 나 자신처럼 여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가능이나 한 일입니까? 어떻게 남을 나 자신처럼 사랑합니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죽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지 않습니까?(요 3:16) 또 예수님도 우리를 자신처럼 사랑하셨으니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되, 내 몸처럼, 나 자신처럼 사랑하면 지정 거룩한 삶을, 진짜 성결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란?

여러분,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개념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마 22:37~40). 그런데 이 이웃이 누구입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20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형제가 어떤 자매가 눈에 보이십니까? 대개 잘 나가고 잘 살고 힘 있는 형제자매는 보지 말라고 해도 잘 보이는데, 어렵고 힘든 형제자매,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이웃은 잘 안 보입니다. 보여도 못 본 척 하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보았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저들이 내 친구(벗)라면 내가 어떻게 했을까? 저들이 내 부모요 형제나 자녀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아니 저들이 나 자신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래서 느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행하시면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지난 2011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 김우수 씨, ‘사랑의 철가방’이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분입니다. 김우수 씨는 1957년 태어났지만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고아로 자랐습니다. 7살에 보육원에 들어갔고 12살 때 가출을 해서 초등학교 중퇴가 최종학력입니다. 순간의 실수로 교도소에 1년 6개월을 복역하기도 한 그는 교도소에서 불우한 어린이들에 관한 글을 읽고 자기 생각이 나서 그 아이들을 돕기로 마음먹고, 중국집 배달원으로 살며 월급 70만원 중 상당액을 후원금으로 내놓았습니다. 2011년 9월 25일 배달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그가 가입한 종신보험 4천만 원 전액을 어린이재단에 기부하고 장기기증에도 서약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 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분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렇게 자기도 어렵고 힘들지만 내 몸처럼 남을 돕고 어려운 사람의 벗이 되어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참 많고 그중에는 비 기독교인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분들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희생의 사랑의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올 한 해 우리 교회재정이 비록 빠듯하고 힘들지만, 또 나라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고 살기도 점점 힘들어진다고 하지만 이 사명은 꼭 감당해야 합니다. 올 한 해 이 표어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을 기억하며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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