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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화를 내시다 (막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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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화를 내시다 (막 3:1-6)
 
분노의 표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요새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앵그리 버드(Angry Birds)’라는 스마트폰 앱(App) 게임이 있습니다. 작년 5월에 이미 다운로드 10억 번을 돌파한 애플리케이션(Application)입니다. 매월 4천만 명 이상이 이 앱을 사용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게임의 내용은 돼지에게 알을 빼앗긴 성난 새들이 새총으로 자신의 몸을 날려서 돼지를 죽이는 것입니다. 보통의 게임들은 폭탄을 쏘아 적을 죽이지만, 이 게임은 새들이 폭탄이 되어 터진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마치 자살 특공대처럼 스스로가 폭탄이 되어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나 자신도 파멸당할 것을 각오합니다. 세상말로 표현하면, “너 죽고, 나 죽자”는 논리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게임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이 게임은 알게 모르게 세상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혹은 뺏는 자와 빼앗긴 자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더 갖기를 원하는 힘 있는 사람들의 탐욕과 그것을 향한 한 맺힌 사람들의 피해의식, 더 나아가 복수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상대방을 공격하는 보복을 통해 충족감을 채우는 것입니다. 

개그콘서트에도 이 게임의 모습을 따라한 코너가 있습니다. 앵그리 버드로 분장한 개그맨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화가 난다, 화가 난다!” 소리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웃습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분노를 바르게 표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한국 사람만큼 화를 잘 내고, 또 마음속에 화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특별히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질환이 있습니다. 한국의 미덕인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 오래 참으라’는 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분노를 건강하게 표출시키지 못해서 생기는 질병입니다. 바로 울화병이라고도 불리는 화병입니다. 영어로는 Anger Syndrome(분노증후군)이라고 하는 이것은 화, 분노, 억울함, 우울 등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오랫동안 묻어둘 때 나타납니다. 

오랫동안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면 정신적, 신체적으로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불안하고 초조하며 우울합니다.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짜증이 나고 만사가 귀찮습니다. 가슴 깊은 곳이 억눌리는 것만 같습니다. 한 맺힘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특별히 ‘착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이 병을 많이 앓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화를 내면 금방 죄책감을 느낍니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며 불안해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형편없는 존재라고 여기며 자학합니다. 결국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분노란, 인간이 화를 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상태가 불만족스럽다는 표지입니다. 자기 기대에 미달될 때, 자기의 가치관이 누군가에 의해서 거부당할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을 때 나타나는 실망감과 불만족의 감정입니다. 때로는 당혹스러움과 적대감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 그 자체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분노를 잘 이용하면 자기 정체성을 살릴 수 있습니다. 분노는 남이 나를 무시하고, 비난할 때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또한 나의 진심을 표현하는 정당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왕따가 되는 학생들을 보면 착한 아이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이것 싫어. 이것은 안 돼”라고 쉽게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로부터 ‘너는 내 밥이야’라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또 남편이 손찌검을 할 때, 안 된다고, 이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일 앞에서 때로는 소리치며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의 정체성과 속마음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모를 수도 있습니다. 

최근 ‘건강심리학’이라는 건강 잡지에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억제만 하게 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수명이 짧아진다는 글이 실렸습니다. 맥박이 빨라지고, 혈압이 올라가고, 심혈관 질환, 신장 손상, 때로는 암까지 유발한다는 보고입니다. 자기감정을 적절하게 잘 표현할 줄 아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국민이 영국 등 북유럽 국가의 국민보다 평균 수명이 2년 정도 더 긴 것도 이런 이유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화를 내야하는 걸까요, 내지 말아야 하는 걸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화를 내지 않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요? 아니면 화를 내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나쁜 화와 좋은 화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지혜자는 화를 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언 12:16)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잠언 29:11)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은 화를 참을 줄 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도 화를 내셨습니다. 언제 분노하셨을까요? 인간들이 하나님을 하나님 대접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시지 않을 때, 하나님 대신에 거짓된 피조물을 숭배할 때 화를 내셨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웃의 소중함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거짓과 불의를 행하고 이웃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잘못된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두 가지 종류의 화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야 할 화와 내지 않아야 할 화입니다. 성경은 못된 화와 악한 분노인 경우, 화를 내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좋은 화와 의로운 분노인 경우에는 인격 전체를 동반해서 화를 내야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화를 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나는 산상설교에서 ‘형제에 대해 화를 내고 성을 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함부로 화를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통제하지 않은 화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와서 아이들에게 안수해 주실 것을 원했을 때, 제자들은 그들을 말렸습니다. “아니, 어른도 많은데 애들까지 예수님 앞에 가까이 오려고 하느냐? 다 물러가라.”하면서 쫓아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반응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마가복음 10:14) 

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바꾸는 사람들을 보시고는, 동전 바꾸는 책상을 뒤집고 채찍을 들어 그들을 쫓아내시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도 예수님이 화를 내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화와 화가 부딪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분노와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가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화를 냈습니다. 못된 분노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대 지도자들을 보시며 화를 내셨습니다. 의로운 분노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양자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의도와 목표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잘못된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화를 내셨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끌어내리고, 자기들 앞에 무릎을 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전제된 화였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때문이었지만,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는 자신들의 이익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기득권이 침해받고,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들의 편안한 삶을 뒤집어 놓으려고 하는 것을 느꼈기에 화를 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노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복음서는 갈등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당대 지도자들의 갈등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당대의 지도자들은 사사건건 부딪쳤습니다. 특별히 유대 율법지도자들과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부딪쳤습니다. 왜일까요? 정결법과 안식일법을 비롯한 율법의 이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옳은지를 따지며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손이 펴지지 않고 고통을 받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자마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질병이 이 사람에게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었을까? 남이 보고 수군거리며 흉을 볼까봐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그래서 얼마나 많이 자학했을까?’ 예수님은 이 병자를 고쳐주시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날은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예배만 드리도록 요청된 날이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 병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질병 들린 자를 향한 긍휼함도 없었습니다.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이 어떻게 치료를 받을지 호기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는지 아닌지를 감시하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걸고넘어지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마음으로 눈에 심지를 켜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결여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건을 가장했습니다. 종교적인 기득권에 집착하며, 이기적인 탐욕을 위해 종교와 율법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관행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고, 남의 고통은 쉽게 외면했습니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었습니다. 누군가 고통을 당할 때, 누군가의 존엄성이 파괴당할 때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보시며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긍휼함과 배려가 없음을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마가복음 3:4) 

안식일은 쉼의 날입니다. 하나님도 안식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신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샬롬을 얻게 될 사람과 함께 기뻐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는 날인데, 오히려 반대로 안식일법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 정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에 묶여 있었습니다. 율법 조항 하나하나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법을 죽음의 법으로 바꿔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생각을 몰랐을까요? 안식일이 생명을 주는 날, 사람을 치유하는 날, 선을 행하는 날인 것을 몰랐을까요? 예수님이 안식일에 대해 물으셨을 때, 그들은 잠잠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침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그들이 모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침묵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향한 적대감과 미움으로 그들의 지성과 이성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침묵한 것입니다. 그들은 비겁했습니다. 

감정은 참 소중한 것이지만, 때로 그 감정이 너무 커져버리면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다 막아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위해서 화를 내는지 모르는 자리로 전락하게 됩니다. 바로 그들이 그러했습니다. 잘못된 감정으로 지혜가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마음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모습에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마가복음 3:5)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기 욕심만을 챙기는 자들이었습니다. 변화하기를 싫어하는 그들 앞에서 예수님의 분노는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서라 하시고는, “네 손을 내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른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곧 손 마른 자가 믿음을 통해 고침을 받는 생명의 회복이었습니다. 

분노란, 내가 처한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인식하는 힘이고 악과 불의에 저항하는 힘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하나님이 다스리기를 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열망의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분노, 의로운 분노를 가지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 나가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생명을 다시 세우는 일, 억눌린 자를 해방시켜 주는 일, 사탄의 억압에서부터 자유하게 하는 일,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바쳐서 이것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의로운 분노를 가진 독립운동의 투사들이 있습니다. 나라가 빼앗겼을 때, 일본제국 아래에서 억압되었을 때, ‘이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겨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독립투사들이 있었기에 이 민족에게 새 역사의 길이 열릴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순교자들이 왜 순교했습니까? 하나님 외의 것들을 향해 숭배하라는 요구가 있었을 때, ‘이것은 아니다. 오직 내가 섬길 분은 하나님뿐이다.’생각하며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민주항쟁도 독재정권에 분노한 사람들로 인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개신교’라고 말을 합니다. 개신교인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불립니다. 거절하는 자들, 저항하는 자들, 분노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본 종교개혁자들이 내건 것입니다. 이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 속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내걸며 역사의 방향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분노합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그 분노의 대상이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내 게으름을 보며 분노할 줄 알아야 게으름에서부터 탈출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거짓과 음란에 대해서 분노할 줄 알아야 그것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부패와 타락에 분노해야 개혁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가지고 이 땅에서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공의 때문에 분노하기에 앞서, ‘하나님, 나도 이 타락한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함께 아파하며 하나님의 분노를 갖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망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마음속에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품고, 이 시대를 주님의 손으로 감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이끌어가고 변화시켜 나아가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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