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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느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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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느 1:1-5)

새해를 맞이하면서 저에게는 중요한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올 한해 “신앙의 부흥과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도 108년의 역사를 바탕으로 “제 2의 성장과 변화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음의 생각과 바램만으로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오래된 집일수록 자주 손을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래된 집일수록 낡아 허물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년수가 쌓이고, 교회생활의 경륜이 붙으면 붙을수록 우리의 신앙은 화석화되고, 형식화되어 쉽게 허물어 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신앙의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올 한해 성장과 변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며,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부흥과 은혜를 경험하고, 교회적으로도 성장과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오늘부터 느헤미야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느헤미야서는 포로후기에 기록된 성경으로 주제와 기록 목적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건축과 신앙의 개혁운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개혁하고 재건하며, 성전 예배중심의 신앙생활을 회복하는데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내 자신의 신앙생활 가운데 무너져 버린 것들, 그래서 폐허처럼 변해버린 것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가 무너져 영적으로 폐허가 된 모습, 부지런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게으름으로 인한 충성의 폐허, 하나님과 교제가 무너져 버려 기쁨과 감사가 사라진 폐허의 모습, 도덕적 타협의 폐허, 음욕의 폐허, 그리고 반항과 같은 폐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으로 무너져 폐허가 되어 버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다시 영적인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느헤미야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가 해방되어 돌아올 때, 제3차로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에서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있으면서 부유하고 평안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편에는 늘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국 예루살렘으로부터 그의 동생 하나니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고국 땅 예루살렘의 형편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들려온 고국의 소식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성이 황폐되고,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들은 다 불 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믿음은 땅에 떨어져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예루살렘성이 무너져 있고, 성문은 불타버린 채로 방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충격적이고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벽이 무너진 것이 뭘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냐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예루살렘 성벽은 다른 성벽 보다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벽 안에는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은 완전히 무너졌던 것을 1차 귀환한 스룹바벨에 의해 어렵게 다시 건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벽이 없는 성전은 언제 약탈될 지, 또 다시 다른 나라에 의해 불타버릴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된 것입니다. 성전의 위기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영적인 성벽이 무너지면 우리는 영적으로 위험에 노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온갖 악한 것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영적인 성벽이 무너져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성벽이 무너졌듯이 오늘 날 우리 세대에도 점점 무너져 가고 있고, 이미 무너진 것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개인의 양심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부모의 권위, 스승의 권위, 어른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회 정의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군대의 기강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경제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기쁨도 무너지고 감사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다른 것은 다 무너져도 신앙의 성벽만은 무너져서는 안 되는데, 이것마저도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성벽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성벽이 무너지면 감사도, 행복도, 가정도, 사업도, 직장도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성벽이 무너지면 다름 아닌 사단이 내 마음을 점령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내 마음을 점령하면 기쁨이 사라지고 불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는데 무슨 일이 형통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 신앙의 성벽을 한번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신앙의 성벽은 든든합니까? 나의 신앙의 성벽은 무너진 상태는 아닙니까? 아니면 무너져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의 성문은 소실되지는 않았습니까? 그리고 혹시 우리 가정, 믿음으로 세워진 우리 가정은 지금 무너진 상태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이지만 혹 삶이 무너진 상태가 아닙니까? 

이러한 상태를 자세하게 점검하고 다시 영적인 회복과 재건을 위해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이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어떠한 형편에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신앙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정직한 물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현대인의 영적인 커다란 위기는 자기 상황에 대한 질문, 자기 성찰에 대한 질문을 상실한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떠한 형편에 있는가? 내 영혼의 모습은 어떠한가? 내 신앙은 지금 어떠한 상태 속에 놓여 있는가? 내 가정은 지금 어떠한 형편에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 같은 자기 자신의 형편에 관한 정직한 질문을 먼저 던져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폐허와 어려움과 곤고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기피한 나머지 이러한 질문을 내심 꺼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 문제가 전혀 없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 영적 성찰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형편을 물어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어느 날 유명한 R. A. 토레이 목사님에게 어떤 부인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부인은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아무래도 진리가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진리를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토레이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정말 진리를 보기 원합니까? 진실을 원합니까? 그렇다면 이런 기도를 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보여 주십시오. 먼저 나 자신의 적나라한 인생의 모습을 한 번 보기를 원하나이다. 내 영혼의 모습을, 내 신앙의 모습을, 나의 가정의 영적인 모습을 보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무도 자기 자신의 무너진 모습, 폐허가 된 참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회복을 열망하지 않습니다. 질병을 치료하려면 질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신앙의 재건은 이처럼 정확한 자기 진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런 열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진단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진리 앞에 나왔고, 자기의 모든 것을 말씀 앞에 내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깜짝 놀랄 만한 자기를 발견했습니다. 

롬 7: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 롬 7:18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나”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 아래서 이렇게 자기를 정확하게 진단하기 전에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나는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요, 도덕적으로 사람들에게 약점을 잡힐 만한 아무 부족함도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진단해 보니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재건은 먼저 정확한 자기 진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4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이 무너진 채 방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앉고 맙니다. 무너진 성을 생각하면서 잿더미로 변해버린 예루살렘 성을 생각하면서 울기 시작합니다. 수일을 울고 슬퍼하며 가슴아파하며 애통해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고통 때문에, 자기자신의 연민 때문에 많은 고민도 하고 울기도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하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7: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계기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들이 이 땅에서 하는 근심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게 하는 근심입니다. 그리고 세상 근심이 있습니다. 이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많이 해야 하지만, 멸망에 빠지게 하는 세상 근심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많은 고민을 하고 삽니다. 세상 고민과 세상 근심은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신앙 재건에 대한 고민, 내 가정의 영적 거룩한 회복에 대한 고민, 교회의 영적회복을 위한 고민으로 느헤미야처럼 수일을 울고, 슬퍼하며 고민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눅 7:3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함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는 울어야 할 시간에 울지 않고, 춤추어야 할 시간에 춤추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세대를 우리 주님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무너진 신앙을 보고, 무너져 가고 있는 신앙을 보고 당연히 울어야 하는데, 전혀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울어야 합니다. 고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해도 좋다는 이 구원을 이루는 근심, 내 영혼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애통하는 이 창조적 근심과 고민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재건은 창조적 고민과 창조적 슬픔을 통해서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4절 하반절부터 5절 말씀에 보면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의 무너짐을 애통하게 여기며 하나님께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재건의 위대한 출발은 한마디로 기도에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고민하며 울고 슬퍼하다가 마침내 그것이 기도로 변합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울고 고민하며 슬퍼하다가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는데, 느헤미야의 경우는 울고 슬퍼하며 고민하며 근심하다가 그것이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느헤미야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닙니다. 금식하며 애통하며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답답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고민스러운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기도의 사람인 윌리엄 부스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스 선생님, 선생님의 그 위대한 기도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윌리엄 부스는 대답하기를 “기도할 때 나는 이 기도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합니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지금 이 기도에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십시오. 사활을 걸고 기도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활을 건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느헤미야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왕의 술 맡은 관원입니다. 왕을 독살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술이나 음식에 독이 있는가를 살피는 직책입니다. 참 중요하고 높은 직책입니다. 이 직책을 감당하려면 왕과 함께 음식도 같이 먹어야 하고, 왕의 식사 중 대화의 상대도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음식을 전폐하고 수일동안 기도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금식하며 기도한 것입니까? 

우리는 때로 기도 생활 할 때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느헤미야는 도무지 자기 직책상 금식하며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을 더 의뢰하면서 그는 수 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신앙 회복에는 이런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영적인 성벽을 어떻게 재건할 수 있습니까? 내 힘으로 무너진 가정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많이 우리는 경험해 보지 않습니까? 내 손으로 안 되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습니까?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늘의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울었고, 수일을 슬픈 마음으로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만이 꽉 차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느헤미야 선지자처럼 영적회복에 대한 거룩한 열정으로 가득차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눈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벽을 깨웁시다. 매일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이 지정하신 예루살렘의 성들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러나 때로 어려움 속에서 훼파 되고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처럼 자기 형편을 살피는 자기 진단과 거룩한 고민과 애통, 그리고 간절한 기도로 영적인 성벽을 다시 재건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성벽, 말씀의 성벽, 헌신의 성벽, 교회를 생각하는 성벽, 봉사의 성벽, 전도와 선교의 성벽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느헤미야서를 공부하면서 영적인 성벽을 다시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가정과 내영혼의 성벽이 되어 주시는 복된 한해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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