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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내게 배우라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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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배우라 (마 11:28-30)

한국의 장로교회가 분열할 때 하나는 예수교장로회가 되었고 하나는 기독교장로회가 되었습니다. 예장, 기장이라는 이름이 거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예수님과 그리스도가 분열됐다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 하나는 예수교가 되고 하나는 기독교가 됐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저희가 속한 교단은 예수교 장로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정작 우리 신앙에서 예수님이 실종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이지만 사실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될 부분입니다. 왜 그러느냐.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데 그것으로 족하지 뭣 하러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타클로스 같은 전설적인 인물이 됐습니다. 상징적인, 신화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격체로 생각하려 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음주의가 범한 실수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복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을 강조하다가 예수님을 상실하는 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할 때 유심히 들어보면 거두절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부터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빼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맞지만 그것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의 사역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건너뛰는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유일한 목적이 십자가를 지기 위한 것이었다면 곧바로 십자가를 지면 됐지 뭣 하러 3년 반 동안이나 사람들을 가르치셨겠습니까. 뭣 하러 제자들을 가르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장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이고 예수님을 단순화시키는 것이고 신화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 어디로 갔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다보니까 오늘날 대한민국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많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수는 개신교의 전유물이 아니고 가톨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예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미사 아닙니까. 미사는 성찬식을 말하는 것인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억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천주교는 사람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 그 자체가 영생이라고 생각하는 신학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이 없는 가운데 성찬식에 미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마치 구원을 받는 것처럼 생각을 하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실수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 없이 백만 번 미사에 참여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결국 개신교든 천주교든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가르침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예수님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복음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에요. 복음은 예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복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먼저고 그 다음이 복음이고 복음은 예수님에게 종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예수님을 가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되는데 예수님은 다른 스승과 지도자들과 다릅니다. 다른 지도자들의 경우에는 유력한 지도자일수록, 강한 지도자일수록 자기의 의견을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소위 인간을 개조시키려고 합니다. 새사람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새사람을 만들려는 노력은 공산주의든 나치즘이든 수많은 유사종교든 다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인위적인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든 교육을 통해서든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든 인간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다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스탈린은 혁명을 위해서 자기 인구의 수천만 명을 죽였습니다.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국민을 숙청하면 나라가 변하고 새로운 인간을 창조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바라던 새로운 인간은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즈도 마찬가지에요. 그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인간을 바꾸기 위하여 여기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수백만 명을 숙청했는데 그게 바로 킬링필드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했다고 하는 이십세기에 이러한 일을 했다는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거듭남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을 혼동시킵니다. 신앙의 초보자들에게는 거듭남이라는 단어처럼 애매모호한 것이 없습니다. 니고데모만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오늘날 내가 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요한복음 3장을 아무리 뒤져도 거듭나야 된다는 것은 알지만 사람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거기에 대한 해답은 3장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표현이 틀린 게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되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처럼 심오한 변화를 위하여 한두 가지의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차라리 오늘 본문 말씀이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29절에 예수님은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내게 배우라 - learn from me’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사람들이 주목해야 될 성경구절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됩니다. 예수님의 멍에. 멍에란 원랜 소에게 씌우는 것입니다. 주인이 소를 부리기 위하여 그 어깨에 멍에를 메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부리기 위하여 당신의 멍에를 우리에게 지워 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멍에에요. 왜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배워도 그 배움이 도움이 되지 않느냐. 예수님의 멍에를 메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면 배워집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 밖에도 성경말씀 잘 아는 사람들 많아요.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알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알지는 못합니다. 교회 밖에도 신학적인 지식 있는 사람들 많아요. 그들은 신학을 알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을 알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기 위한 중요한 조건은 먼저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리고 배워지는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 중에는 ‘나는 멍에가 싫어요!’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무리한 요구를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고 내 멍에는 어떻다고 하셨습니까. 쉽다고 하셨습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네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다른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너희가 자신을 구원하라든가 변하여 새사람이 되라 이런 요구를 하신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쉽게 납득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님은 떠나가셨고 우리는 눈으로 그분을 뵐 수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목적을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사람이 성경말씀을 건너뛰고 신비주의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신비주의가 범하는 실수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건너뛰고 신비주의적인 방법으로 직통으로 예수님에게 배울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얘기냐. 이미 성경을 읽는 분들은 많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의미로써 성경을 읽어야 됩니다. 그저 성경을 읽지 말고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께 배우라는 얘기입니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그렇게 하노라면 자연스럽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멍에를 메고 애수님으로부터 배우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거듭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조건입니까?’ 그건 못된 질문입니다. 우리가 부모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구원에 연결시키는 사람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부모님 말씀 순종하는 게 아니지만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부모님이기 때문에, 옳은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당연히 순종하지요.

스승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어느 누구도 구원에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스승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지만 배우기 위하여 유익하기 때문에 스승의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멘토를 찾고 스승을 찾고 자기개발을 위한 많은 서적을 탐독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구원에 연결시키지 않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구원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입니까. 만일 구원과 직결되지 않는다면 안 배워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말씀하셨어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그 집이 교육일수도 있고 사업일수도 있고 가정일수도 있고 사람마다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이루려고 하는 차원에서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분다는 사실이에요. 인생의 시련 · 괴로움 · 시험이 없는 사람이 없는데 아무리 집을 잘 지어도 이러한 시험이든 시련이든 이런 것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람이 있고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 그 차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느냐 무시하느냐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현실적인 이유는 없습니다. 현실적인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건너뛰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말이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로부터 배운다는 뜻입니다. 

저는 사람이 그리스도처럼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고 또 불필요합니다. Imitation of christ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개념은 중세 신비주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것은 실제로 예수님처럼 되리라고 믿고 말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는 어떤 신비적인 신앙을 말한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예수님 말씀이 옳다고 믿어야 됩니다. 작은 말씀이라도 지나치지 않고 내 생각이 다르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고 두 번째로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해야 됩니다. 고개 숙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순종할 의사가 있어야 됩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이 바로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높이는 길이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마음에 쉼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 오늘날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 많이 있는데 그들은 더 놀면 쉼을 얻으리라고 생각하고 휴가를 더 얻으면, 여행을 가면 쉼을 얻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여행가서 스트레스 받고 돌아와서 더 피곤합니다. 가족들에게 시달려서 더 신경 씁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가족 다, 어르신까지 다 모시고 유럽에 갔는데 애는 아프지, 어르신은 피곤해서 걷지 못하지 저녁에는 한국음식을 먹어야 되지 이 모든 것을 하느라고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도대체 여행을 즐긴 게 아니고 고역이었어요. 그래서 집에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고 하는데 우리가 쉼을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무엇을 하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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