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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에덴동산에서 새예루살렘까지 (계 2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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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새해 첫 주일입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구분이지만, 한 해를 새로이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결심을 하는 절호의 기회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아갈 방향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다시 말해 어떤 비전을 갖느냐 하는 것은 새해 우리의 삶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분수령이 됩니다. 

성공적인 비전을 소유하는 데 필요한 것은 움직이지 않는 불변의 기초입니다. 특히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리더의 역할은 각 개인의 관점을 초월하는 근원에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리더가 의존해야 하는 궁극적 근원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의 근원, 우리의 사명, 그리고 우리의 운명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GPS(위성항법장치)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1993년에 시작된 ‘범지구 위치결정 시스템’입니다. 전 세계 5개의 지상국으로부터 미국 공군에 의해 운영되는 24개의 위성들의 네트워크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미국 정부는 120억불이라는 자금과 수십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손바닥 크기의 GPS는 지구상 어디를 가든지 1~2미터 내에서 우리의 경도와 위도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이 조그만 휴대용 장치로부터 나오는 명료함은 그 근원이 기기의 내부에 있지 않습니다. 이 수신기는 지구 주위를 선회하는 방대하고 복잡한 위성 네트워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GPS는 ‘초월적’ 기준점을 결정하기 위해 4개의 위성들로부터 적어도 4개의 신호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가 추구하는 관점은 GPS처럼 천 미터나 만 미터로부터 오는 관점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치결정 시스템으로부터 오는 영원한 관점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유토피아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며 우리의 위치를 점검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독창적 비전이 어떠한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는 사역에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라며,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비전의 의미를 새롭게 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에덴동산과 새예루살렘의 의미 (= 창조주의 독창적 비전)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성경 66권의 궁극적 배경을 보여주는 본문은 창세기 첫 두 장(창 1-2장)과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계21-22)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그대로의 세상, 즉 원시상태의 죄로 더럽혀지지 않은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간결하고 생생한 인생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구속사(救贖史)의 완전한 시작과 완전한 끝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새예루살렘 성(城)에서 끝납니다. 이 두 곳은 유토피아에서 존재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에덴동산과 새예루살렘은 창조주 하나님의 독창적 비전이 제시된 곳입니다.

성도 여러분!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님은 에덴 동산과 새예루살렘의 주인이십니다. 에덴은 최초의 유토피아 동산이었습니다. 주님은 이곳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명령하셨습니다. 

새예루살렘은 최후의 유토피아 성입니다. 그곳은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주님 약속하시기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계 22:5)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흠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 장소들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두드러지는 두 가지 특징은 인류가 가진 관계적인 능력과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서 나오는 특징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창 1:26).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과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구약의 첫부분인 모세 오경에서 신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은 “사람들을 자기 소유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의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신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완벽한 조화 가운데 인류가 그분과 함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장소를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 살면서 다른 피조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그 사명으로 하나님께 부여받은 권한을 행사하여 그의 돌봄 아래 놓인 세상을 책임 있게 경영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동산으로부터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주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조주의 비전은 예수께서 다시 오심으로 이제 곧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 새예루살렘의 소망을 가지고 달려가는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2. 둘 사이의 깨어짐의 장소의 의미 (= 구속사역에 참여토록 부르심) 

이처럼 하나님과의 완전한 소통과 거주의 완벽한 환경 속에 행복한 삶을 부여받은 아담과 하와는, 참으로 불행하게도 자신의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유일한 금령을 어기고 타락의 어둠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류는 장차 회복된 복락원(福樂園)이 오기까지 ‘둘 사이의 깨어짐의 장소’에서 새로운 계획을 진행시키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즉 ‘구속사(救贖史)라고 부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유토피아의 시작과 끝 사이에 존재하는 ‘깨어짐의 장소’ 입니다. 하나님은 다가올 대단원을 암시하는 진정한 회복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당신께서 창조하신 인류를 통하여 개입하기를 원하십니다.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거대한 사역에 동참하는 새로운 사명을 위임하셨습니다. 인간은 관계를 맺고 다스리는 일 외에 이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광을 얻도록 예정된 그의 백성된 우리를 이토록 불명예스런 세상에 남겨 두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 구속의 사명을 경험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조대로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황공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사역을 위해 땀 흘려 수고할 기회를 바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사명은 완전한 시작과 완전한 종말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그래서 이 사명은 우리가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이 세상 도처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나님 나라의 어떤 모습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안에서, 또한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모습입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분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구속사역에 참여토록 부르십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반역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언젠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후일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행하실 사역을 처음으로 언급한 구절입니다.

그때에 아담은 이 약속에 반응하여 신실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합니다. 아내의 이름을 ‘하와’ 곧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부름으로써, 아담은 그들이 번성하는 가계의 조상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범죄의 결과인 죽음의 저주가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저주로 인해 자신이 궁극적으로 맞이할 현실이 영원한 절망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 새로운 사명을 알리는 전조가 됩니다. 그 사명은 그분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죽음을 뒤집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구속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에덴동산 이래로 하나님이 불러내신 종들은 활동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들은 노아처럼 보잘 것 없고 아브라함처럼 미지의 땅을 향해 떠나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보존하였습니다. 그들이 인류 구원을 위해 내건 기치는 “축복의 통로가 되라” 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 아래 더욱 번성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민족과 지역의 경계를 초월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 시대가 왔습니다. 교회시대의 앞선 주자인 사도 바울은 가장 분명한 언어로 이러한 구조대의 역할을 선언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이와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인 오늘날의 교회에 권한을 부여하시며, 제자삼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할 사명을 가지고 완전한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선두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불러 이 위대한 사역의 현장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소망이요 의미 그 자체입니다! 


3. 종들에게 주시는 비전의 의미 (= 더 나은 중간 단계의 미래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는 지금 두 개의 유토피아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현실이 잘못되어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불만을 가지고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어납니다. 그들은 더 나은 가능성,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바라봅니다. 

리더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혼탁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다스리고, 구조해 나갈 때, 하나님은 각 사람이 추구해야 할 더 나은 중간 단계의 미래들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그들의 가슴 속에 새로운 생각들과 새로운 열망의 불꽃을 일으켜주시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그들의 마음판에 그려주십니다. 

어떤 분은 미혼모들을 위한 쉼터와 처소 마련을 위해 헌신합니다. 어떤 분은 미전도 종족을 입양하는 일에 생애를 걸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축구나 농구를 통해 어린이들을 전도하는 일에 매진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실제로는 중간 단계의 미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를 통틀어 실현된 많은 비전들 중에 하나의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의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는 일에서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원대한 비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 나은 중간 단계의 미래에 대한 비전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이미 하나님의 비전인 것입니다.

느헤미야서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강력한 예를 발견합니다. 느헤미야는 먼 이방 땅에서 조국 이스라엘의 심장부인 예루살렘은 멸망했고 성벽은 허물어졌다는 비보(悲報)를 듣습니다(느 1:1-3). 그는 무너진 가슴을 보듬고 하늘의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며 조국을 구하러 가는 자신의 앞길의 형통함을 구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긴박한 필요를 채워야 하는 그의 소명을 나타내는 첫 번째 분명한 증거입니다(느 1:5-12). 

하나님은 아닥사스다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하심으로 느헤미야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왕의 도움에 대해 그가 재빠른 반응을 보인 것은 그의 비전이 어떠함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건축 기한, 정치적 파급효과 등 재건축 계획을 고심합니다(느 2:5-8). 극심한 반대 속에서도 52일만에 성을 재건함으로써 그의 리더십이 눈부신 성공을 거둔 이면에는 그의 확고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두 달이 채 못되어 우리는 느헤미야의 비전이 실현되는 것을 봅니다. 예루살렘 성이 준공되고 이스라엘 회복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속사의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그의 비전은 더 나은 중간 단계의 미래를 향하여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간은 흘러 느헤미야의 사역을 뒤따르는 다른 리더들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 8장에서는 에스라의 리더십이 표면에 떠오릅니다. 에스라는 이미 학사였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율법을 집중적으로 가르쳐 백성을 부흥으로 이끄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느헤미야의 리더십에 탄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에스라 뿐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 사도들, 그리고 교회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의 종들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자신들의 비전을 품고 헌신했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비전은 새예루살렘을 완성하기 위한 모자이크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느헤미야의 재건 사업은 다가올 영광스러운 새예루살렘을 희미하게 보여줍니다. 느헤미야의 예루살렘은 땅으로부터 위로 세워졌고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새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이며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게”(계 21:11) 빛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느헤미야의 비전은 영원한 비전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독창적인 비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에덴동산과 새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유토피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의 깨어진 장소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 역사에 동참토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전의 근원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결정적인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특별한 부르심이 우리가 살아가는 좁은 구석에서의 구체적인 필요와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폭발적인 힘이 발생하여 주의 종의 마음을 확신으로 가득 채우고, 새로운 비전이 형성됩니다. 

새해 첫주일을 감격스럽게 맞이한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강권하심’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것이 분명합니까? 

감정적인 면에서 볼 때, 저와 여러분이 가진 비전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처럼 느껴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으로 볼 때, 오늘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의 역사에 비하면 그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의 비전은 주님의 전 구속사의 모자이크를 완성하는 일에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 뒤에 오는 일꾼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구속사의 남은 모자이크를 채워가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전의 사람이 되십시오. 가슴속에 터질 것 같은 소원을 품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뛰어드십시오.  

이 과정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비전의 근원이 알파요 오메가이신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은 주님과의 생생하고 적극적인 관계와 그의 말씀으로 충만해진 마음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발견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비전가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할렐루야!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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