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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람을 붙잡은 손 (눅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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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붙잡은 손 (눅 2:1-20)

예수님은 성령을 바람에 비교하셨지요. ‘소리를 듣거니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바람 같은 것은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분명한 것은 현재일 뿐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개인의 삶도 바람과 같고 인류의 역사도 바람과 같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오천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 이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전에 어떻게 살았고 어디서 살았고 뭘 하고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글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글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이 발명되기 이전의 인간의 삶에 대해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것을 믿지만 그것이 언제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만 년 전이었는지, 십만 년 전이었는지, 백만 년 전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도 바람과 같습니다. 

누가 말하길 인생에 확실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세금이고 둘째는 죽음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많이 염려하지만 염려하는 것이 미래를 알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도 보니까 선거일을 앞두고 방송사마다 전문가를 불러놓고 끊임없는 토론을 합니다. 누가 이길 것 같으냐, 투표율이 얼마가 되겠느냐, 그게 누구에게 유리하냐…. 왜 이렇게 합니까.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텐데 마치 라면을 끓이면서 냄비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들여다본다고 더 빨리 끓지 않아요. 그러나 사람들이 조급하기 때문에 들여다보는 것처럼 사람들마다 미래가 궁금하기 때문에 이런 추측도 짜보고 저런 추측도 해보지만 정작 결과가 나오니까 예상과 다르지 않습니까. 그 많은 여론조사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선거도 그런데 하물며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제가 마야의 달력에 의하면 지구 종말이 오는 날이라고 사람들이 떠들었는데 제가 알기로는 종말이 오지 않았어요. 여러분이 여기 계시는 걸 보니까 종말이 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기 서있는 걸 보니까 지구는 망하지 않았어요. 인간의 심리가 묘한 것이 당장 종말이 온다는 말은 호기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데 무궁한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장 50년 후의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합니다. 백년 후, 천년 후, 만일 주님이 늦게 오신다면 만년 후까지 인류가 존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지 우리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타임머신이라는 소설이 있기는 했지만 타임머신이 묘사한 인류의 미래는 어둡고 우울하고 암울한 이야기에 불과하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금 우리가 발달하는 속도로 계속 발전한다면 백년 후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오백년 후에 인간이 어떻게 살지 생각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독교인 중에는 그 전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다 이렇게 토론을 회피하려는 사람이 많은데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천년 전에 ‘내가 곧 오리라 - I’ll come soon‘ 곧 오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천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그만한 세월이 지나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국내 어느 대형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이 은퇴하시고 나면 누가 후임자가 될 것이냐고 물어볼 때에 아마 그 이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다 라고 말들을 했는데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으셨고 그 목사님은 은퇴하시고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분이 후임으로 오셨어요. 세월은 이처럼 흘러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그 중의 한 가지 특별한 점은 성경말씀은 어떤 무궁한 철학과 사상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분명한 역사의 시점에 일어난 사건 위주로 기록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경말씀이 코란이든 불경과 비교되는 면입니다. 

불경은 불교의 사상과 철학을 서술한 책입니다. 코란은 모하멧이라는 한 사람에 의하여 단기간에 기록된 책입니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여러 저자들에 의해서 장기간에 걸쳐서 여러 주제에 대하여 기록된 책을 하나로 묶은 것입니다. 제일 처음 기록된 성경과 제일 나중에 기록된 성경의 시간적인 격차가 일천년이나 됩니다. 

창세기가 최초로 기록됐다고 보고 요한계시록이 가장 늦게 기록됐다고 봤을 때 그 시간적인 격차가 무려 일천년이에요. 이렇게 장구한 세월동안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 다양한 장소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기록됐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이 일관된 메시지와 하나의 믿음, 하나의 약속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놀라운 것이고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성경을 충분히 신뢰할만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성경의 핵심내용은 누구의 사상 · 의견 ·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닌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 위주로 기록돼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사건은 천지창조가 되겠지만 그건 하도 오래전 일이기 때문에 잠시 옆으로 미뤄놓더라도 우리가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건만 보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한 사건, 또 사백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 백성이 출애굽한 사건, 그 백성이 사십년 광야생활 끝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한 사건, 그리고 그 민족이 그 땅에서 이스라엘 왕조를 세운 사건, 그리고 이스라엘이 칠십 년 동안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건, 그리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사건, 그 이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뼈대가 되는 사건만 열거하면 이렇습니다. 

이것은 어떤 철학이 아니고 어떤 사상이 아니고 역사적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놀라운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탄생하신 사건입니다. 고대 신화를 보면 봄에 태어났다가 겨울에는 죽고 다시 봄이 되면 되살아나는 왕에 대한 신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이 신화를 따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의 삶은 그런 신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 세상에 오셨고 단 한번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예수님은 한 번 부활하셨고 이것은 되풀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누가가 예수님 탄생의 역사적인 면을 정확하게 면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에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이보다도 더 정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옛날 옛적에 멀고 먼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 구체적인 역사의 한 시점에 분명한 장소에서 분명한 사람들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15절에 목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삶은 이루어진 일이에요. 왜 누가가 이 모든 것을 말하느냐. 그 의도가 뭐냐. 이것은 신화가 아닌, 옛날이야기가 아닌, 구체적인 확인할 수 있는 역사의 한 시점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고 교훈을 주기 위하여 지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기독교는 사상이 먼저고 그 다음에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먼저고 그 결과로 사상이 발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발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없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건이 항상 발단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오랜 세월동안 동화책이 된 면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하실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호두까기 인형 · 루돌프 사슴 코 · 선물교환 · 빨간색 옷 · 크리스마스트리 이런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동화와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헷갈립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위한 성탄절 이런 어떤 동화속의 성탄절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실화와 동화가 섞여서 우리를 헷갈리게 하다보니까 성탄절이 주는 의미조차도 희석됐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의 정신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은 베풂이라느니 나눔이라느니 가족이라느니 사랑이라느니 선물이라느니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없어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는 가치관입니다. 산타클로스만 있어도 충분히 선물 · 나눔 · 베풂 · 가정 이런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을 역사적인 사건,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하신 일로 기억했을 때 여기에 놀라운 몇 가지 면이 있습니다. 

첫째, 영원한 세계가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영원한 세계가 사람들의 삶속에 찾아왔어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독생자에요.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요 하나님이 구만리장천에 계신 분이 아니고 사람들의 삶속에 구체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영광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일은 먼 옛날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우리와 가까운 시점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천년이 많은 세월 같지만 이천년 전이라면 삼국시대를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도 삼국시대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사극을 만드는 것을 보면 이천년이라는 세월은 그렇게 많은 세월이 아닙니다. 

이 복음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아세요. 천 구백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어요. 천 구백년이 지나서 겨우 복음이 우리나라에 소개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많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화석처럼 굳어져버린 이미 끝난 일이 아니고 아직도 살아있고 움직이는 생명력이 있는 일이에요. 그러므로 복음은 과거 역사책에 기록된 옛날 일이 아닌 아직도 역사하고 있는 움직이고 있는 생명력입니다. 땅 끝을 향하여 여전히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 역사의 구심점이 되고 우리의 삶의 구심점이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주전, B. C. 라고 하지요. before christ, 그 이후를 A. D. anno domini, 우리말로는 주후라고 하는 것처럼 역사적으로도 예수님의 탄생이 기점이 돼서 그것이 구심이 되는 것처럼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삶이 바람처럼 어디에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금방 잊혀져 버리는 짧은 인생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우리 삶속에 들어오셔서 구심점이 되어 당신의 손으로 붙잡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당신의 계획 속에 붙들어 매주시는 것입니다. 바람에 날아가는 낙엽을 손으로 잡는 것처럼 바람 같은 인생을 예수님이 붙잡으십니다. 어디로 가느냐, 너는 어디로 가느냐, 너는 무엇을 하느냐,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너도 나와 함께 가자,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가 들어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영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들어오시도록 문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열면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먹는 동행하는 함께하는 영생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캐나다 TV에서 본 영화가 있었습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고 배우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영화의 끝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큰 인상을 주었어요. 

어떤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꿈에 그리던 것과 같은 여성과 마주쳤어요. 몇 초 후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서 각자의 길을 가야됩니다. 그래서 이 남자가 꿈에 그리던 여자를 엘리베이터 안에서 봤으니까 말을 겁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랬더니 그 여자가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나는 프랑스 간다.’ 그랬더니 그 남자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나도 간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여자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 둘이 서로 대화를 하고 같이 택시를 타고 같이 프랑스로 간다는 얘기에요. 

예수님의 탄생이 이와 같은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바람처럼 가는 우리 인생과 마주쳤어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과 마주친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삶과 마주쳤어요. 길에서 히치하이킹 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히치하이킹을 하셔서 같이 가자, 나도 태워 달라,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바람과 같은, 잠시 왔다가 곧 사라져 잊혀지는 인생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같이 가자고 마주치셨어요. 그래서 우리와 함께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이에요. 영생은 지금부터 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더 이상 바람과 같지 않고 예수님이 우리 삶에 찾아오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우리가 천국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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