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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고 죽는 사람들 (고후 5: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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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고 죽는 사람들 (고후 5:13-21)
    
제가 사랑의 교회 수양관에서 제자훈련을 받을 때에 ‘광인론: 당신은 미쳐야 한다’ 라는 주제로 강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자훈련을 시작하신 사랑의 교회를 설립하시고 국제제자훈련원을 만드신 고(故)옥한흠 목사님의 첫 시간 첫 강의였습니다. “사람 키우는 것이야말로 목회의 참 가치요, 그 본질 하나에 생명을 걸어도 세월이 짧다”는 요지였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온통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미친 세대를 감당하려면 우리도 주님을 위해 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광인론을 가르치시던 옥목사님은 예수님도 미쳤다는 말씀을 들었고, 사도바울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좋은 의미로 제자훈련에 미치라고 하였습니다. 제자훈련이란 느슨한 마음으로 되지 않으니, 특단의 결단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옥목사님이 한 공식을 말씀하였습니다. 그 때 메모해놓은 글을 보았습니다. 

신념(Belief) +정열(Enthusiasm) +비전(Vision) = 미침, 예수를 위해 미치라 (to be crazy for Christ)이라고 했습니다. 

신념이란 이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도 좋겠다는 확신입니다.  정열이란 식을 줄 모르고, 지칠 줄 모르는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소원입니다. 다른 말로 정열이란 뜨거운 가슴으로, 끝을 보고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입니다. 비전이란 환상이요 꿈이요, 이상입니다. 신념의 사람, 정열의 사람, 비전의 사람은 예수를 위해 미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한 시대의 광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광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대의 멸망기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받았습니다. 렘20:9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신들린 사람이요, 신 지핀 사람의 고백입니다. 

학생 시절에 예레미야서를 읽는 중에 어찌나 가슴이 뜨거워지던지, 이 말씀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도 수많은 박해와 환난으로 인하여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않겠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하면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고, 골수에 사무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외칩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거짓 선지자들이 핍박합니다. 때로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히고, 우물에 갇히고 여러 날 굶어야 하는 극한 상황에 몰립니다. 어떤 때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그만해야 한다고 예언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고, 골수에 사무치는 진통이 옵니다. 이것이 미친 사람의 증상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은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도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미쳤다는 말을 듣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요, 그쯤 되어야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접어들면서 집안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다니자, 가족들을 예수가 이상해졌다느니, 완전히 돌아버렸다, 이젠 미쳤다는 말을 드러내놓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정된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데, 그 기준에 넘치거나 모자라면, 이상한 사람, 돌아버린 사람,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막3:20-21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마을로 돌아오셨고, 한 집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가족이 있었고, 친척이 있었습니다. 친척에 대하여 자세한 말씀을 하지 않았지만, 친척들이 예수님이 동리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몰려와서 예수님을 붙들고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미쳤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말씀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스스로 미쳤다는 말을 하는 사도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해주는 것인데, 여기서 사도바울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미쳤다는 말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13)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을 미쳤다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교회와 성도들을 두고 온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정신이 온전하다는 말은 제정신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미칠 수 있었고, 온전한 정신, 똑똑한 자세로 제정신 차리고 교회와 성도들을 돌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총독 베스도라는 사람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총독이 사도바울을 심문하였습니다. 바울은 거침없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이 때다 싶어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게 된 것을 간증합니다. 

행26:24-25에 보면,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사도바울이 미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복음전파를 위하여 수없는 매를 맞고, 죽을 고생하면서 헌신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바울의 일생은 인간적인 정신을 가지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쳤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거북한 말씀이지만, 광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신념이 있습니까? 불타는 정열이 있습니까? 결코 버릴 수 없는 비전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는 미친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세상이 말리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살아가십니까? 인생을 참으로 잘 살았습니다. 인생을 사는데, 우리는 두 번도 아닌 오직 한번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는 삶을 정리하고 좋은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살아가든지, 그 일에 미쳐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했는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아는 것도 많습니다. 그는 팔방미인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미쳤다는 말을 듣지는 못합니다. 그래 가지고 무슨 인생을 잘 살았느니, 못 살았느니 할 것입니까? 무엇 하나는 끝낼 정도로 잘 하였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고대의 어떤 왕이 나라 안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찾아내 상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맨 먼저 많은 재산을 가진 한 재력가가 추천되었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의술을 갖춘 사람도 추천을 받았고, 법률 분야에 높은 지식과 지혜를 갖춘 인물도 천거되었습니다. 다른 후보는 경제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다. 그 밖의 많은 훌륭한 인물들이 왕궁으로 모여들었으며, 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가려내기란 누가 봐도 쉽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후보가 왕 앞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그 사람은 여자였는데, 나이를 먹어서 머리가 허연 백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은 아직도 지혜와 이해심과 사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왕의 수석 신하가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지금까지 모든 훌륭한 사람들의 이력을 보고 들으셨습니다. 이 여성이 그들 모두를 가르친 학교 교사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왕관을 벗어 그녀에게 씌워 주었다고 합니다. 글렌 반 에케렌의 글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세기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면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1869. 10. 2 - 1948. 1. 30)라는 분과, ‘마더 테레사’(1910. 8. 26- 1997. 9. 5) 두 사람을 들고 싶습니다. 간디의 이름이 마하트마 간디가 아닙니다.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였습니다. 테레사의 세례명은 아그니스요, 마더 테레사가 아닙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은 테레사를 부를 때 어머니라는 칭호를 붙여 ‘마더’ 테레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고아의 어머니였고, 모든 심령의 어머니였습니다. 시집도 가지 않는 처녀인데, 마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간디는 인도인들이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마하트마 간디”라는 부릅니다. 인도의 문호 타고르가 간디를 찾아와서 “마하트마(Mahatma) 라고 칭송하는 시 한 편을 드렸는데, 그 후로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마하트마, “위대한 영혼”이라는 최대의 존경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가 극우파 흰두교도의 총탄에 쓰러졌을 때, 간디가 없는 인도는 희망이 없다고, 간디와 함께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250만 명이 따라 죽었다고 하는데, 힌두교와 이슬람교도 간의 유혈충돌로 당시 수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받을 사람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큰 꿈을 갖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가족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조금 더 확대하여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고, 기억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큰 일만 추구하고, 큰 일만 찾아다니지 말고,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고,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멀리 가서 이방 사람들 구원한다고 하는 것도 좋지만, 내 집 근처 다니면서 영혼을 살려내야 합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기 원하십니까?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14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강권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쉬네코”라고 하는데, ‘포위한다’, ‘억압한다’, ‘강요한다’ 입니다. 이 말은 둘러싸고 밀어낸다는 것으로, 불가항력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엄청난 힘에 눌리고 그 힘에 밀려 필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능력이 우리의 일생에 위대한 활력을 주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지 선교회를 조직하고 가장 중국인으로 살아간 선교사입니다. 선교 역사에 있어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선교사입니다. 그는 중국인의 옷을 입었고, 중국 사람으로 머리를 깎았고, 중국말을 하는데, 중국인들보다 더 중국어를 잘 하였습니다. 한문을 쓰고, 한문으로 성경을 번역하고, 일생 중국인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선교사들을 면접합니다. 해외로 나갈 선교사들을 면접합니다. “왜 선교사로 나가려고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나섰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들은 선교사로 나가게 되면 핍박을 받기도 하고, 또 죽을는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가진 그런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는 낙심하게 되고 되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이 말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빚을 졌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갚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에 붙잡혔다는 생각에 가득차고,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만이 최선의 삶이요, 우리가 무엇을 하여도 주님의 사랑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제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야겠습니다. 

15절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안드류 머레이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고백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만 말하지 말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내가 죽었다고 하는 사람만이 온전한 위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주님으로 만족해야 하고,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온전한 주인입니다. 그럴 때에 온전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죽으실 때에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 또한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하여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의 삶의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이시기에, 주님을 위하여 목숨 걸고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기 원하십니까? 주님, 예수를 위하여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인생을 제대로 살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16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해석이 필요한 구절입니다.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좀 어려운 번역입니다. 새번역성경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을 따라”라고 했는데, “육신의 잣대로”라고 했습니다. 좀 더 명확해집니다. 

공동번역개정판에는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적인 표준으로” 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예수님과 교회를 보지 말아야 합니다. 

17절은 암송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부활에 참여하면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은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또 하나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구원을 누릴 사람이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새로운 삶,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목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기에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지나보내야 하는 옛 것을 붙잡고, 그것에 놓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여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나보내야 하는 이전 것들은 멀리 던져버리고 다시는 쳐다보지 말고,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항구를 떠나고 벗어나고 싶습니까? 항포구에 매어놓은 닻줄을 끊어야 합니다. 닻줄을 풀지도 않은 채 아무리 노를 저어봐야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피난 시절에 해주 근처에 배를 타고 월남하는데, 항구에 매어놓은 닻줄을 풀지 않고 캄캄한 밤중에 배를 젓는데, 날이 훤하게 밝아오는데, 섬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항구에 있었습니다. 닻줄을 풀지 않고 노를 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닻줄을 풀어놓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안 된다, 못한다, 내가 뭐, 그렇지, 부정적인 닻줄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 이전의 화려한 무대를 내려놓아야 저 넓은 바다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18-19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저 세상에 나가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20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권면하시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절이 되어 화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고 죽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절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대사들이 되었습니다. 사절이란 사신, 대사를 말합니다. 보냄을 받은 자, 대표하는 사람,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어야 하는 사신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보내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 그리스도처럼 죽고, 주님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사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대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살았고, 죽었다고 고백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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