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창 17:1-8)

첨부 1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창 17:1-8)


사도신경은 가장 핵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둘째는 성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셋째는 성령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려면 이 네 가지 믿음의 고백을 잘 알고, 정확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도신경의 믿음의 고백 중에 성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살펴보면, 또한 그 내용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입니다. 둘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그리고 셋째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잘 알고 정확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글자 그대로‘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체험했고, 또 이것을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렘 32:17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셨고, 마 19:26을 보면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점을 믿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다고, 다 하시는 분은 아니시라는 점입니다. 아니 하실 수 있지만, 결코 하지 못하시는 점이 있으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히 6:1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어기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실 수 있지만 결코 하지 못하시는 점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약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깨달았고 또 고백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편 기자는 시 135:6에서 이렇게 노래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뜻 가운데 모든 일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그 모든 일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점을 깊이 깨닫고 마음을 다해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이 어떻게 표현되었을까요?

히브리어 원어로 ‘엘 샤다이’(El Shaddai)입니다. 여기서 ‘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샤다이’라는 말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뜻하는 말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샤다이는 ‘어미가 젖을 가지고 아기에게 부어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기가 배가 고파서 웁니다. 누구도 달랠 수가 없습니다. 아빠가 자기가 먹던 음식을 나누어 줄 수가 없습니다. 돈을 줘보고 장난감을 줘보고 업어도 보고 안아도 보지만 달랠 수가 없습니다. 이 때 오직 엄마가 그 따뜻한 가슴으로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만 배고파 보채는 아기를 달랠 수가 있습니다.
엄마의 젖은 아기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기를 달랩니다. 아기를 살립니다. 아기를 행복하게 합니다.

이런 뜻에서 신학자들은 엘 샤다이를 ‘모든 것을 충족하게 공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체험

오늘 본문에는 이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처음 만난 사람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1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아브람이 99세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아브람을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라는 말씀입니다. 왜 아브람이 구십구 세라는 점을 밝히고 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아브람의 생애에 하나의 전환점이 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 구십구 세는 아브람에게는 가장 힘들고 절망적인 시기였습니다. 

창 12장을 보면 아브람이 칠십오 세 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저가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람은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고향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이주한 뒤에 세월이 흘러가는데도 그 약속은 뭐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내 사래는 아이를 잉태할 수 없을 나이가 됐는데도 여전히 아이가 없는 상황입니다.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땅에 왔는데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이리저리 떠 돌아야 했고, 급기야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피난을 다녀와야 했습니다.

이러는 중에 아브람이 조급한 마음에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이 지난 나이 팔십오 세 때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래 몸종인 하갈을 첩으로 들여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가정 내에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가 아브람의 나이 팔십육 세입니다.

창 16장 마지막 절과 본문 17:1 절 사이에는 13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있습니다. 이 13년이라는 세월이 침묵처럼 흘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도 진전이 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약속이 뭐하나 이루어 진 것도 없이 세월만 강물처럼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아브람의 나이가 구십구 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이름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라는 이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때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뒤에도 문제가 생기면 자기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기근이 생기면 애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조카 롯에게 문제가 생기자 군사를 이끌고 가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때가 되자 자식을 얻으려고 첩을 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지켜만 보고 계셨습니다. 이제 아브람이 정말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13년 동안 침묵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에야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아직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로 볼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출 14:13 이하를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뒤에 바로의 군사가 추격해 옵니다. 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저들이 무엇인가 하려고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려는 일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장면을 본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다행히 곁에 수상구조원들이 있어서 빨리 발견됐습니다. 그런데 구조대원들이 그냥 보고만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허우적거리던 사람이 지쳤는지 꼬르륵 하면서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제 서야 구조대원들이 그 사람 뒤쪽으로 서서히 다가가서 구조를 하는 것입니다. 허우적거릴 때 구조하기 위해 다가가면 구조는커녕 구조대원까지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무엇인가 우리 힘으로 해 보려고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무엇인가 우리 생각대로 해보려고 잔꾀를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약속의 하나님을 만났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미 여러 차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미 나이 칠십오 세 때 고향에서 자기를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롯과 분가한 뒤에 자기를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또한 멜기세덱에게 상속을 하려고 했을 때 자기를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때 아브람이 만났던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람은 세 차례 여호와 하나님과 만나서 약속을 재차 확인 받았습니다.

아브람이 이 약속의 하나님을 만났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그 약속을 이루어보려고 몸부림칠 때마다 다시 약속의 하나님만 만났습니다. 아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을 하실 뿐 아니라 그 약속도 친히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믿고 무엇인가를 시작했는데 계속 실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어떤 일을 추진하고 있지만 세월이 흘러도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금년에는 우리 모두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꼭 만나시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람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5절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이란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많은 무리의 아버지’, ‘큰 민족의 조상’이라고 부르셨고, 또 그렇게 부르라고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내 사래를 ‘사라’라 부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달랑 아들이 하나입니다. 그것도 첩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 하나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이가 아흔 아홉입니다. 아내 사라도 이미 나이 팔십구 세여서 생리가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자식 하나도 낳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라니요... 그런데 사라라니요...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뒤 사람이 달라집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됩니다. 사래가 사라가 됩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 없던 사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체험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빌 4:13을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와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자기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금년에 여러분도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뒤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선 그의 기도가 변했습니다. 창 18장을 보면 저 유명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하게 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서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특별합니다. 마치 하나님과 흥정하듯 기도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오십 명이 있으면 용서하셔서 심판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지 못할 것 같으니까 수가 줄어듭니다. 사십 오명, 삼십 명, 이십 명,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십 명까지 줄어듭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심판을 하실 수도 있고, 또 원하시면 용서하실 수도 있는 분이시라는 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기도는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구체적인 고백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을 기도가 달라집니다. 그 기도가 정말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금년에 여러분의 기도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의 기도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의 순종이 변했습니다. 창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뜻밖의 명을 내리셨습니다.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명은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신 뒤에 겨우 하나 얻은 아들입니다. 만일 이 아들을 번제로 바친다면 이제 이 나이에 어떻게 열국의 아비가 되겠습니까? 게다가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찌 이방신처럼 아들을 직접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납득할 수 없는 명이지만 순종했습니다.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님께 왜 그렇게 하시는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다는 것을 저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철저한 순종은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의 구체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순종이 다릅니다. 철저하게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명을 말없이 따를 뿐입니다. 순종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으로, 입으로, 그리고 삶으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