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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산 아래의 영적 전투 (막 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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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 아래의 영적 전투 (막 9:14-29)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영적 전투의 현장입니다. 이 전투는 아담 이래 지금까지, 그리고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사탄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모두 불못에 던져 넣은 후 주님이 세우실 천년왕국에 이르기까지 계속 치열하게 진행됩니다. 성경은 이 싸움이 실제적이며 회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악의 영들, 즉 귀신들과의 피흘리는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冑)를 입고 이 거룩한 전투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은 성경에서 귀신에 관한 본문과 마주칠 때마다 건너뛰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현대의 과학만능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인 것 같고 회중들이 받지 않을 듯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복음서, 그 중에서도 마가복음을 읽으면 그렇게 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는 1장부터 계속하여 귀신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후 이들에게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몇 절 내려가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를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귀신들을 쫓아내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3장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메시지를 선포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십니다. 예루살렘 사람들까지 이 사실을 오해할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막 3:22).

마가복음에서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과 귀신을 쫓아내는 내용이 함께 나옵니다. 이 둘은 거의 동의어로서 서로 바꾸어 쓸 수 있을 정도입니다.  

5장에서 예수님은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고, 6장에서 예수님은 또 한번 제자들을 보내면서 메시지를 선포하고 귀신들을 쫓아내게 하셨습니다. 또 7장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본격적인 영적 전투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최측근 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 위에 오르셨고 남은 아홉명의 제자들은 산 밑에서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제자들은 녹초가 되도록 애를 썼지만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때 산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제자들과 논쟁하는 장면을 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귀신을 내쫓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축사(逐邪)는 영적 전투의 대표적 케이스입니다. 본문을 분석하여, 변화산 아래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1. 제자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하였음 (= 우리 혼자 힘으로는 영적 전투에 이길 수 없다) 

18절=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산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먼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는 일에 실패했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의 무능한 모습은 귀신들린 소년의 아버지 입에서 폭로됩니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 장면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아마도 9명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두 번째 측근입니다. 예수님은 최측근만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고, 두 번째 측근들은 뒤에 남았습니다.  

이 순간은 이들이 빛을 발하고 예수님의 명령을 행할 기회였으나 이들은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주님이 명하신 일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없이는 이들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논쟁을 걸어온 서기관들에게도 이들은 허약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우리 혼자 힘으로는 귀신을 내쫓을 수 없고 영적 전투에 무력할 뿐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없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무능한 제자들이지만, 얼마 전까지 그들은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예수님께로부터 부여받아 이미 놀라운 이적을 행한 경험을 가진 자들입니다. 어찌하여 지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비난과 조롱을 받는 영적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아마 제자들은 자만(自慢)과 안일(安逸)에 빠져서 하나님을 간절히, 그리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과 기도의 자세를 갖추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아홉 제자의 실패를 ‘믿음이 없고 기도하지 않은 결과’로 단정지으셨습니다(19, 29절).

여러분,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무능력자들은 제자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의 서기관들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귀신이 아이를 괴롭히는 현장에서 그 아이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채 오직 논쟁만 일삼았습니다(14절). 이것이 무능한 종교인들의 실상입니다. 

오늘 우리 교계에도 구원과 관계없는 쓸데없는 문제로 변론을 일삼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 2:23)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 일을 할 수 없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대도시로 빠져 나가고 소수의 노인들만 남아 있는 농촌 지역에 교회는 낙후되어 있고 목회자는 탈진 상태인 것을 보면 우리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 가난에서 나올 수도 없고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는 현장에서 희망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학교 폭력과 청소년 비행 문제가 매스컴을 장식하기 시작한 지가 오래되었지만, 해결 된 것은 거의 없습니다. 가정이 깨어지고 지역간 계층간의 장벽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중국을 떠돌고 있는 탈북자들의 어린 자녀들이 5만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사정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50만 탈북난민들이 북송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참 무력합니다. 

그뿐입니까? 세계지도를 놓고 살펴보면, 아프리카 전역에 에이즈가 창궐하고, 중동 전역에 폭력이 난무하며, 제3세계 어디에나 가난이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 하나 해결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절감합니다.

빈민가와 폭력이 난무한 곳에서 자신들의 남은 인생을 걸고 헌신하고 있는 우리의 선교사님들은 본국의 교계 지도자들이 그곳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 지금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곳에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요청했지만,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곳에 두 번째 측근을 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혼자 힘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바로 우리의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된 날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능력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의 영광스러운 장소를 떠나 문제투성이인 산 아래로 오십니다. 그리고 문제의 한복판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19절). 

참으로 고마운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부분에 밑줄을 세 번은 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직접 대면해 주십니다.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20절=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굉장한 장면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보자 소년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땅에 쓰러뜨렸고 입에 거품을 물게 했습니다. 

영적 전투장에 나오신 여러분! 우리 모두 능력의 주님에게 우리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고 전적으로 의지합시다. 과거에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능력을 체험하신 분은 그 은사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 바랍니다.  

충전용 배터리를 제때 재충전하여야 되듯이,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은사를 유지하고 더욱 확장해 나가시기를 권면합니다. 


2. 예수님은 곧바로 소년을 돕지 않으셨음 (= 영적 전투에 시간이 걸린다) 

21절=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산 아래에서 진행된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예수님은 곧바로 소년을 돕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치 소년의 병력(病歷)을 캐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경련을 일으킨 소년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년의 아버지를 보고 말씀하십니다. 

“원 세상에!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됐나요? 저러다가 불에도 뛰어드나요? 물에도 뛰어든 적 있나요?”

이 부분을 읽을 때 우리는 당장에라도 본문 속으로 뛰어들어가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아니 예수님, 그런 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저 아이나 얼른 고쳐주기나 하세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을 답답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목회자로서 나는 매일, 언제나 예수님을 재촉하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때로는 답답해 미칠 지경인 적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훨씬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러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우리는 마침내 여기에 필요한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때때로 시간이 걸립니다. 설교의 능력은 설교자 자신이 일으키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회중에게서 모든 귀신을 서둘러 쫓아내지 않으시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 이유는 다 모른다 하더라도, 주님은 세상에서 악을 서둘러 제거하지 않으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계속해서 물어야 하는 첫 번째 질문은 “우리는 과연 그분을 전적으로 믿는가?” 또는 “나는 과연 예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100% 믿고 있는가?” 입니다. 이렇게 물으면 비로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 교회를 바꾸어보려 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교회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겨운 임무만 맡기신 채 손을 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고, 지금도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세상에서 예수님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치유와 구원의 행위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내가 능력 있는 사역자인가?” 가 아니라 “나는 성령께서 지금도 사람들을 예수님의 구원과 능력 있게 연결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가?” 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소년의 아버지는 이렇게 소리질러 말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24절).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기도를 여러번 드려왔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이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 속에 불신앙과 의심의 구름 또한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신앙과 의심이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거기에는 신앙 또한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참으로 황송하게도, 예수님은 이같은 다소 미지근한 신앙 고백이지만 이를 듣자마자 아직도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있는 소년 속의 귀신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할렐루야! 


3. 귀신이 심한 경련을 일으켜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됨 (= 고침 받기 전에 더 나빠질 수 있다) 

26절=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산 아래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배우는 또 다른 교훈은 고침 받기 전에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에게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하자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귀신은 소년에게서 나가면서 많은 해를 끼쳤습니다. 여러분은 귀신들린 사람이 좋아지기 전에 먼저 나빠지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한 설교가 선포될 때 회중 가운데서 계속 경련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귀신은 누군가에서 떠나갈 때 마지막 발악으로 그를 해치려고 하는 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흑암의 영, 세상의 영, 귀신이 자기에게서 떠나길 원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귀신을 친구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귀신을 야망으로 바꾸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휘젓고 다니는 짓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이들은 귀신을 절망으로 바꾸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절망을 점점 편안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복음의 희망을 말하기 시작할 때 이들은 그 희망에 공포를 느낍니다. 이들이 희망을 갖는다면 가장 좋은 친구, 즉 세상의 영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고통을 주기는 했지만 적어도 늘 이들을 위해 옆에 있었습니다. 

이때 경련이 시작됩니다. 설교를 통하여 희망이 선포될 때 경련이 일어납니다. 만일 여러분이 희망을 선포하는 바로 그 설교자라면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듣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다른 설교자가 필요할 거 같네요.” 

또는 이들은 여러분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교회는 지적인 설교에 익숙해져 있어요.” 

이들은 여러분이 희망의 메시지를 포기하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 예수, 예수! 당신이 아는 것은 예수 뿐이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아지기 전에 먼저 나빠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경련이 계속 되도록 놔두십시오. 소년을 예수님께 데려 가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반드시 고치실 것입니다.  

마침내 귀신이 나간 후 소년은 뻣뻣한 상태로 누워 있으며, 모두들 “아이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교회에 대하여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교회가 피곤하다. 성도들이 힘들어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십니다. 허리를 굽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자 아이는 마침내 일어납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이는 누구입니까? 회중이 일어설 수 있도록 회중을 일으키는 분이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올바른 설교의 사역 방향이 여기에서 결정됩니다. 살아 있는 설교란 말과 웅변과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설교란 언제나 회중이 자신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손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다른 손은 효과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손이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보듯이 소년이 귀신에게서 해방되었다고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는 예수님께서 손잡아 일으키신 후에야 새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거듭난 후에 우리는 더욱 주님의 손에 굳게 붙잡힌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새사람이 되어 영원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희곡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시장을 거니시는데, 어떤 사람이 주님께 술주정을 하더랍니다. 예수님이 보니 전에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었답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차라리 나를 소경으로 그냥 두셨다면 세상의 못된 일들을 보지 않았을텐데, 내 눈을 뜨게 해 주셨기에 내가 이렇게 괴롭게 삽니다.” 

또 어느 곳을 가는데 어떤 젊은이가 물건을 훔치다가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뭇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청년을 자세히 보니 바로 벙어리 귀신에게서 구출해 준 그 소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꾸며낸 이야기지만 얼마든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타락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속의 세속적인 요소들을 내쫓고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주님이 입혀주는 새사람으로 옷입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골 3:9).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와 그분의 손에 붙잡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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