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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을 믿는 그리스도인 (계 1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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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믿는 그리스도인 (계 14:12-20)  

우리는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일곱 천사를 본다. (계14:6, 8, 9, 15, 17, 18, 19)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천사의 메시지는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한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즉 첫 번째 천사의 메시지인 계14:6~7은 요한계시록 19장에서 구체적으로 나오고 둘째 천사의 메시지인 계14:8과 세 번째 천사가 선포한 계14:9~11의 메시지는 요한계시록 18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우리는 이 메시지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에게 경배해야 하고 지상의 바벨론에게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함을 권고 받는다. 또한 짐승과 우상 숭배를 하지 말아야 하고 짐승의 표를 받으면 절대로 안된다는 것을 경고 받는다. 

이 심판은 혹독하다. 짐승의 표를 받으면 밤낮 쉼을 얻지 못하게 되고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게 된다.

이 심판은 준엄하다. 진노의 포도주에 섞인 것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그 심판의 강도가 강한 지를 예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지막 시대를 살 때 심판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한다.

심판을 믿는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  

1. 인내해야 한다. 

계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인내란 굳게 참고 견뎌낸다는 말이다. 헬라어 휘포모네(υπομονη)란 단어는 ‘버틴다’는 말이다. 성도들은 세상의 도전을 받을 때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고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다. 유혹의 거짓에 속고 미혹의 달콤함에 속아서 말씀을 어기고 믿음에 파선된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인내로서 주어지는 영광을 보아야 한다. 참지 못하면 마라톤도 완주할 수 없다. 참고 견뎌내지 않으면 좋은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없다. 사랑도, 우정도 잘 참음으로써 무르익고 아름답게 된다. 인내가 없어 믿음을 지키지 못하면 짐승에게 표를 받고 결국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게 된다.

인내하자. 농부도 추수의 날을 기다리며 폭풍우와 뜨거운 여름을 인내한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한다. 약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약5:11을 보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라고 하였다. 말씀대로 되어질 것을 보려면 인내로만 볼 수 있다. 인내하는 것이 복이다. 
  

2. 주 안에서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

계14:13下 “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라고 하였다. 하늘에서 나온 음성, 그 음성이 누구의 음성인지 분명치 않지만 죽는 것에 대한 선언이다. 죽는 것, 주 안에서 죽는 것이 저주가 아니고 복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후로”라고 하였으니 이는 교회의 환난을 뜻하나 인내로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려는 자는 환난을 겪을 수 있다. 그 환난이 불이 되고 물이 되고 칼이 되고 생명을 앗아갈 수 있지만 그것은 복이다. 순교가 복이다. 주님 때문에, 주님으로 인해 죽는 것이 복이다. 

염산교회, 야월리교회는 6.25전쟁의 상황 속에서 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수장을 당하고 죽었다. 논산의 병촌교회는 66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피지 못한 젊은 꽃봉오리들의 죽음을 보면 안타깝고 불쌍하지만 믿음을 지키다가 죽은 그들을 향해 성경은 말한다. 하늘에서 울리는 음성은 말한다. 

“복이 있도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 복이 있도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 안에서 죽기를 각오해 보자. 그리고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주 안에서 살아야 한다. 살지 못하면서 죽을 수 없다. ‘주 안에서’란 단어를 바울은 160번이나 사용했다. 주 안에 거하자. 살자.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안에서 솟아나는 혈기도 죽이고 고집도 죽이는 생활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의 그리스도인이다.
  

3. 영광을 바라보고 나가야 한다.

“주 안에서 죽는 것이 복되도다.” 하는 하늘의 음성을 성령이 동의하신다. 계14;13下을 보라.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왜 성령이 주 안에서의 죽음을 동의하시는가? 그것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되는 영원한 안식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하여 순교자들의 행위에 대한 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상은 특별한 상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 그 영광을 바라보고 이겨야 한다. 안식이 있고 상급이 있다. 이것이 성령이 그러하다고 동의해 주는 것이니 돈으로 살 수 없기에 복이다.
  

4. 마지막 추수 심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계14:14~20은 마지막 추수 심판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이다. 계14:14~16은 곡식으로서의 심판이고 계14:17~20은 포도주 틀의 심판이다. 요엘서를 보면 욜3:13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라고 하였는데 계14:14~20은 이 두 가지 마지막 추수 심판을 가르쳐 준다.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심판은 주님이 직접 낫을 들고 거두어들이는 수확 심판이다. 계14: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곡식이 거두어지는 수확의 심판은 마지막 때의 심판이다. 마13:24~30에 나오는 좋은 씨를 밭에 뿌린 비유를 보라. ‘추수 때’라는 것은 마지막 때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비유의 내용을 보라. 곡식은 가라지와 더불어 함께 자란다. 그러나 수확의 때에까지 가만 두다가 마침내 추수 때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되고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게 된다. 

마13:30에 기록된 이 말씀처럼 곡식 심판은 알곡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심판이다. 이 추수 심판을 알면 가라지가 될 수 없다.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주님의 곳간에 들어가야 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할 수 없다. 우리를 넘어뜨리는 두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권세와 거짓 선지자의 권세다. 그 짐승은 자기를 따르지 않는 자를 죽인다. 계13:15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계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죽음으로 미혹을 해도 추수 심판 때 알곡으로 거두어져야 될 것을 안다면 인내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 계14:17~20에 기록된 땅의 포도를 거두어들이는 심판을 보라. 낫을 가진 천사를 향해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다.”고 외친다. 낫을 가진 천사는 그 음성대로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진다. 이것은 심판이 아니다. 천사가 심판을 준비하는 것이다. 구름 위에 앉으신 인자께서 심판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마침내 계14:20에 따르면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자임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포도주 틀을 밟는 철장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 틀에서 나오는 피가 말 굴레에까지 닿았다. 

말 굴레란 ‘Horse's Bridle’ 즉 말 고삐에 걸쳐 얽어 멘 줄이란 뜻이다. 그러니 그 피가 얼마나 큰 강을 이루고 있는가가 생각된다. 그 피가 16,000스다디온에 퍼졌다. 16,000스다디온, 여기서 한 스다디온은 192미터이니 이 길이는 이스라엘 남쪽에서부터 북쪽가지의 거리에 넘치는 것으로 심판의 혹독함을 보여준다. 이 수치는 영어 성경에 200마일로 표기되기도 했지만 16,000이라는 숫자는 동서남북을 뜻하는 4×4×1000의 숫자로 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아 흘러내린 피를 뜻한다. 우리는 이 마지막 때의 두 수확 심판을 바로 알고 믿는다면 믿음을 지키는 일에 당당하지 않을 수 없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힌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 성은 거룩한 구원의 도성인데 반해 성 밖에서 아주 무서운 심판이 일어나고 있음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요한계시록 끝장에 기록된 19장의 심판을 미리 알고 보았다. 이것을 믿는 우리는 인내하지 말라고 해도 인내한다. 말씀과 믿음을 지키지 말라고 해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게 된다. 하늘에서 들려주는 음성, 그리고 성령이 그러하다고 동의해 주는 음성,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는 말씀대로 생명을 빼앗기면서 까지도 믿음을 지켜낼 수 있다. 

기독교 역사 초창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사는 환난과 박해로 물든 역사였다. 1945~2006년까지 북한에서 순교한 성도는 1만 6,984명이다. 이는 한남동 감리교 여선교회관에서 열린 모퉁이돌 선교회 주최 세미나에서 반포한 순교 사례 761건의 결과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다. 숨어서 예배를 드리다가 7419명,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다가 5637명, 비밀리에 복음을 전하다가 159명, 전쟁 기간 중 성도임이 발각되어 673명 등... 남한도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고 죽었다. 

그런데 경제가 발전하고 먹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된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 2000년대로 오면서부터 교회는 본질을 놓쳐버린 듯 세상에 취하여 있다. 박해가 없으니 그리스도인들이 무장 해제를 당했는지 정신도 허약, 신앙도 허약, 기도도 허약, 섬김도 허약해졌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심판 따위에 무관심하고 세상 부에 취하고 안일에 취하고 세속적 가치와 물질 문화에 취하여 하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 기도 소리는 약해지고 야성을 잃은 사자가 되었다.

우리는 변해야 한다. 독수리가 참새로 살고 호랑이가 고양이로 살아서는 안된다.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지신 추수 때의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라. 거두어들여질 알곡 성도로 익은 곡식이 되자. 그 알곡 성도가 바로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다. (계14:4) 포도즙 틀에 던져지므로 밟히고 으깨어지고 말 불신앙의 사람은 누군가? 짐승을 따르고 짐승에 속한 사람, 666표를 이마와 손에 받는 사람, 그리고 배교하는 사람, 우상 숭배하고 경배하는 사람, 회개하지 않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살인자와 거짓말 하는 자, 음행하는 사람 등이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가? 불신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 인정하는 과학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허나 미리 보여준 예고편, 본편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미리 알게 하고 미리 준비하게 하고 미리 회개하게 하고 미리 모두 다 알곡되게 하려고 미리 알려주는 계시, 천사의 메시지는 바꿀 수 없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 변치않는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받아들여라. 심판이 이르렀다. 이것이 공중에 날아가는 천사가 지닌 영원한 복음의 내용이다. (계14:6)

온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 천사가 지닌 영원한 복음을 믿을 때 심판의 날을 준비해야지 바로 설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 심판의 그날이 두렵지 않고 당당히 서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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