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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롬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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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롬 12:3-8)


찰리 브라운이라는 꼬마 주인공과 스누피라는 유명한 개가 등장하는 만화 시리즈 '피너츠 퍼레이드'는 제가 대학생 시절에 아주 즐겨 읽었던 만화였습니다. 
지금은 고인인 된 원작자 찰스 슐츠라는 만화가는 그 '피너츠 퍼레이드'를 통하여 그저 단순히 웃기기만 하는 만화가 아니라 상당히 철학적이고 때로는 신학적이기까지 한 메시지를 그려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피너츠 퍼레이드' 중에 이런 한 토막의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인 찰리 브라운에게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이면서도 또한 어떻게 보면 약간 머리가 이상하기도 한 라이너스라는 꼬마친구가 있습니다. 
그 라이너스가 어느 날 학교에서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후에 선생님으로부터 "넌 애가 왜 그 모양이니? 왜 이렇게 별나니?"라고 야단을 맞게 됩니다. 
그러자 평소에 주일학교를 착실히 다니는 라이너스가 오히려 선생님에게 응수하기를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 놓은 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이 아니에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의 65억 인구 중에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쌍둥이조차 서로 무언가 달라도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서 교인이 천 명이든지 백 명이든지 제각기 다릅니다. 
얼굴 모습과 성격과 습관이 다를 뿐 아니라, 그 신앙의 수준과 정도 역시 가지각색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믿음의 분량'부터 시작해서 '섬기는 직분'과 '받은 은사'들까지 각각 다른 교인들이 모여 있으니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이 '하나의 공동체'로 세워지고 유지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설립자이신 주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은 외면적으로 조금씩 다른 차이점들이 오히려 서로 잘 조화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온전하고도 아름다운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을 통하여 실로 '다양한 교인'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진정 '화평과 질서'를 지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믿음의 분량은 좀 달라도 각자가 분수에 맞게 겸손히 처신하면 교회 전체는 일사불란한 공동체가 됩니다. 

본문 3절에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기록했습니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의 믿음이란 구원을 얻는 데 꼭 필요한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성자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처럼 고백하고 영접하는 믿음이란 가장 근본적인 믿음인 동시에 히브리서 6장 1절에서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모인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믿음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떤 차이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기본적인 신앙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이제 젖을 떼고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장성한 자의 믿음, 더욱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믿음의 성장발전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히브리서 5장 14절에서 "저희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가장 기초적인 믿음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서 개인의 경건생활이나 교회를 섬기는 봉사에 대하여 더 깊은 분별력과 지혜를 발휘할 줄 아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행일치' 혹은 '성화'로써 발휘되는 믿음에는 각 개인마다 수준과 단계의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이며, 그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의 분량"입니다.   그런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믿음의 분량'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다시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면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이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부드럽게 해석하자면 '오버'하지 말라는 뜻이고 좀 세게 말하자면 '주제넘은 짓'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교회 안에서 자신의 언행을 어디까지나 자기 분수에 맞게 지켜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대신에 교인 각자가 "하나님께서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게" 되면 그 믿음의 분량이 각자 다르다는 것이 교회 전체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지혜롭게"라는 단어의 어원을 따져보면 '겸손'과 '자제'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는 더 과대하게 포장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일단 '겸손'으로써 그런 착각을 깎아내려야 제 위치를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가진 실력보다 더 크게 과시하려는 경향이 누구나 다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알아야 분수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은 아직 조금밖에 되지 않으면서도 교회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참 똑똑한 줄로 아는 교인들이 이 지상교회에 꽤 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간절하게 기도 한 번 드릴 줄도 모르면서 당회에서는 자기가 목사보다 더 지혜로운 것처럼 나서는 장로란 정말 자기망신살을 스스로 뻗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회개의 눈물 한 번 뜨겁게 흘려보지도 못한 교인이 무슨 제직회나 전도회의 회의 시간에는 마치 자신이 제일 열심이고 똑똑한 것처럼 입에 침을 튀기면 그 얼마나 꼴불견인지 모릅니다. 
  
자기가 직접 학교 앞 전도에 나가서 한 학생을 교회로 인도해 본 적도 없으면서 그저 교육전도사라고 자기보다 실제로 몇 배나 더 열성적으로 어린 영혼들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주일학교 교사들 앞에서 권위만 내세우려는 신학생이란 그 '목사 후보생'이라는 이름부터가 창피할 뿐입니다. 
이처럼 정작 자기 속에는 믿음의 분량이 형편없이 모자라면서도 머리만 커서 스스로 자기가 꽤 훌륭한 신자인 줄로 오버하고, 구체적인 봉사나 충성은 없으면서 그저 교회 일에 대한 판단이나 노하우만은 자기가 최고라고 주제넘게 착각하고 있는 교인, 이처럼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야말로 교회에 가장 해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건전한 '자기 존중심'(self-esteem)은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합니다. 
자신을 너무 비하시키면 사람 꼴이 될 수 없으며, 만성적인 자괴감에 빠지게 되면 결국 자살까지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과대망상적인 자존심'(over self-esteem)은 그 본인을 망칠 뿐 아니라 곁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해를 끼치게 됩니다. 
믿음의 분량을 넘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자기 머리만 굴리는 교인이 교회 안에서 바로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재산이나 지위나 미모는 이 세상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람 평가 기준들이지만, 각자가 가진 '믿음의 분량'은 교회 안에서 통해야 할 유일하고도 필수적인 평가기준입니다. 
비록 그 분량에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각자가 자기 믿음의 분수를 따라서 스스로를 겸손히 판단하고 교회 일에 자제하면서 처신함으로써, 우리 경향교회를 전체적으로는 아무 내분이 없는, 일사불란한 공동체로 함께 세워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직분은 서로 달라도 각 교인이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모시면 교회 전체는 한 몸으로 단합된 공동체가 됩니다. 

4절과 5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진"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믿음의 분량이 각각 다른 까닭에 그 각 지체가 생각해야 할 분수도 다르고 그 결과 각자가 맡는 역할, 즉 "직분"도 각각 다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다른 지체들이 한 몸으로 연결되어 각기 제대로 맡은 구실을 할 수 있게 되는 유일하고도 틀림없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길입니다. 
그것은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는 지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 몸에서도 신경을 통하여 뇌에 연결되어 있지 않는 지체는 명령을 받을 수 없으니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아니 몸통에 붙어 있기는 해도 그처럼 뇌에 연결되어 있지 않는 사지나 오장육부는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성도는 교회 안에서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 여러 다른 은사와 직분들을 가지고 있지만, 일단 그리스도라는 한 머리에 공통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으로써 비로소 신앙인으로서 살아 있고 교인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지체'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내가 그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교회의 참된 일원, 곧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수 있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시요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그 본성은 원래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이것 외에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될 수 있는 길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르고도 참된 예수 신앙고백을 통하여 교회에 접붙여지게 된 지체는 자연히 그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받드는 겸손, 그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는 충성, 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지체된 성도들을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일단 그 머리에 영적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그 지체가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두 사람이 같은 교회 안에 붙어살고 있는 듯이 보여도 그 둘 사이가 그리스도라는 머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설사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처럼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도 그 둘은 종잇장 하나도 집어 들 수 없게 됩니다. 
신경을 통하여 뇌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위치적으로 아무리 가까이 있는 지체라도 그 어떤 상호 연계 작동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편당이 생기고 교인들이 갈라지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쪽은 확실한 신앙고백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이 되어 있는데 다른 한쪽은 겉만 교인이지 실제로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조차 되어 있지 않으면 그 두 사이에 무슨 화목이나 연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쪽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명령을 받고 기도를 통하여 그것을 확신한 후에 무슨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다른 한쪽은 그저 자기 머리만 굴리면서 억지를 부리고 세상 사회에서 하던 방식을 끌어와 교회 안에서 고집 세우고 있으니 그 두 사이에 무슨 협동은커녕 기본적인 사랑의 관계조차도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같은 기독신자라 해도 '믿음의 분량'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는 확실히 연결될 수 있는 기본적 믿음의 분량만큼은 꼭 공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각 개인의 경건생활의 수준이 다르고 각 개인이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하는 정도는 서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이 믿음만큼은 필수적으로 확실히 가지고 있어야만 최소한 '교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아니한 교회의 참된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각자가 교회 안에서 가지게 된 직분은 달라도 바로 '예수 신앙고백'이라는 이 공통분모만은 확실히 지킴으로써, 각자가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는 살아 있는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하나의 공동체를 함께 든든히 세워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은사는 각각 달라도 자기가 받은 사명대로만 충성하면 교회 전체는 힘 있는 유기적 공동체가 됩니다. 

6절 이하 8절에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일단 바른 신앙고백을 통하여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는 공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교회의 지체들은 또한 "그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른" 교인들이 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자신의 분수를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신자는 자기가 그 교회를 위하여 제일 잘 섬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또한 바로 찾아내어야 합니다. 
즉 '믿음의 분량'에 있어서는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라는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있지만, 교회를 섬기는 은사는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따라 각각 다르게' 아예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본문에서 "예언"이라고 일컫고 있는 은사는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장래 일을 미리 말하는 선지자의 은사였습니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 와서는 꼭 미래를 예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파하는 것을 총망라하는 의미로 자주 쓰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4장 3절에서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라고 '예언'의 은사를 일반적인 설교 사역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사명은 사도의 직분 다음으로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는 말씀은, '만일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 역시 자기 분수를 지켜서 사도의 권위를 침범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섬기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은사가 각 개인 신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어떤 교인은 "섬기는 일"의 은사를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집사'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집사가 교회 안에서 행하게 되는 여러 가지 봉사의 직분들을 총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어떤 단체 안에서든지 남들이 잘 눈여겨보지 않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꼬박꼬박 챙기고 남들이 귀찮아하는 뒤치다꺼리 같은 일들을 도맡아서 하는 사람은 실제로 아주 소중한 존재이며,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르치는 일" 역시 훌륭한 은사입니다. 
초대교회에서도 기록된 성경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체계적으로 해석하여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도가 부족했던 당시 교회를 세우고 키워가는 일에 아주 큰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주일학교나 SFC를 통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나 구역예배를 통하여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구역장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요긴한 직분입니다. 

"권위하는 자"라는 말은 '격려하는 자' 혹은 '권면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설교나 성경공부는 아니지만 성도들을 개인적으로 심방하거나 전화를 걸어서 약한 교인을 잘 타이르고 일깨워주며 어려움을 당한 교인을 잘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것 역시 보통 훌륭한 은사가 아닙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바로 여전도사님들이나 권사님들, 심방장님들이 이처럼 '권하고 위로하는' 은사를 받아 섬기고 있는 분들인 것입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섬기라고 했는데, 여기서 '성실함으로'라고 번역된 말은 '순수한 마음으로'라는 뜻이 일차적인 의미이지만 때로는 야고보서 1장 5절 같은 데서처럼 '후하고 관대하게'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본문에서도 문맥으로 볼 때 후자의 의미가 적절할 것으로 보입니다. 
구제는 어떤 특별한 직분을 받은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다 행해야 할 '개인적인 은사'이지만, 적어도 집사가 된 자들은 필수적으로 행해야 할 사명이기도 합니다. 
주변의 어려운 성도들에게 후히 나누어 주면서도 그것을 '오른손 하는 것을 왼손 모르게' 하듯 하는, '숨어 있는 큰 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은사이겠습니까?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라고 했는데, 이것은 교회의 리더로 임명 받은 감독이나 장로들을 가리켜 하는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부지런함으로"라는 말은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목사, 장로라고 해서 매사에 다 완벽할 수는 없고 때로 실수도 할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교회를 다스리는 이 중차대한 사명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가지고 부지런히 섬기는 자세만큼은 필수적으로 보여 주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하라"는 말씀에서 '긍휼을 베풀다'라는 말은 구제와는 또 좀 다르게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을 직접 돕는 자원봉사'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병든 교인을 위문하거나 재해를 만난 이웃을 도와주는 일을 '즐거움으로' 할 줄 아는 것, 즉 이모저모로 남에게 사랑을 베풀어 줌으로써 자신이 오히려 희열을 느끼고 그것을 마치 즐거운 취미생활처럼 여길 줄 아는 것은 오직 참된 신자만이 발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멋진 은사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처럼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쓰이는 여러 가지 은사를 따라서 자신의 현주소를 찾아야만 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직분을 받아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내가 교회에서 얼마만큼 없어서는 아니 될 요긴한 지체로서 사용되고 있는지 바로 여기에 우리 자신의 존재가치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교회에 한 주일만 빠지게 되어도 주일학교에서, 찬양대에서 아주 아쉬워하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까? 그 사람은 그만큼 교회에서 소중한 지체가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전도회에서, 집사회 권사회에서 임원을 맡지 않으면 그 해당 기관이 잘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은 교인들이 아니라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아주 요긴하게 쓰고 계시는 VIP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의 성도들은 '교회에서 자기가 일할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에 나와도 앉을 자리가 없다.'라는 멋진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까닭에 우리 모두는 이처럼 교회를 통하여 자기 은사를 활용함으로써 교회에 꼭 필요한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각자가 받은 은사는 달라도 그것들이 다 교회에서 요긴한 것임을 깨닫고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함으로써, 개인적인 다양성 중에서도 교회적으로는 합력하여 큰 선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꽃은 어울려 피어 있는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가지 종류의 꽃만 많이 모여 있는 것보다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형형색색으로 어울려 있을 때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통해서도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군인처럼 똑같은 제복을 입고 기계적으로 줄을 맞추어 서 있는 군대가 아니라 각 교인들이 제각기 다른 '믿음의 분량'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중에도 각자가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겸손하고도 지혜롭게 처신하면 전체적으로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회사에서는 직급의 차이가 서로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되고 그로 인하여 때로는 노사분규까지 생길 수밖에 없지만, 교회 안에서는 여러 직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목사로부터 시작하여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오직 '예수 신앙'으로써 '한 몸 안에 연결된 같은 지체'로 교통하게 됩니다. 
  
세상 사회에서는 성격과 배경과 학력과 능력이 각기 다른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만나다 보면 서로 질투하고 반목하고 경쟁하고 싸움까지 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과 기능에 충실함으로써 개인적으로는 보람을 느끼고 공동체 전체는 활기차게 움직이게 되는 것이 바로 세상 단체와는 구별되는 교회 고유의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중심으로 '오직 예수님만을 한 주님'으로 섬기는 가운데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의 사명을 위해 즐거이 헌신함으로써, 각자의 인간적인 다양성 가운데서도 영적 통일성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 개인적인 차이점 가운데서도 오히려 그 개성들이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잘 쓰이게 되는 멋진 교회를 함께 세워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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