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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흥을 위하여 (스 3:1-6)

첨부 1


부흥을 위하여 (에스라 3:1-6) 

1. 요즘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고민하는 문제가 있다면 부흥일 것입니다. 

1) 양적인 성장을 말하는 부흥은 꼭 아니더라도, 뭔가 더 근본적이고, 참되고, 더 확실한 신앙의 부흥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부흥이란 이삭이,,, 아브라함이 이전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파는 것"이라 했습니다 (창26:17-18). 유목민이던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물이란 너무나 중요한 것인데, 아브라함이 거처를 옮길 때마다, 거기서 우물을 파면 물이 솟아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죽고 나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을 메워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찾아서 다시 팠을 때에 거기서 다시 물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2) 이렇게 부흥이란, 막혔던 은혜의 우물을 다시 파는 것 -  그래서 그 은혜를 다시 마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물을 다시 파기 위해서는, 블레셋이 우물을 막기 위해서 버린 쓰레기와 잡동사니들을 걷어내야 하는데,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우리에게 부흥이 있기 위해서는, 불신앙, 오염되고 삐뚤어진 교리와, 잘못되고 죽은 정통신앙, 그리고 영적 무기력증,, 같은 영적인 쓰레기들을 걷어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2. 오늘 본문에서 그 우물을 다시 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바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1)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에,, 조국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다 무너져 있었고, 포로되지 않고 남아 있던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상태는, 그야말로 쓰레기처럼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랫동안 막혀 있던 우물을 다시 파면서, 그들의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고 있습니다. 부흥을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흥을 꿈꾸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의 부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고, 우리의 부흥을 기대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부흥을 위해서 > 

I. 부흥을 위해서, 먼저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1.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하나님께 다시 단을 쌓았습니다. 

1) 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였다” 했습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하나님께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를 회복한다 (예배하는 공동체로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가, 다시 돌아와서,, 그 예배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2)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재건 공사를 시작합니다. 6절 이후에 나오는 말씀은 전부 성전공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들은 옛 솔로몬 성전의 기초 위에, 새로운 성전의 기초를 놓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언약백성의 공동체로서 회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옛 우물을 다시 파는 것입니다.
 

2. 예배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에 소통입니다. 

1) 오늘날 우리는 소통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정치인들도 그렇고, 어디를 가나 소통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하나님은 원래 소통의 하나님이십니다. '삼위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는가'를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라고 하는데요, 존재방식의 측면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할 때에, 하나님은 "교제의 하나님, 관계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바로, 소통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다메섹의 요한이라는 초대교회 신학자가 하나님을 "춤추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었습니다. 두 사람이 춤을 출 때,, 서로가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서, 호흡이 완벽하게 맞아야 춤이 이루어지듯이, 세 하나님이 서로 완벽하게 소통가운데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3) 뿐만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사역도, 소통케 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이란 한마디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무시고, 소통케 하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소통케 하셨습니다.

4) 성령 하나님의 사역 중에 가장 중요한 것도, 소통의 사역입니다. 목사님들이 하시는 축도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서 나온 것인데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할 때에, 성령의 대표적인 특성을 "교통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셨을 때에 나타난 현상이, 언어가 서로 소통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5) 그래서 참 예배란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에 막힘이 없어야 하고, 심지어는 사람 사이에도 막힘이 없어야 된다고, 만일 막힘이 있으면, 재물을 제단에 두고 가서, 막힌 것을 허물고 와서 예배 드리라고 했습니다.

 
3. 그래서 신앙의 부흥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통함의 회복에서 일어납니다. 

1) 막혔던 우물을 파서, 다시 물이 솟아나게 하듯이, 예배를 통해서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그리고 나서, 우리 안에 막혔던 것들이 다 뚫어져서 소통함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람은 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들은 결국 추적해 들어가 보면, 전부 하나님과의 막혀 있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막힌 것들이 다 뚫어져야 합니다. 

2)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안에서 아파서 웅크리고 숨어 있는 또 하나의 나의 자아를 주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받았던 많은 아픔과 상처들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와 죄와,, 좋지 못한 기억들, 그런 것들을 내 비밀창고 안에 넣어 둔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과의 예배의 소통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중에 성령께서 오셔서, 내 마음속을 운행하시면서, 나를 억누르고 있는 모든 억압들, 얽매고 있는 모든 사슬들을 끊어주시고, 열등감과 수치심과,, 아픔과 상처들을 다 어루만져 주시도록 기도 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벽들과 담들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 때 우리안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게 되고, 우리 안에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3) 그래야 성도간의 교제가 회복이 됩니다. 우리 안에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벽과 담들이 있습니다. 하덕규씨가 불렀던 <가시나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과 같다"고 한 것처럼, 내 안에 있는 가시가, 나를 아프게 찌를 뿐 아니라,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찔러서 피가 나게 하는 것입니다. 

4) 키에르케고르가 <고슴도치 비유>에서, 고슴도치가 너무도 추운 겨울에, 온기를 나누기 위해서 서로 다가가서 안았는데, 몸에 있는 가시가 서로를 찔러서, 서로 피를 흘리면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하듯이, 나는 사랑한다고 자녀들에게 친구들에게 다가가서 안지만, 상대방의 나의 가시에 찔려서 아파합니다. 

5)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상처와 가시가 열등감과 우월감과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은혜에 묻히게 되고, 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역사해서, 주님의 영광만이 나타나게 될 줄 압니다. 

6). 믿음의 부흥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해결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예배가 좋은 예배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예배자가, 좋은 예배를 만듭니다. 좋은 예배자가 되면, 어떤 환경속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모두, 좋은 예배자로 세워져서 예배를 통한 신앙의 부흥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II. 부흥을 위해서, 두번째로  신앙의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1.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4절). 4절에서,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1)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천막생활을 했던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애굽에서 구원하셨으며, 그들이 광야생활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는가를 자자손손 기억하기 위함인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많은 절기보다 왜 하필 초막절을 먼저 지켰는가 하면, 이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돌아온 상황이, 옛 이스라엘이 애굽의 포로에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온 상황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포로에서 돌아오게 된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초막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2. 절기를 통하여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다시 부흥케 하는 길입니다. 

1) 특히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에, 신앙의 절기들을 통해서 우리 믿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씩 앨범을 꺼내어서, 옛날 사진들을 보면서, 그 때를 그리워하듯이, 신앙의 절기는 앨범과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은혜가 메말랐을 때에 우리 신앙의 불씨를 지펴줍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면서, 그 때의 그 감격을 다시 일으키는 것입니다.  세례 받을 때에, 직분을 받았을 때의 그 다짐들을 돌아보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수련회에서, 부흥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불렀던 그 찬양을 부르면서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는 것입니다. 단기선교 가서, 만났던 아이들의 눈망울 속에서 만났던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2) 이렇게 절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청년들이 데이트를 하면서,, 처음 만났던 날을 기념하고, 처음 만났던 장소로 돌아가, 서로를 엮어준 그 시간과 그 장소를 기억하듯이, 또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맺어준 결혼기념일을 기억하듯이, 우리에게 주님과의 사랑을 기념하는 절기가 있습니까? 

3) 믿음의 공동체는 기억하는 공동체입니다. 고난의 때에 은혜의 추억들을 돌아보면서, 오늘의 고난을 이기고, 약속의 땅에서 만사형통할 때에, 은혜를 기억하면서 자만하지 않도록 하는 신앙의 절기가 있어야 합니다.  

4) 다시 신앙의 부흥을 꿈꾸어 보십시다. 묵은 땅을 기경하고, 꺼져 있는 신앙의 불씨를 다시 살리십시다. 믿음의 순수함을 다시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에서 그런 부흥을 기대하고,  이전에 주신 은혜를 뒤돌아 보며,, 기억하는 데서, 우리 믿음이 다시 불일듯 일어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한번 놀라운 믿음의 부흥이 우리 심령과 교회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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