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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난의 시대에 해야 할 일들 (히 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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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의 시대에 해야 할 일들 (히 6:9-12) 

  
유대인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집 없는 신세가 되었다. 아무 것도 가질 수 없고, 외국 땅에서 순례자와 이방인으로 살았다. 조롱당하여, 고문당하고, 옥에 갇히는 괴롭힘을 당했다. 동굴과 땅 속에 판 구멍(카타콤) 속에 살았다. 유대인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관계가 끊어져, 외로웠다. 

그 때는 로마 황제 네로에 의해, 통치되던 때다.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경멸했다. 64년 대화재를 일으킨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며, 자신의 방화를 덮어씌우고 핍박했다. 이렇게 고통당할 때, 예수님을 버리는 히브리인들이 생겼다. 이때 고난당하는, 히브리 그리스도인에게 히브리서를 썼다. 

히브리서는 유대인에게, 모든 것보다 더 뛰어나고, 더 좋은 예수님을 소개한다. 예수님은 선지자들보다, 천사들보다, 유대교보다,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다. 지상의 제사장직보다, 옛 언약과 짐승의 제물, 매일 드리는 제사보다, 더욱 더 위대하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히6장)에서 그림자와 실체를 대비한다. 유대교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우월성을 말했다. 유대인들이 삶의 어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자, 이처럼 위대하신 예수님을 버리지 말고, 계속 믿고 따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같은 이단이, 인터넷에 온갖 비방의 글을 올리고, 잘못된 교인들의 행동으로, 행위구원을 주장하며,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해야 올바른 신앙생활이 될까? 

1. 확실한 구원관을 가져야 한다(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이보다’는 유대교의 구원받는, 방법들을 말한다. 

유대교에서 구원받는 방법은 무엇인가? (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는, 시작, 기초를 말하는데,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함을 말한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방법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회개와 믿음을 말한다. 유대교는 회개하는 방법을, 각종 침례법과 안수를 통해 표현했다. 
죽은 행실은 (히9:14) 다시 나오는데, 기독교는 앞에 나오는 (9:12-13)의 유대교의 방법들과 대조하며 설명한다. 유대교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의 제사로, 육체를 정결하고, 거룩하게 한다. 이러한 제사 방법은 그림자일 뿐, 우리를 온전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이와 대조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완전히 깨끗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교회는 유월절을 지키느냐? 장막절을 지키느냐? 하면서,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절기는 다 그림자일 뿐이다(골2:16-17). 실체는 예수님이다. 
따라서 실체가 왔기에, 다시 그림자를 붙들어야 한다고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요, 이단의 행동일 뿐이다. 신천지도 확실한 구원관이 없으니까, 해괴망측한 해석을 한다. 또 세례들, 침례들을 말했다. 이 말은 이런 뜻이다. 아이를 낳은 여인이 부정하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이나 동물을 만지거나, 나병환자나 유출병자에 접촉하게 되면, 부정하다고 여겼다. 다시 정결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정결하게 만드는 우슬초를 넣은 물을 뿌려서, 부정한 사람을 정결하게 만들었다. 제사장은 정결하게 하는 물로, 부정함을 입은 자에게 뿌려, 정결하게 했다(시51:7). 
또 정결 하는 만드는 탕에서, 물속에 들어가서, 깨끗하게 몸을 꼭 씻어야 했다. 이를 세례, 침례로 말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침례들은, 기독교의 침례가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따라 행했던, 그저 몸을 씻는 정결 예식일 뿐이다. 그래서 복수로 침례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정결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다. 정결하려면, 죄와 몸을 씻음으로 깨끗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대교는 죄와 몸을 씻는, 여러 가지 정결예식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런 방법이 아니라 더 좋고 완전한 방법이,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의 보혈 안에, 있다는 말이다. 
‘안수’는 (레16: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매년 연례적으로 있는, 속죄일에 행하는 의식의 부분이다. 

유대인은 죄를 지으면 회개의 표시로, 양과 소를 잡아,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렸다. 이는 하나님께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의 제사장이 안수하는 것 대신에, 하나님이 우리 모든 무리의 죄악을, 그리스도께 짊어지게 하셨음을 믿고, 그 길을 택하라는 말이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은,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들이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부활과, 제자들이 믿은 부활과는 다르다. 그들은 보상과 형벌사상을 말했다. 모든 영혼들이 최후의 날에, 심판에 소환되어, 의인들만 부활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은, 의인과 악인 모두의 부활을 말한다. 유대교의 부활은, 미래에 올 종말에 관한 것이지만, 기독교에서의 부활은, 단순히 미래적인 기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일어났고, 제자들에 의하여 체험되어진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유대교의 가르침에 터를 닦지 말고, 완전한데로 나아가라고 권한다(2).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 터를 또 다시 닦으려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라는 말이다. 구원은 예수님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잘못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히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말씀은 행위구원을 이루려는 이단들이, 좋아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회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자가, 다시 행위구원으로 돌아가려는 자들에게, 복음을 설명한 구절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성도가 되었다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간다면, 회개하여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다. 예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교다. 오늘날 이단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저버리게 만든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은 자들은, 다시 행위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면, 이는 하나님의 아들을 욕되게 함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면 안 되고, 은혜를 계속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계속 은혜가 공급됨은, 마치 내리는 비와 같다. 비가 계속 내릴 때, 이 땅은 비를 잘 흡수해서, 밭을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채소를 내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는, 우리의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다른 사람에게 공급될 수 있는가에 있다. 우리는 성숙해져 가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의 나이는 먹어가는 데, 성숙을 멈춘 기형아인가? 우리는 육적인 성숙만큼, 영적인 성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2. 복음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라(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하나님과 성도를 섬기며 사랑하라. 하나님은 의롭기에 자기 백성에게 하신 언약을 반드시 지킨다. 인간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신실하심 때문이다. 구원은 우리 안에 있지 않다. 하나님 안에 있다. 

(애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너희는 지금까지, 성도들에게 봉사를 해왔고, 아직도 봉사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보여 준, 선행과 사랑을, 격려하면서,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기에, 너희의 선행과 사랑을 결코 있지 않으신다. 

(10)의 ‘너희 행위’는, 우리의 믿음을 말한다. 그 이유는, 
(1) ‘구원에 속한 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구원과 나눌 수 없다.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2)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이처럼 본문 10절의 행위는, 그들의 사랑의 수고를 말한다.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롬4장 참조). 그렇지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겼다. 예수님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막 살면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한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은, 주님의 뜻을 준행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지치지 않는 사랑으로, 봉사를 했다는 말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었던, 카타콤의 동굴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사랑했던 당신들 때문에, 나는 63세까지 살 수 있었소.” 그 많은 고난과 핍박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어두운 굴속에서 살면서도, 하늘의 신령한 기쁨을 맛보았던, 능력의 비밀은 어디에 있었을까? 

“사랑했던 당신들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하는 가족, 쉴 수 있는 가정이 있으면,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정보다, 더 아름다운 가족을 주셨다. 그것은 믿음의 가족이다. 신앙의 가족이다. 
함께 교제하며, 함께 돌아보며, 함께 격려하며, 인생의 피곤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놀라운 신앙의 가족을 주셨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기도해 드릴 테니 힘내셔요. 실망하지 마세요.” 내가 옆에 있는 분에게 던진 따뜻한 말 한 마디로, 그들은 삶을 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힘들수록 우리는, 사랑과 섬김을 풍성하게 나타내야 한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상실한 근본 원인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데 있다. 교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이다. 
그래서 ‘진 게츠’라는, 미국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사단이 현대의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놀라운 하나의 사건이 있다. 그것은 유사 기독교를 만든 것이다.”고 했다. 이단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그들이 교리에 미혹되어,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단에 물드는 사람들은 주로, 사랑을 받지 못해, 외로움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다. 이단 종파에 가면,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이 정상적인 사랑이, 아닐 수 있다. 어쨌든 이단 종파에는, 끈질기게 보살피고 돌보는, 어떤 사랑에 사람들이 끌리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잊어버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사43:25, 히10:17). 그렇지만 하나님이,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성도를 섬기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의롭기에 그 사랑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성도를 섬기고, 사랑했나? 이러한 삶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구원받은 자는 다른 생활이 아니라, 사랑으로 성도들을 계속 섬기는 것이다. 이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살자(히10:24). 

3. 소망을 풍성하게 하는 약속을 붙잡으라(12).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 우리는, 부쩍 일에 매여살고, 온갖 이단들이 날뛰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마음에 여유가 없이, 분주하기만 한다. 또 실망과 절망이, 우리의 삶 가운데, 너무 흔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분주하고, 바쁜 상황, 그리고 온갖 비난 속에서, 과연 우리가 품어야할 생각들을 무엇일까? 

(1) 소망의 풍성함이 있기를 바란다(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예수님은 우리가 풍성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이며, 천국이 소망이다. 이런 소망으로 풍성하기 바란다. 오늘의 이 시대는,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열망이, 사라지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신앙이 실종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은혜와 소망으로, 풍성하기 바란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불평과 원망, 아픔과 저주에 매여서 살기보다는, 풍성하기를 원하신다.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라고 했다. 우리 인생에는 끝이 있다. 하나는 내가 죽어서 주님께 가는 개인의 끝이 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끝을 맞게 된다. 모두 다 해당된다.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여도, 싸일 수 없다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사랑을 다 갚아주신다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소망을 갖고 있는 자는, 반드시 거두게 된다. 사랑과 섬김의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고 했다. 

(2) 소망의 풍성함을 어떻게 나타나야 하나?(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① 부지런함으로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게으름을 싫어한다. 부지런함을 원한다.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실 때, 이새에게는 8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왕을 선택하러 갔다. 집에 있는 7명의 다윗의 형들을 왕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왕을 선택하는 줄도 모르고,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 다윗을 선택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부지런히 일하시는 사람들을 찾았다. 베드로도 밤을 새우며, 일하는 현장에서 찾으셨다. 레위는 세금을 받는 곳에서 선택하셨다. 

② 믿음으로 보여야 한다. 
천국의 소망이 확실한 사람은, 이 땅에서의 안락한 삶에, 너무 매달릴 필요가 없다. 내세와 천국이 존재함을 확실히 믿는다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그렇게까지 매달릴 필요가 없다. 
믿음은 내일을 바라보고, 내세를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은 천국을 바라보며 살게 한다. 우리에게 천국의 소망이 분명하다면, 이 땅에서의 재물, 권력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좀 더 자유하게, 좀 더 유연하게, 좀 더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③ 오래 참음으로, 나타내야 한다. 
오래 참음은 인내를 말한다. 인내함으로, 소망의 풍성함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도 환경이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는 그냥 참고 버터야 한다.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고, 자녀들이 부모님께 원하는 것이 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고,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고, 우리도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전진 하는 성숙함을 원하신다. 처음 그리스도를 찾을 때의 마음 상태처럼, 동일한 부지런함을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 
(히11:35下)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이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살기 위해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다. 더 좋은 부활을 소망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으로 나아가자. 

결론이다. 환난의 시대에, 어려움을 잘 이겨낸 유대인은, 복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과 같이 하지 않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잘 섬기며 살았다.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았다. 
구원의 확신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들은, 믿음을 배반하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갔다. 우리도 힘들 때마다, 예수님을 더욱 바라보자. 믿음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달려가자.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기억한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인내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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