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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눅 9: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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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눅 9:43-48)


눅9: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성경말씀이 어려워 보이십니까?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몇 가지 핵심원리를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구약에서 신약을 관통하는 몇 가지 핵심원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만 있으면 그것이 열쇠가 되어 성경말씀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지혜가 됩니다. 그 열쇠 중에 하나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주 만물의 모든 일들을 사랑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왜 예수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말씀하셨습니까? 합심기도가 능력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합심해서 기도하는 사람 치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합심하여 기도한다는 말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요, 교인들이 합심하여 기도한다는 말은 교인들끼리 서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합심하지 못한다는 말은 사랑이 그 가운데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왜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1,33)."고 명하셨습니까? 이것도 사랑의 원리를 알아야만 이해가 됩니다. 지금 남부지방과 강원도에 수해 당한 사람이 많이 있는데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내 가정과 사업에 복을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방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십니까? 지극히 이기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막11:25)."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도응답이 임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우리 마음에 있는 한 사랑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하늘에 속한 일들과 땅에 속한 일들이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고 비유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일을 말씀하실 때 땅의 일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땅의 일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믿기 어려우면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 것도 믿기 어렵습니다. 또한 땅에 있는 일이 풀려야 하늘에 있는 일이 풀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야곱은 육신의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복을 받을 수가 있었고,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잘못을 회개했더니 기근이 해결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바르게 대해주어야 남편의 기도의 문이 막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옛 말에 집에서 세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센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집에서 세는 구멍을 막아야 바깥에서 물을 담을 수 있고, 땅에서 세는 구멍을 막아야 하늘로부터 오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열쇠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에서 열쇠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있고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개의 서로 다른 사건을 묶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건이며, 두 번째 사건은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하면서 다투는 장면입니다. 이 두 사건은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관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이 첫 번째 사건을 설명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인간의 영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부인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자기들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목숨을 버리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나, 제자들은 목숨을 건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먼저 변화되기 전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사도이며 성직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넘버원이 되고자 하는 육신의 욕망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헌신을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그러면 내가 돈 잘 버는 직장을 버리고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야 하느냐'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주님 섬기는 것을 직분에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렇게 단편적이거나 진부한 것이 아닙니다.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더라도 육신의 욕망에 좌우될 수 있으며, 돈을 많이 버는 사업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직분이 믿음을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육신적인 생각에 끌려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이 사실을 알면서도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할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약간 어폐가 있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믿음이 필요하지 예수님에게 무슨 믿음이 필요한가?'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사람도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예수님도 믿음으로 사십니다. 사람만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인내하시며 기다리십니다.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며, 우리가 성숙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십니다. 사람만이 뜻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믿음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여겨 주십니다. 의인으로 부를만한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아직 죄인이요, 이기적이며, 육신의 욕망에 이끌려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불러 주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믿음과 의지가 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정욕을 좇던 사람의 생각과 취향, 가치관이 점점 변화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믿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인내와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0)."
집이 없는 사람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미 있는 사람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약속을 믿고 기도하지만 일단 그 땅을 차지하고 난 후에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요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실 때,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지극히 연약하고 이기적이며 육신적입니다. 변화되는 구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이들이 지금은 이렇지만 장차 변화될 것이다. 지금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라고 믿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입장에서 대단한 낙천주의요, 믿음이요, 긍정적인 생각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낙천주의가 있습니까? 지금은 내 입장이 어렵고 내 삶과 가정에 갈등이 있으나 때가 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낙천적인 생각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귀한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줍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직 자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밤에 불러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친 짓입니다. 자기 자식도 없는 사람이 하늘의 뭇 별과 같은 후손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 내가 마시고, 입고, 먹을 것을 염려하고 그것 때문에 다른 일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생각할 수도 없지만 주님은 지금 아들 한 명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을 갖게 될 것을 꿈꾸게 하셨습니다. 마음속에 위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능력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지금 당장 있는 나의 문제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있는 문제가 있지만, 그 이후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미쳤다고 할 것이지만 믿음의 사람은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꿈틀거리며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송만 하면 그 마음속에서 이러한 확신과 기쁨과 믿음이 넘쳐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그러므로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통해서 행하실 일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어떤 말씀이 역사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임산부는 아직 아이가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믿는 바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심령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 움직이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믿음의 열매가 가시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 눈에 우리는 아직도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장차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변화할 것이라고 믿으십니다. 

하나님의 믿음과 우리 믿음의 차이점은 우리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하다는 것을 믿지만 하나님도 당신의 은혜가 당신의 뜻을 이루기에 족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너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록 지금까지는 열매가 없었지만 주님 말씀대로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생길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옳소!"하는 것입니다. '아멘'이란 말은 하나님이 '아멘'하실 때 '옳소!'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더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동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말씀하시면서 마치 이방여인에게 줄 몫이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여인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비집고 들어가 위와 같이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놀라시며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죽이 잘 맞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가 그 삶 속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 44절은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담아두라는 말은 '기억하다, 보존하다, 간수한다'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시냇가에 나가 매끈매끈한 물맷돌 다섯 개를 골라 주머니에 담아두고 나갔습니다. 다윗은 물맷돌 던지는 데 명수입니다. 한 개만 가지고도 충분히 명중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섯 개까지 주머니에 담았습니까? 이후에 필요할 것을 대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이후에 필요할 것을 내다보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깨닫는 날이 올 것입니다. 

젊은이가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면 그 때 비로소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처럼,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지 않지만 이해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자의 직분을 받게 되면 목사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이해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이 살면서 고민하고 경험해봐야 합니다. 우리의 그릇이 작고 생각의 폭이 좁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전12:9)."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문제가 하나님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다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땅의 문제가 해결되면 하늘에서 주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옳았습니다. 지금 당장 예수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지만 이후에 제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예수님의 복음을 위하여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옳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가능했다면 우리에게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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