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엇을 위한 아픔인가? (고후 7:8-12)

첨부 1


무엇을 위한 아픔인가? (고후 7:8-12)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편지한 것은, 남에게 불의를 행한 사람이나, 불의를 당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여러분의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환히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요? 당연한 질문이어서 대답이 곤란하지요? 사람의 육신의 생명은 밥을 먹어야 살 수 있지만 영의 생명은 ‘보람’을 먹어야 삽니다. 내가 하는 일이 보람 있다고 여길 때 우리는 신나게 일할 수 있습니다. 태안반도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밥을 굶어도 불평없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뿌듯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람’을 ‘의미’ 혹은 ‘뜻’이라고 바꾸어도 상관이 없을 겁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가 풀려난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의미에의 의지”(will-to-meaning)라 했습니다. 그가 죽음의 캠프에서 끝까지 강제노역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만큼 가족들의 고통이 줄어들 것이라는 자기 암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무의미한 고통을 의미있는 고통으로 바꾸었기에 열악한 상황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날이 차가워지면 우리는 노숙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추운 지하보도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주 반 병과 담요라 하지요? 하지만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살아야 할 의미요 보람입니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뿌듯함을 느낄 때는 ‘내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입니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Estis, ergo sum). 사티쉬 쿠마르가 가르쳐준 이 말처럼 삶의 속살을 잘 드러내는 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큰 고통은 좋았던 관계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나의 있음의 근거였던 ‘그대’가 나로부터 멀어질 때 우리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애타는 마음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 18개월이나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가 영혼으로 낳은 자식들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에베소로 떠난 후에 들어온 전도자들은 사람들의 가슴에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심을 심어놓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친견한 적이 없는 바울이 어떻게 사도일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와 황홀경을 체험했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했습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특별한 체험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유의하십시오. 특별함을 갈구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사탄이 들어오는 통로입니다. 종교의 본질은 그런 특별한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이 곧 은총의 순간임을 알아차리면서 비루한 일상에 하늘의 뜻을 끌어들이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된 지도자들은 자기 체험의 특별함을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스스로 종교 권력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심각한 영적 위기에 처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도 사람이었으니 자신에 대한 교인들의 조롱과 무시도 가슴이 아팠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그들이 예수의 정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원래의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 고린도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도는 한 교인으로부터 극렬한 공격과 모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참담한 심정으로 다시 에베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격정적인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고린도교회에 보냈습니다. 이 편지는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망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직면한 영적 위기는 목의 가시가 되어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그는 디도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냐 지방까지 내려가 디도를 만났습니다.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가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닫고 바울을 진심으로 그리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 질정

모든 오해가 풀리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엄하게 꾸짖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혹 어떤 이가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닌가? 바울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신의 절박했던 심정을 새로운 편지를 보내 설명하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그는 서신을 통해 앞서 보냈던 편지가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더라도 자신은 후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금은 그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꾸짖는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꾸짖지 않는다는 것은 애정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꾸짖음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은 한국교회가 꾸짖음을 잃은 까닭을 자본주의적 사고에 물들어 있는 이 시대의 ‘더러운 영들’과 야합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들, 주변화된 사람들에게 봄볕처럼 따스하게 다가가셨지만, 종교적 기만과 위선에 빠진 이들에게는 준엄한 칼날이 되어 다가가셨습니다. 

주님은 겉은 깨끗해 보이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가차없는 언어로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꾸짖는 분이십니다. 더러운 영을 꾸짖지 않는 영은 거룩한 영일 수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꾸짖었던 것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 복음을 저버린 데 대한 질책이었습니다. 고마운 것은 그들이 바울의 진심을 알아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일로 인한 마음 아픔은 우리 영혼을 삭막하게 만듭니다. 우리 마음은 이런저런 일들로 늘 번잡합니다. 옛 성인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풍부한 공간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고, 마음 속이 번잡한 것은 육체적인 염려를 나타낸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심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찬송가 56장 2절 후렴을 떠올립니다. “세상 걱정 면하고 오늘 쉬게 하소서.”

세상 걱정이 없을 수는 없지만 거기에 붙들리다보면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병, 곧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 걱정은 자꾸만 주님 앞에 내려놓고, 먼저 하늘의 뜻을 구하십시오. 우리 삶이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삼아 재구성될 때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걱정 근심은 슬그머니 사라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던 허깨비는 동틀녘이 되면 황급히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10)

질정叱正이라는 단어를 아시지요?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말입니다. 질정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영혼이 클 수 있습니다. 칭찬만 기대하는 사람 곁에는 아첨꾼만 모여들게 마련입니다. 질정을 싫어하는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고난에 의해 더 고통스러운 징계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4세기의 독수도사 에바그리오스(Evagrios the Soritary)는 “세탁하는 사람을 피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두드리고 짓밟고 펴면, 당신의 옷은 깨끗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변화

질정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은 변화입니다. 참된 스승은 꾸짖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꾸짖음은 ‘변화시키는 사랑’(transforming love)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잘못을 꾸짖어줄 사람이 없는 이입니다. 바울 사도의 꾸짖음 덕분에 고린도 교인들은 새로운 삶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마음 아파함(godly sorrow)을 통해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솔직한 해명),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11b)

고린도 교인들은 다시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일에 열성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쿨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릇된 것에 대해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 안에서 만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고린도 교회는 깨어있는 교회, 사랑이 숨쉬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성경이 언급하는 사랑은 대개 ‘아가페Agape’입니다. 이것은 노력 없이 저절로 찾아오는 어떤 호의의 감정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가페는 우리가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나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려는 의지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아가페는 연약하고 수동적인 사랑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고 세우려고 애쓰는 사랑”(Agape is love seeking to preserve and create community)이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아가페는 모든 생명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아가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고, 우리 형제 자매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생각없이 편리한 대로 살아가는 삶이 지구에 가하는 폭력임을 깨닫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런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했기 때문입니다.

• 믿음의 보람

이천의 냉동창고에 불이 나서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출된 기름으로 생계의 터전을 잃은 태안의 어민들이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삼성중공업이나 현대오일뱅크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자본은 생명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이윤창출만이 至高至善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사랑은 인간을 비인간의 자리로 내모는 현실에 대해서 저항하는 데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 분노할 줄 모르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홀로 자족한 종교는 신의 무덤일 뿐입니다.

믿음생활이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뜻을 알고 사는 것 아닐까요? 그저 마음 편하고, 물질적으로 넉넉하고, 건강하게 살면 잘 사는 겁니까? 개미귀신이라는 벌레가 있습니다. 흙이나 모래에 개미지옥이라는 구덩이를 파고 그 밑에 숨어 있다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개미 따위를 잡아먹는 흉측스런 놈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지어졌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게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명주잠자리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여름이면 산기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인데, 머리는 검은 빛이고 몸통과 날개는 노란빛을 띄고 있습니다. 하늘하늘 나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명주잠자리의 유충이 바로 개미귀신입니다. 개미귀신이 탈바꿈하면 명주잠자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느 정도 개미귀신을 닮았습니다. 그것이 몸에 갇혀 사는 인간의 슬픔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탈바꿈을 하면 새로운 존재로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 사람이고, 그 사람이야말로 영생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일에 매여 애면글면하다보면 우리 영혼은 점점 파리해지고, 작아져 마침내 질식하고 맙니다. 

역사의 비극은 잗다란 영혼들이 높은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삶이 힘겹더라도 세상의 염려를 내려놓으십시오. 조금 배고프면 어떻고, 투박한 옷 입으면 어떻습니까? 차라리 하나님의 통치에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그때 우리 영혼에 날개가 돋아나 우리는 자유의 새 하늘을 마음껏 날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우리를 살맛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의 영혼에 날개가 돋아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