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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눈만 눈이 아니다 (요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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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만 눈이 아니다 (요 9:1-12)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던 중에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을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희안한 방법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수나 말씀으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흙을 침으로 이겨 감긴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이 소경은 육신의 눈만 뜬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복된 눈을 떴습니다. 이 소경은 어떤 눈을 떴을 가요?

1. 속 눈도 눈입니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 앞에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가 선지자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예수님이 바로 선지자요 메시야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떤 사람이라 하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눈을 뜬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소경은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지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보면서 나사렛 목수 아들이라고만 알았습니다. 목수 아들 목수라고만 말했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보는 자들로 소경이 되게 하시겠다고(39절)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은 “우리도 소경인가?”(40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님이 선지자임을 보았습니다. 속을 볼 줄 아는 눈이 떴습니다. 성막을 겉으로 보면 물개 가죽만 보입니다. 그러나 안을 보면 금널판으로 되어 있기에 황금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겉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속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겉보다는 속을 볼 줄 알아야 깊은 눈이고 복된 눈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볼 때 겉으로 보지 않으시고 속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볼 때 창녀요 일곱 귀신들린 여인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의리있는 눈초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제일 먼저 찾아 간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모두가 다 도망하였지만 끝까지 남아 예수님의 운명을 지켜본 여인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가장 귀중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삭개오를 바라 볼 때 민족의 피를 빨아 먹는 세리장으로만 보았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찰거머리같이 피를 빨아 로마인에게 바치는 매국노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를 바라 보는 순간 그의 깊은 속을 보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자 말자 재산의 반을 털어서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남에게 세금을 더 받은 것이 있었다면 4배나 갚았습니다. 말하자면 재산의 반을 남겨 빚을 갚았으니 아마도 삭개오는 자기 재산을 모두 내놓은 것같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그런 면을 보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과 예수님의 눈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속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우리는 민수기 14장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발견합니다. 모세는 12명의 정탐군을 임명하여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 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똑같은 날 똑같이 떠나 똑같이 보고 똑같이 지내다가 똑같이 돌아 왔습니다.그런데 10명의 보고는 이러 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나이다.........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27-33)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8-10)

10명은 겉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명은 속을 보는 눈이 열려 있었습니다. 두 명이 승리하였습니다. 속을 볼 줄 아는 이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속을 보는 눈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비행기가 기류 변화로 요동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두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승객들은 얼굴이 시퍼넣게 질려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비행기가 추락할 것같았습니다. 그런데 조그만 소년 하나는 깔깔 대며 웃고 있었습니다. 조금도 겁내지 않고 편안하게 즐기교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비행기가 정상을 찾았습니다. 모두 한숨을 길게 내쉬었습니다. 옆에 사람이 물었습니다.
“너는 무섭지 않았니?”
조그만 소년이 대답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조종하고 있어요, 조정사가 우리 아버지예요. 우리 아버지 비행기 조정 잘 해요. 절대로 안 비행기를 안 떨어뜨려요.”
남이 보지 못 하는 것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겉만 보아도 속을 볼 줄 알면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2. 내일을 보는 눈도 눈입니다.

이 소경은 육신의 눈만 뜬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속눈만 뜬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일을 볼 줄 아는 눈이 떴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눈을 뜬 후에 집으로 돌아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소경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28)

소경은 모세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소경이 미래를 바라 볼 줄 아는 눈이 열렸다는 증거입니다. 미래는 모세의 제자는 사라지고 예수님의 제자만이 생길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에는 모세의 제자가 힘을 얻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온 세상을 덮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소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내일을 볼 줄 모르는 이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아침이 되면 침대를 팔고 저녁이 되면 침대를 사들이는 좁은 안목으로는 결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미래를 보지 않고 현실에만 만족하는 삶을 살아 가고 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대비하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목사 안수받을 예정인 17명 전도사님들과 면담을 하였습니다. 우리 세대와는 완연히 다른 세대가 되었음을 실감하였습니다. 모두 편의주의같이 보였습니다. 고생을 싫어하는 세대들이었습니다.
모두 목회 계획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명 논문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앞으로 시대는 이렇게 변화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그것에 맞추어 목회하여야 한다는 논문이었습니다. 앞으로 시대는 세 가지로 변화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1. 신앙이 일종의 선택적인 여가로 생각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2. 신앙을 도피적인 피난처로 생각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3. 목회도 써비스업처럼 경쟁하는 시대로 사람들에게 써비스 잘 하는 교회가 성장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맞추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문이었습니다. 이 논문을 심사하면서 내가 오히려 은혜를 받았습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야 미래를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나는 얼마 전에 우이 제일 교회에 부흥회를 갔습니다. 장로교회입니다. 산속에 기도원처럼 별장처럼 지어진 아름다운 전원 교회였습니다. 이 무웅 목사님이 지금부터 35년 전에 우이동 골짝기 그 산속에 교회를 지을 때는 모두가 웃었습니다.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 산속에 교인들이 찾아 오겠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아름다운 전원 교회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깊은 산속에 아름다운 녹음이 우거진 교회를 처음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은 길게 보았습니다. 확실히 보았습니다. 앞으로 얼마 지나면 이 곳이 주택지가 될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선견지명이 있는 목사님이었습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미래를 보는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3. 진리의 눈도 눈입니다.

이 소경은 육신의 눈만 뜬 것이 아니었습니다. 속과 미래를 볼 줄 아는 눈만 뜬 것도 아니었습니다. 진리 볼 수 있는 눈이 열렸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도저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이들은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스데반을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요즈음 북한이 선교사들을 잡으면 동네 마당에 세워놓고 공개처형한다는 소식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도 못 하고 믿지도 못 하게 하려는 공산당들의 정책입니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진리에 눈을 뜬 이들은 지하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대부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하였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4;5-6)

그런데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눈 앞에 보면서도 그리스도임을 몰랐습니다. 진리의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아는 진리의 눈이 떴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놀란 유대인들은 소경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저 눈을 뜬 소경이 네 아들이냐?”
그러나 아버지는 혹시 유대인들이 자기를 출교시키고 혼을 낼가 두려워 아들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분명히 다짐하고 싶어서 다시 물었습니다. 소경은 또 분명히 예수님은 선지자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공포스러운 분위기였으나 진리를 말하는 데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습니다
진리에 눈이 떴기 때문입니다. 당당하게 자기의 소신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성막 쎄미나가 끝나고 난 후였습니다. 한 목사님이 내게 와서 말했습니다.
“좋은 말로 말해 은혜받았고 좀 심한 말로 열받고 돌아 갑니다. 도전받았습니다. 성막 오직 예수, 오직 복음입니다.”

한 목사님이 새벽 설교를 하였습니다.
1975년 2월 1일 12시 5분 2만 볼트 전선에 자기가 들고 있던 장대가 순간적으로 닿았습니다. 폭풍이 일었습니다. 기절하였습니다. 9시간 만에 살아 났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던 분이었습니다. 인생은 아차 하는 순간에 끝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죽는 것과 사는 것은 한 발 차이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두 압니다. 그러나 체험하지 못 하였습니다. 이 분은 예수를 믿지 않다가 이 사건을 하루 아침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담배를 두 곽씩 피우가가 한 순간에 끊어 버렸습니다. 술도 하루에 두 세병씩 마시다가 딱 끊었습니다. 예수믿고 목사가 된 분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눈이 열리고 나니 하루 아침에 그렇게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오늘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진리를 향하여 내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진리로 눈이 열리면 생활이 달라 집니다. 예를 들면 사랑을 받으면 오래 산다는 진리가 증명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버클리 대학에서 사랑과 생명의 관계성을 연구하였습니다. 쥐를 가지고 실험하였습니다.

첫 번 째 쥐 한 마리만 우리에 기르며 먹이만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다섯마리 쥐를 같이 기르며 같이 모이게 해서 먹이를 주었습니다.
세 번째는 사람의 손에 쥐를 올려 놓고 쓰다듬어 주면서 먹이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쥐는 600일을 살았습니다. 두 번째 쥐는 700일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쥐는 무려 950일을 살았습니다.

해부하여 보았습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쥐는 다른 쥐들에 비하여 뇌가 무겁고 컸음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오래 삽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오래 살기를 바라면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아는 것이 진리의 눈입니다.
도끼 살인마 김대두가 사형장에서 이 땅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 생애에 사랑이라는 것을 단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진리를 볼 줄 아는 눈이 열리는 것이 복입니다. 소경의 눈을 예수님이 뜨게 하여 주셨는 데 육신의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눈을 뜬 것이 가장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시 119;71-73)
진리는 천천 금은보다 귀한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는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

4. 영의 눈도 눈입니다.

이 소경이 예수님을 향한 고백은 3단계로 발전되었습니다.
제1단계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11) 
제2단계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17)
제3단계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3)
이 소경은 육의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의 눈도 떴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소경된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성경에서 저주를 의미하는 단어가 셋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 흙 그리고 소경을 저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침을 뱉았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저주하실 때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흙도 저주입니다. 그리고 소경은 저주받은 표시하고 믿었습니다. 침으로 흙을 이겨 눈에 발랐습니다. 저주를 들어 저주를 발라 저주에 묻혀 저주의 삼겹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창세기 49장 10절에 <실로>나 이사야 8장 6절의 실로아는 모두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소경은 실로암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밤낮으로 물이나 길어 마시던 실로암이 자기의 저주를 깨끗이 씻어 주는 연못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소경은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임을 알고 그렇게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깊은 영적 체험을 하여야 영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나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영의 눈이 열릴 수 있는 영적 체험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기를 원합니다.

독일 하멜만이라는 사람은 11식구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도가 들어 총을 난사하며 10식구를 모두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여 갔습니다. 물론 하멜만도 총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모두 4발이나 맞았는 데 살아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편 강도는 경찰에 잡혀 20년 형을 받았습니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 강도는 20년의 형을 마치고 출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받아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 때 하멜만이 그를 자기 집안 식구로 받아 드렸습니다. 이 사건은 독일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비웃으면서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10명을 죽인 원수와 어떻게 살겠다고 받아 드립니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하멜만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나를 사랑하여 주시고 나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셨는 데 이것쯤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깊은 체험을 한 이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영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1. 속 눈도 눈입니다.
2. 내일을 보는 눈도 눈입니다.
3. 진리의 눈도 눈입니다.
4. 영의 눈도 눈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무디 목사님이 가장 좋아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냥꾼이 사냥을 하러 산으로 들어 갔습니다. 오리 세 마리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총을 쏘았습니다. 한 마리는 쏜살같이 달아 났습니다. 한 마리는 급소에 맞아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총알이 빗맞았습니다. 그래서 비틀거리고 달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냥군은 어느 오리를 쫓을 가요? 무디가 물었습니다.

대답은 당연합니다. 빗맞은 오리를 따라 갈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이미 넘어진 사람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팔팔 살아서 움직이며 기도하고 전도하고 일하는 사람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사탄은 빌빌거리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눈만 눈이 아닙니다. 모든 눈이 열려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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