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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기할 수 없는 꿈 (행 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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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수 없는 꿈 (행 2:14-21)

14.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본문은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에 충만한 베드로 사도가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요엘서에서 말세에 이루어질 일들을 예언했는데 그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에는 종말론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말세에’라고 했는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때부터 다시 오시는 때까지를 말세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오늘 이 시대 전체가 말세입니다. 인류의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고, 그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종말론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역사의 모든 것이 종결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오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신자가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신앙은 길을 잃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에 승부를 거는 인생이 아니고, 마지막 날에 다가올 세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종결될 것을 믿는 신앙과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종말의식을 가진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첫째, 깨어있어야 합니다. 언제 그날이 올지 모르니 긴박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영적 민감성과 긴장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늘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데 예수님이 오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배 후에 예수님을 맞는다면 최고일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잘 때도 옆에 옷을 준비해놓고 잤고, 구름 낀 날에는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기대했습니다. 순수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늘 회개해야 하며 언제든지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혼란을 주고 영적으로 어지럽게 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때를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때를 분별합니다. 

오늘날 많은 영적인 사람들은 이 시대를 가리켜 그 날이 가까웠다고 합니다. 넷째, 신앙생활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언제나 오늘이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신앙이 반듯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애매한 태도로 세상과 타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약속하신 것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입니다. 부어준다는 표현은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바닥을 긁는 것이 아니라 넘쳐 흐르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다는 것은 성령에 사로잡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강권적으로 주장하시는 힘에 우리가 끌려가는 상태입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마지막 시대에는 마귀가 날뛰고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배교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세상이 악하고 타협해야 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애매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배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지막 시대에 주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강력한 사로잡음으로 믿기로 작정된 구원받은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 압도하는 성령의 힘에 사로잡히는 상태가 됩니다. 이 때는 내가 임의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 은혜를 저항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눈치를 보고 겁먹고 도망갔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너희가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였다고 일침을 가하며 거침이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겁이 없어지고 눈치도 안 봅니다. 직장에서도 예수 믿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고 전도하면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을 부어주실 때 일어나는 뚜렷한 현상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꿈을 꾸는 것입니다.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는 말씀처럼 이 꿈은 미래에 일어날 일의 막연한 추측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니 꿈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이 그 인생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처럼 젊은이나 늙은이나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께서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알처럼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꿈을 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자 막벨라 굴을 삽니다. 그 땅의 추장이 그 굴을 공짜로 주고자 했지만 굳이 돈을 주고 샀습니다. 

그런데 500년 후에 그 곳이 가나안 땅의 심장부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마치 사진 찍듯이 정확하게 내면에 새겨집니다. 형들이 그렇게 미워하는데도 요셉이 그 꿈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그 꿈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꿈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절망하지 않았고 그 꿈이 범죄의 자리에 빠지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선명합니다. 한 개인에게도 주의 영이 임하시면 그 인생 가운데 어떤 꿈을 주십니다. 은혜를 받고 성령이 임하시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보게 하십니다. 특별히 미래가 보이는데, 이것이 우리 삶을 흥분되고 신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삶 속에 포기할 수 없는 꿈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회복의 꿈입니다. 

창세기 1장 26~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을 흙으로 빚으시고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을 하나님과 동급의 대리자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보면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부여하신 신적 권위입니다. 모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창조의 일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존엄성, 가능성, 잠재력은 상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며 하나님의 속성과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과 거의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그 존엄성과 가능성, 인간에게 있던 그 고귀함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비극은 인간됨의 목적이 사라진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찾아온 가장 큰 비극입니다. 왜 사는지, 왜 태어나 존재하며 무엇을 위해 존재할 것인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은 가장 큰 비극입니다. 먹고 사는 것에 매여서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본래 목적을 위해 살지 못하고 허무한 목적을 가지고 살다 보니, 그 목적을 이루어도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은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면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죄로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고 죄를 짓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찾아오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존재가치와 인생의 뚜렷한 목적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위대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우리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목적이 뚜렷합니다. 어느 역본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 것이 회복입니다. 회복은 내적인 회복, 내면의 변화, 존재의 혁명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목적을 깨닫는 것이고, 그 목적은 먹고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드러내는 위대한 작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장들의 작품은 작가의 영광을 드러내고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대작이 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믿고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날 때를 ‘속사람의 변화’라고 말합니다. 바로 내면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엡 3:16)」 

예수를 믿어도 겉만 변한 사람이 있고, 속이 변한 사람이 있습니다. 금에도 도금이 있고, 순수한 금덩어리도 있습니다. 속이 변해야 진짜 신자입니다. 그 때 바로 회복이라는 말을 씁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내적인 변화가 확실하게 일어나면서 존재의 혁명이 일어나 삶의 목적이 정확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에 추구하고 좋아하던 것에 흥미가 없어지고, 관심과 관점이 바뀌고 가치가 달라지고 취미도 달라집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발견하면 살아야 할 이유가 생깁니다. 밥맛이 생기고 인생이 재미있어집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죄 짓는 삶이 더 이상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이 변한 사람은 절대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 성령께서 내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하늘을 바라보고, 순간의 이익이 아니라 영원을 추구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회복이라 하고 진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회복의 역사,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우리에게 심어져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날 때,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멋있고, 보기만 해도 감탄이 일어납니다. 


둘째, 공동체의 꿈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입니다. 120명의 문도가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을 받고 신약의 교회가 출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을 물 붓듯이 부으시니 거대한 공동체가 일어났는데, 베드로가 설교하자 하루에 3천 명이 돌아오고, 나중에는 5천 명, 나중에는 셀 수 없는 무리들이 돌아와 새로운 사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의 흑암 권세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고 실현하고 축복을 흘려보낼 교회가 지상에 시작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말씀은 이 유대민족을 사용하셔서 열방 가운데 복음이 전해지고 마침내 신약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기까지 이루실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교회에 있습니다. 세상 나라의 흥망성쇠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움직여 가느냐에 따라서 그 민족과 세대와 도시와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말세에 교회의 향방과 움직임은 굉장히 긴밀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를 축복하실 때 교회 안에 부흥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 부흥은 한 부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로부터 장년까지 모든 세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계층에 변화가 일어나고 모두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이런 부흥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 부흥은 하나님의 편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부흥의 파도가 밀려오면 인간은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남종과 여종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에 사로잡히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 젊은이들에게도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교회 주일학교에도 부흥의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금요철야에도 기도가 뜨겁고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어린 아이의 맑은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가정 안에, 모든 세대 안에 그런 역사가 일어나고, 우리 사랑방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오셔서 영적 광풍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애를 써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뿌리지 않은 씨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마치 봄바람이 불면 온 땅의 언 것이 녹고, 들녘에 우리가 뿌리지 않은 꽃과 풀이 돋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일어나고 사람이 깨어나 변화할 것입니다. 

예배 안에도 하나님의 큰 역사와 은혜가 있어서 회복이 일어나고 병이 낫고, 소망이 생기고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를 일으키시면 뚜렷한 증거들이 하나님이 임하셨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기획하고 꿈꾸지 못했던 그 이상의 역사들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그것에 몸을 맡기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이하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37년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대형 교회의 명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만족하고 안주하며 수영로왕국을 만들어 숫자가 많은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몇 사람이 모였던지 주의 영이 임하시고, 사도행전의 역사를 꿈꾸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흥을 강력하게 사모하면서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날 때 우리가 맛보지 못했던 놀라운 은혜의 파도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셋째, 열방의 회복과 부흥의 꿈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부흥은 한 두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일도 아닙니다. 열방 가운데 우주적으로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역사는 산불과 같이 번져 아무도 그 불을 끌 수가 없었습니다. 타고 타 올라서 지금 우리에게까지 붙어 계속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 가운데 도시와 나라와 열방을 넘는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100년 단위로 거대한 부흥의 파도가 일어났고, 20년 단위로 중간 정도의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07년에 일어난 평양 대부흥도 세기 초에 일어난 초대형 부흥의 불길입니다. 한국 교회 안에 일어난 그 파도는 미국에서 일어난 대부흥의 불길의 열매로,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같은 젊은 선교사들에 의해 한반도까지 넘어와 조선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오늘 부흥의 파도가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갈망합니다. 오순절에 일어난 부흥의 불길이 시대마다 일어났고, 도시와 나라를 일으키고 다른 나라로 흩어져 세계 복음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은 작은 파도가 올 때는 가만히 누워서 먼 바다를 보면서 큰 파도가 오는 것을 느낍니다. 누가 부흥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부흥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도시나 교회 안에 부흥이 일어나도 어떤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부흥이 일어나기를 갈망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이 임하셨지만, 모이는 것에만 집중하고 사도행전에서 주셨던 지상명령에는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이 사도행전의 핵심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이 충만한 예루살렘 교회에 하나님께서 물리적인 핍박을 통해서 강제로 흩어지게 하셨고, 그러면서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습니다(행 13장). 

이 교회는 선교적 공동체로, 흩어지기 위해 세운 교회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그 불을 끌어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불을 가지고 복음을 흩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면서 그 교회의 탑 리더인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회의 모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부흥이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를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한국 교회를 계속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세계 선교사를 보면 모든 역사의 흐름은 선교가 어디에 머물러있느냐에 따라 흥망성쇠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사실 위기에 빠져있고,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해외에 있으면서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소식에 눈물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은 다시 가능할까, 한국 교회가 무너질 것인가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학적으로보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사용하실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 교회가 아주 뜨겁게 일어나고 있지만 세계선교를 감당할 지도자와 신학이 빈약합니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교회도 일어나고 있지만 성경에 대한 깊이가 부족합니다. 만약에 한국 교회가 세계선교를 돕고 주도한다면 주님은 한국 교회를 사용하시고 교회를 붙드실 줄 믿습니다. 

개인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선교에 헌신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2월 3일부터 있을 선교부흥회는 인생의 본질을 확인하고, 역사를 관통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선교적 삶(Missional life),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선교적’이라는 말은 우리 삶의 존재이유가 선교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하나님의 대추수와 대부흥기에 선교적 삶, 선교적 교회로 우리가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개인과 가정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 다니고 사업을 해도 선교에 눈을 뜨면, 내 인생의 존재이유를 발견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선교를 떠나지 않아도 내 삶이 ‘선교적’이어야 합니다. 지금은 말세 중에 말세이고, 어떤 때보다도 기도가 절실한 때입니다. 

이 때에 주의 영이 사도행전에 임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임하셔서 각 개인에게 구원의 사건이 뚜렷하게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겉의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변화와 혁명이 일어나고 삶의 가치와 목적이 바뀌어 진짜 크리스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일어나 성령께서 직접 통치하시며 물 붓듯이 부으셔서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각 사람 가운데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이 날마다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부흥의 불길로 민족과 세계 열방 가운데 흩어져 영혼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속히 하나님의 재림이 임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꿈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일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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