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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인되시는 하나님 (말 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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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되시는 하나님 (말 3:7-12)


I.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교회에서 예의바르고 신실한 봉사자로 알려진 최집사님 가정이 이혼을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급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집안에 병원비가 없었습니다. 20년 가까이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며 큰 돈은 아니지만 성실하게 월급을 갖다 준 남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0년동안 병원비도 준비하지 않았단 말인가?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신혼여행 빚내서 호화롭게 다녀오고 첫 자동차 할부로 구입하며 시작된 가정생활이 여기까지 온 겁니다.
·당연히 십일조를 하는 줄 알고 남편은 아내를 믿고 있었는데 부인은 십일조도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부인의 낭비벽은 남편 몰래 이곳저곳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몇 개나 되는 카드가 주머니엔 가득했고 매월 카드 메꾸기에 숨이 벅찼습니다. 무절제한 부인의 재정관리가 쌓이고 쌓여 한번에 터진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혀를 찰 일이지만 세상엔 아니 신앙인들 중에도 이런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의 가정이 여기까지 이른데에는 일말 성도의 재정관리를 가르치지 않은 목사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라이프 스타일이 이혼할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고쳐져야 할 스타일임은 분명합니다. 

오늘은 우리교회 청지기 주일입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제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종아, 너 정말 너희 교인들을 사랑하니! 예. 너희 교인들이 부자로 살기를 원하니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니? 부자로 살기를 원하지요. 종아, 너 이 민족이 정말 부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느냐? 네. 너 정말 나의 종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신실하게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살아가기를 원하느냐? 네. 그러면 성도들의 성경적 물질관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하느니라. 종아, 담대하라 강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희 교우들과 함께 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재정관리에 관한 설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또 한편 대단히 어렵습니다. 때로 어려운 형편 중에 십일조생활과 기부생활에 갈등을 가지고 상담을 요청해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엔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상담은 틀렸습니다. 
바로 그때가 내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 나는 복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시험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가장 신실해야 할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37가지 비유가운데 무려 17가지가 재물에 대한 비유입니다. 성경연구가들의 말을 빌리면 성경에 물질에 관한 구절이 2350개 정도 나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도에 관한 구절이 각각 500구절, “사랑”이란 말이 570구절, 믿음이란 말이 272구절 정도이니 성경엔 그 어떤 주제보다 성도의 물질 관리에 관한 교훈이 많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하셨지요. 
여기서 재물이라는 단어를 원문에서는 맘몬, 돈 귀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물질을 바르게 벌고 바르게 드리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영적전투임을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기보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네 소속이 어디냐?” 
하나님이냐 맘몬이냐, 천국이냐 이 세상 나라냐 하는 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어디에 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소속 그리고 신앙의 수준, 가치관을 알 수 있고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돈 버는 것은 재주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돈을 쓰는 것은 재주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인격이 있어야 합니다. 돈 버는 것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비슷합니다. 돈 버는데도 특별히 인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돈을 쓰는 것을 보면 거기에 신앙이 있고 인격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 쓰는 것은 종말이요 심판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크든 작든 내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십니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최고의 보물이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땅의 보물을 먼저 드리십니까?

물질은 우리 인생이나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물질은 우리 삶의 주인 자리를 놓고 하나님과 경쟁을 할만큼 힘이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물질,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는 인생의 많은 부분이 돈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돈을 어떻게 벌까? 어떻게 쓸까? 어디에 투자하고 저축은 얼마나 할까?
어떻게 베풀고 살까? 매일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물질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재물 100%에 대해 신실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정직한 십일조 뿐만아니라 나머지 90%를 사용하는 일에도 우리가 청지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진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는 청지기요 그 가진 것에 대해 진실해야 합니다. 
가진 것이 적기에 내맘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재벌갑부가 되어도 가진 물질 내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현재 있는 작은 것에 충성된 자를 하나님이 큰 것으로 맡겨 주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크게 벌어 크게 섬겨야지 하는 생각보다 어리석은 거짓말은 없습니다. 
작은 것도 못하는 사람은 결코 큰 것이 주어졌을 때 충성할 수 없습니다. 
평생 “나중”타령하다가 인생 끝이 납니다. 

다른 이의 소유물이나 공통소유물도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집 화장실 불은 끌줄 알면서 교회 화장실 불은 켜 놓고 나오는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회사 종이 한 장, 호텔 전기 한 등을 필요이상 낭비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청지기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에 히터 하나 전기 한등 끄고 다니는 사람이 교회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저는 거창고등학교에서 그것이 애국이라고 배웠습니다. 
오늘 교회오다 보니 아바러브 아버지학교 프랭카드가 붙어 있습니다. 
오래전 프랭카드를 깨끗이 빨아서 다려서 밑에 날자와 관리자만 바꿔 붙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의 자세입니다.

II. 돌아 오라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일조에 대한 태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물질관, 신실한 청지기직의 축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입니다. 

말라기서는 1장: 감사생활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책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눈먼 것, 병든 것, 찌든 것 가지고 나와서 너희들 예배하려 하느냐?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이 방만하게 살았습니다. ‘정치 지도자들 얼굴에, 종교지도자들 얼굴에, 제사장들 얼굴에 내가 똥칠을 하겠다’라고 선언을 하는 말씀이 말라기서 2장입니다. 그리고 3장의 문을 열면 ‘돌아오라!  돌아오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돌아오라는 애절한 하나님의 외침과 부르짖음이 들립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영적인 지도력을 상실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향하여, 경제파탄에 빠져있는 전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돌아오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7절에서도 세 번씩이나 돌아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라. 무릎이 닳도록 엎드려서 기도해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심히 전도해라”고 하실 것 같은데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참으로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너희가 십일조 떼어먹어 망한다”고 지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백성들아 회개하라 해 놓고 왜 돈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말라기서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은 돈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 인격,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재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누가 주인인가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함부로 살았습니다. 방만하게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회개하게 하신 후 “죄값으로 너희들 다리 하나 잘라라” 하는 게 쉽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너의 주인인 것을 보여주라.“너희들 그동안 회개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십일조 해라”하는 게 쉽습니까? 

돈 회개가 가장 기초적인 회개임과 아울러 가장 쉬운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심을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회개입니다. 
이 회개 못하면 다른 회개 못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냥 십일조 떼먹었다 그러지 않고 도적질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네 시간의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네 직업의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네 사업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생명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너희 나라와 온 백성 교회와 우주 삼라만상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나다.” 
I am that I am. 나는 나다. 내가 주인이다. 이것이 야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청지기다. 너희들이 청지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는 징표가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십일조다.” 그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과 선언 없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 
이건 신학에서 물질론이 아니라 주권론입니다.
신구약 성경 2350구절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물질관리에 성실하고 지혜로울 것을 가르칩니다. 믿음 - 9배 정도.

III. 선악과는 오늘도 있다: 대표성의 원리

십일조는 선악과와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선악과가 저주의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잘 연구해 보면 선악과는 축복의 나무였습니다. 
많은 나무들이 있었습니다만 수많은 나무들 가운데 선악과는 메시지를 가진, 
말씀을 가진 나무였습니다. 다른 것 아무리 따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는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종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가던 청교도들이 마지막에 사랑하는 자식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종자를 저들에게 먹이지 않았습니다. 날고기를 잡아 먹으면서도 종자를 없애지 않았습니다. 왜? 종자는 대륙에 가서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만큼은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는 축복의 종자였습니다. 은혜의 종자였습니다. 내 삶의 내 생명의 종자였습니다. 

이것을 소중히 잘 지키면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따먹고 나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지키면 축복이요 따 먹으면 저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은혜의 선악과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선악과입니다. 소중히 잘 간직하면, 믿음으로 아멘으로 순종하고 받아들이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시간의 선악과는 주일입니다. 주일예배는 내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천국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지키지 아니하고 순종하지 아니하고 짓밟고 살아가면 우리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이 말씀에 “아멘”하면 그리스도인이요 “글쎄요”하면 구원의 문은 닫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에도 선악과가 있고 물질에도 선악과가 있고 은사에도 선악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잘라 드려야 할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Representative “대표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는 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범죄한 죄인이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죄인의 대표자가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분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함께 걸머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입니다. 당신의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당신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는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의인의 대표자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대표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버리면 인간이길 포기한 것입니다. 구원을 버리고 천국을 버린 것입니다. 

IV. 물질의 대표자

십일조는 물질의 선악과요, 물질의 대표자입니다. 내가 쓰는 모든 물질의 대표성이 되는 것입니다. 종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소중히 잘 지키면 우리가 쓰는 모든 물질들이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따먹고 살아가면 비록 그 물질을 선한 일에 사용해도 때묻은 돈, 하나님으로부터 도적질한 돈, 자기 의를 드러내는 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소중히 지키는 것은 구원을 소중히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를 소중히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징이요 고백입니다.

8절 하반절에 보면 때문에 십일조와 헌물을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얘기하면 십일조는 헌금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저한테 볼펜을 어떤 청년이 빌려갔다고 합시다. 볼펜으로 싸인도 하고 메모도 하고 나서 볼펜을 돌려주면서 어깨에 힘을 딱 줍니다. 오히려 쓴 볼펜을 다시 돌려주는 자신을 더 높은 인격자로 평가하며 으시댄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볼펜 빌려 쓰고 다시 내게 돌려준 것은 신실하다 정직하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선행이 아닙니다.
신실한 청지기들은 하나님 앞에서 종자 즉 씨앗 심는 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1. 천국 축복의 씨앗을 먹지 말고 잘 심어야 합니다. 

오늘 믿음이 오시는 분들은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것 – 즉 십일조 도둑질은 평생 굶어 죽어도 하지 않겠다. 

2. 가난의 근성을 벗어 던져야 부한 삶을 삽니다.

제가 지난번 섬기던 교회는 빈민선교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교회 창립 전도사님이 평생 자신은 굶어가며 주민들과 교인들을 섬겼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부임하고 보니 모두들 그만하면 잘 사는데 빈민 근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주는 운동, 나누는 운동, 베푸는 운동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인든, 복음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이든 나누는 운동을 했습니다. 
금방 그 교회는 마음이 부요로와졌습니다. 교인들 형편도 부요로와지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의 부요를 누리는 첫걸음은 거지 근성을, 가난 근성을 버리는 것입니다. 

3. 십일조는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교회의 필요를 섬겨야 합니다. 

육신의 가족과 영적인 가족을 섬겨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의 배반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교회 공동체의 가족들은 구약의 제사장과 레위지파 – 신약교회의 성직자들의 필요를 모자람이 없도록 섬겨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과 좋은 것을 같이 하라. 
그리고 내 곁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가족으로 섬겨야 합니다. 작은이들의 벗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자 – 즉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이처럼 섬기는 씨앗으로 주신 것입니다. 

4. 정직한 투자 또한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투자와 투기는 다릅니다. 투기는 요행을 바라고 도박을 하는 것이요 
투자는 미래를 내다보며 재물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저축이나 투자를 죄악시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공동체를 잘 섬기기 위해 투자도 잘해야 합니다. 선한 사업을 위해서, 가족의 장래를 위해서 계획된 투자를 해야 합니다. 

물론, 탐심과 욕심으로 투자를 해서는 안됩니다. 쉽게 돈을 벌고 싶은 욕구는 바로 돈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물질을 드리는 일로 시험에 걸리는 사람도 돈귀신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아직 자기인게지요.
돈을 자기 과시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자아의 신, 물질의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교훈 중에 분산투자에 관한 교훈이 있다는 것은 퍽 재미있는 일입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전11:2)  

계란은 바구니에 나누어서 담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도서의 교훈이 그렇습니다.
부동산에만 투자하다 부동산 경기가 나빠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식에만 투자하다가 주가가 폭락되어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은행과 투자신탁 그 외 여러가지 투자의 자리를 나누어서 하라고 전도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종자 즉 씨앗을 잘 심는 청지기의 자세 중 하나는 빚을 지지 않는 것입니다. 

일전 “리더컨퍼런스”에서 강의를 했던 크라운 재정 사역의 가장 큰 전략 중 하나가 성경적 재정관리를 배워 바로 부채청산 전략과 저축과 투자전략을 배우는 사역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투자 즉 씨앗심기는 하나님의 집, 천국에 심어야 할 씨앗을 도둑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V. 십일조를 드리는 방법

그러면 천국에 씨앗을 심을 때 어디에 어떻게 드리는 것일까요?
십일조를 어디다 갖다 바쳐야 되겠습니까? 
오늘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선 십일조는 온전하게 드려야 합니다. 타협하면 안됩니다. 

내가 얼마를 드릴까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내가 꼴 먹는 그 자리에, 예배의 자리에 바쳐야 합니다. 내 영혼을 위탁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몸된 집,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예루살렘교회에 드리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안디옥교회에 드리는 것입니다. 
한소망교인들은 한소망교회에 드리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양식을 쌓는 것입니다. 
다른데 드리면 기부요 구제입니다. 십일조는 아닙니다. 
마음에 자위는 될 것입니다. 나는 십일조 드렸다. 그러나 정직하거나 온전한 십일조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고아원에도 갖다주고, 선교헌금 내기도 하고, 이웃을 위해 구제도 하는데, 이것은 십일조의 주인이, 물질의 주인이 자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십일조든 헌물이든 자기가 직접 사용처를 정하는 것은 자기 장사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물위에 식물을 던지듯 하나님께 깨끗이 드리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십일조하면서 무명으로 하는 것을 대단한 공로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사랑과 구제는 숨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선포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 교회 모든 헌금들은 선언하고 하는 것이요, 당당히 하는 것입니다. 선행이 아니고 신앙고백입니다. 

구제헌금을 한다든지 이웃을 도울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내 돈이 누구에게 갔는지 몰라야 합니다. 기억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말해 믿음은 공개적으로, 선행은 은밀하게!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정직한 십일조는 미루지 말고 모아서 하지 말고 반드시 매주 혹은 매월 드리는 것이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월급을 타시는 분들은 월급을 타는 그 주일에 합니다. 
장사하시는 분들은 매주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갑작스러운 축복이 있을 때는 바로 그 자리에서 드립니다.
왜요? 먼저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써보고 주섬주섬 챙겨 드리면 먼저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신앙적으로 환경적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교회는 주정헌금을 드릴 수 있게 합니다. 내 믿음의 십일조를 정하고 그것을 매 주일 얼마로 작정하고, 결단을 합니다. 이것은 십일조 하는 사람이 매 주 드리는 주일헌금과는 다른 것입니다. 주정헌금은 일종의 십일조 헌금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십일조를 결단하든 주정헌금을 결단하든 둘 중 하나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주정헌금은 분명 십일조는 아닙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가 십일조 드릴 연습을 하는 겁니다. 

어떤 분이 십일조를 결단하면서 깜짝 놀랄 일 몇 가지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처음 십일조 뗄 때에 내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파서 놀랐답니다. 그런데 얼마동안 했더니 너무나도 기쁨으로 드릴 수 있어서 놀랐습니다. 아홉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지혜가 생겨서 풍성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날이면 교회에 달려나가고 싶고 하나님 앞에 은혜가 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기름진 삶을 누릴 수 있는 나의 삶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봉헌시간 박수를 치는 어떤 교회 사람들이 오히려 이해가 되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2013년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고 신앙생활하자고 하고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온우주 만물의 창조주 되심을.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엘샤다이. 전능한 하나님이심을.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되시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내 삶의, 내 물질의 주인되시는 분이심을.

미국의 돈에는 일불짜리나 천불짜리에나 모두 “In God we Trust”(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이 찍혀있습니다. 세계의 돈이 되는 축복을 받은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남북 전쟁의 어려운 때에 한 농촌의 목사가 당시의 재무장관인 체이스(S.P. Chase)씨에게 건의하고 국회가 승인을 해서 실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VI. 십일조 축복

십일조 잘하는 백성에게 오늘 본문이 많은 것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늘문이 열린다.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하늘문은 언제나 열리게끔 되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베드로가 고백할 때 “천국열쇠를 너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늘문을 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늘문을 열어서 성령충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찬송하고 기쁨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늘 보화 창고를 열게끔 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황충이 금해질 것이다.  

농사를 지었으면 주인이 먹고 살아야 되는 거지요. 사업을 열심히 했는데 회사에 황충이 생겨 망합니다. 자식들의 마음, 신앙에 황충이 먹으면 안됩니다.
어떤 가정은 행복한 결혼을 시작했는데 애정생활에 황충이 생겨서 가정이 파탄에 이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살았는데 건강에 황충이 생겨 질병으로 고생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온전하게 드리면 인생에 황충이 먹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셋째,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겠다.

농사를 지었어도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기한 전에 떨어지면 저주받은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이 70이요 80인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학교에 입학했는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겠다. 결혼생활 시작했는데 결혼이 마칠 때까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임신한 여자가 해산하기 전에 낙태하는 것 기한 전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업을 시작했다가 도중에 접어 버리는 것이 기한 전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보라”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하나님은 시험 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에 단 한번 오늘 읽은 말라기서에 십일조를 교훈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강조어가 “온전한”입니다. 타협하지 않은 십일조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믿음으로 아멘 하면 좋고,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을 시험이라도 해봐라. 체험이라도 해봐라 그런 얘기입니다.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해 원금을 모두 날렸습니다.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 밀린 임금을 요구했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록펠러는 너무 괴로워 모든 사업과 심지어 생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습니다. 기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십일조생활을 해온 록펠러는 황량한 폐광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음을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십시오.” 록펠러는 통곡했습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위로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나를 믿었으면 계속 따라 더 깊이 파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록펠러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황금 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석유였습니다. 록펠러는 유전을 발견해 일약 거부가 됐습니다.
록펠러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십일조는 위기의 순간에 더 정직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며 살지 않을 것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신다는 이 사실을.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신 전능한 아빠 우리 하나님을.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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