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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아버지가 주신 잔 (요 1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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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주신 잔 (요 18:1-12)

겟세마네로 가시는 주님

다락방 훈화 직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1-2)  

겟세마네는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의 서쪽 기슭에 있습니다.  기드론 시내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성과 겟세마네는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겟세마네”란 이름은 “기름틀”이란 뜻입니다.  이곳에는 감람나무가 많았는데 아마 이 감람 열매로 기름을 짜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겟세마네는 예수님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에게 기도처요, 안식처요, 사색의 장소요, 야영지요, 잠자리요, 제자들과의 회합 장소였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고난주간 이외에는 예수님이 어느 집에서 묵으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는데 나는 머리 둘 곳이 없구나!” 하신 주님.  아마 주님은 많은 시간들을 이 야외에서 홀로 지내셨을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이 지니는 영적 의미는 매우 큽니다.  
  
첫째로, 고난의 장소입니다. 겟세마네란 이름은 “기름 틀(oil press)"로써 쥐어짠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겟세마네는 고난의 장소였습니다.  거처도 없이 이슬을 맞으면서 주무시던 곳이 바로 겟세마네요, 십자가 죽음을 생각하면서 고뇌하신 곳이 바로 겟세마네요, 마지막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된 곳도 겟세마네입니다.  

겟세마네는 위치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겟세마네와 예루살렘 사이에는 기드론 시내가 있습니다.  기드론 시내는 여름에는 말라있고 겨울에만 물이 흐르는 wadi입니다.  “기드론”이란 이름은 히브리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뜻은 “dark”입니다.  어둡고 암울한 느낌이 듭니다.  

구약 시대 기드론은 어두운 역사의 장소입니다.  때로는 우상 제물을 태우고, 때로는 우상 자체를 불태운 곳입니다.  메시아의 상징인 다윗 왕의 어두운 시절이 깃든 곳이 기드론입니다.  다윗은 친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삼하15장)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고 친 제자에게 배반당하여 이 기드론을 건너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다윗을 반역했던 참모 아히도벨은 고향으로 돌아가 목매어 자살했습니다.(삼하17:23)  다윗의 반역자 압살롬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머리채가 나무에 걸려 매달린 채로 요압의 창에 심장을 찔려 죽고 맙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맙니다.  기드론은 역사적 고난의 현장이요, 겟세마네는 바로 그 기드론을 내려다보는 고난과 고뇌의 처소였습니다.  다윗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장면입니다.  
  
둘째로, 겟세마네는 복종의 장소입니다.  “겟세마네 동산” 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평소에도 주님은 이곳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지만, 특히 잡히시기 전날 밤에 기도하신 곳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기꺼이 지겠다고 기도하셨습니다.  “동산”이라는 장소는 인류의 운명과 상당한 관련이 있습니다.  

에덴 동산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그곳에서 아담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여, 죽음을 안고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고전15:45)는 인류를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또 다른 동산 겟세마네로 오셨습니다.  첫 번째 동산에서 아담은 불순종으로 인류를 죽게 만들었으나, 두 번째 동산에서 예수님은 절대 순종하심으로 인류를 영생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난의 장소요, 복종의 장소인 겟세마네를 향하여 제자들과 함께 나아가셨습니다.


내가 그니라

예수님이 겟세마네에 계시는 동안에 예수 체포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3)  공회는 유월절을 기회삼아 예수를 체포하기로 작정하고 로마 총독에게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로마 총독은 일단의 군대를 동원하여 공회원들을 도왔습니다.  로마 식민지에서 대중적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로마 정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절에 “군대(spei'ra)”란 말은 라틴어로 “cohors”입니다.  

로마 군단의 10분의 1쯤 되는 규모로 통상 600명 정도의 보병대대입니다.  이 “군대”란 명칭 앞에 정관사가 붙은 것에 의미를 둔다면 아마 이 부대는 잘 알려진 부대였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토니아 요새를 수비하던 경비대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에 “군병들”이라고 하지 않고 “군대”라고 했습니다.  그 부대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 부대의 상당 부분이 동원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200명 이상의 군대가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 당시 죄수 몇 사람을 호송하기 위해서 총독은 백부장 휘하에  수백 명의 군대를 동원한 사실이 있습니다.(행28:37)  
  
이 군대 외에도 성전을 경비하던 경비원들도 동원되었습니다.  이들은 일찍이 예수님을 성전에서 체포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7:44)  평소에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혹은 예수님을 지지하는 세력이 크게 대항할 것으로 짐작하여 다수의 군대를 동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체포에 1등 공신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완전히 체포되기까지 시종 앞장서서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을 원수들에게 알려 주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입맞춤으로써 알려줬습니다.  입맞춤은 사랑과 헌신의 표시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에게 입맞춤으로써 신뢰와 복종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입맞춤을 반역의 신호로 삼았습니다.  
  
군병들은 칼과 몽치, 곤봉, 등, 횃불 등으로 무장했습니다.  평소 무장을 하지 않는 성전 경비원들 까지도 무장을 하고 나섰습니다.  등을 밝힌 것으로도 족할 것인데 횃불까지 들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숨는다면 수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월절은 만월이 되는 날이기 때문에 훤히 밝습니다.  그래도 횃불을 준비한 것은 이들이 얼마나 체포에 열을 올렸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체포하러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을 대하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위축되거나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당당히 체포에 응하셨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잡혀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4-6)  

주님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유다의 반역도 아셨습니다.  로마군대의 움직임, 산헤드린 공회의 음모, 체포당하실 날짜, 시간, 장소, 다가올 죽음.  그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오히려 체포에 나선 로마 군병들이나 성전 경비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능동적으로 체포에 응하셨습니다.  주님과 군병들의 대화를 보세요.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4)  군병들이 먼저 물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군병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저희가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라!”(5)  주님은 답하셨습니다. “내가 그니라!”(5)  “내가 그니라!”는 말은 “너희가 찾는 사람은 바로 나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군병들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군병들이 뒤로 넘어진 현상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로, 앞에 서 있던 군병들이 예수님의 당당한 모습에 놀라서 뒷걸음질 하는 바람에 뒤에 있던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넘어졌다고 보는 해석입니다.  둘째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적적으로 그들이 나가 떨어졌다는 해석입니다.  

“내가 그니라!”(!Egwv eijmi. I am)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신분, 특히 신성을 나타낼 때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놀라서 넘어졌든지, 이적적으로 넘어졌든지 군병들이 당황했던 것은 틀림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체포하려고 많은 군대와, 무기를 동원했습니다.  숨을 경우에 대비하여 수색할 준비까지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 뜻 밖에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예수다!” 하고 나서니까 놀라 자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체포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잡히신 것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입니다.  아버지가 주신 사명,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사명입니다.  주님은 그 책임을 지시려고 당당하게 응하셨습니다.  체포당하고, 구금당하고, 구타당하고, 모욕적인 재판을 받고, 죽기까지!  그래야만 양을 살리고, 그래야만 마귀를 멸하고,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스스로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따라야 될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으라!  내 책임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면, 누가 찾기 전에 스스로 나서야 됩니다.  “그래 당신들이 찾는 책임자가 바로 나요!  내가 책임지겠소!  나에게 책임지우시오!  필요하다면 나를 붙잡아 가시오!”  이것이 바로 사명자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책임을 지는 사람들입니다.  가정적 책임, 교회적 책임, 사회적 책임, 국가적 책임!  교회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 책임을 짐으로써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바클레이는 그의 수필에서 교회의 책임을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환자 노인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은 기독교에서 시작되었다.  기독교가 등장할 때까지 병원은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 국가의 법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장애자인 자식을 키우는 일은 법률에 의해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파라오는 농경에 관한 규칙을 말하는 가운데, <일을 할 수 없게 된 늙은 노예는 밖에 버려서 죽게 하면 된다. 망가진 농기구를 쓰레기장에 버리듯이>라고 권하였다.  

기독교 윤리를 제거해 버리면 복지국가도 없어질 것이다.  독일에서는 기독교를 제거함과 동시에 노인은 개스실에서 마쳤고, 환자와 가난한 사람은 의학 실험에 사용되었으며, 유태인은 무수히 고문을 받고 죽었다.  언론 및 양심의 자유는 기독교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자유들을 획득한 모체는 교회였다.  기독교를 떼어내 보아라.  그러한 자유들도 또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러시아는 기독교를 제거한 후에 야당이 존재하지 못했고, 정부를 비판하는 일은 자살행위가 되었다.  오늘날 특권만 바라고 책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기독교 문명의 특권을 누리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과연 자기가 문명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된다.  만일 노력하고 있지 않다면,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자신들의 특권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도 자기 자신을 원망할 수 밖에 없다.  누구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참 신자라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데만 똑똑한 사람 되지 말고, 책임지는 일에도 똑똑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이기적입니다.  자기 책임을 최대한 피하려고 합니다.  군대 기피하고, 세금 기피하고, 힘든 일 위험한일 더러운 일 기피합니다.  그래도 잘 사는 사람을 유능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야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마세요.  나는 오직 하나님이 주신 내 책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이 주신 책임 때문에 스스로 붙잡히고 있습니까?  책임이란 언제나 자기희생을 요구합니다.  희생 없이 지는 책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책임을 지기 위해 100% 희생하셨습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주님은 로마 군병들에게 당부합니다.  “너희가 찾는 것은 바로 나다.  그러니 여기 내 제자들은 놓아달라!”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은 자신의 생명으로 제자들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이미 십자가에서 책임지셨지만, 그들의 육신의 생명까지도 책임지셨던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1-15)  

선한 목자는 양을 살리기 위해 자신은 죽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물질을 손해 보고, 시간을 바치고, 몸으로 희생하고, 마음고생도 하고, 명예가 손상되고, 오해를 받고 외면당하고,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해야 책임은 완수됩니다.  희생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에 책임 수행을 못 합니다.  
  
오늘 내가 지고 있는 책임이 뭔가요?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야 될 책임, 예배할 책임, 전도할 책임, 기도할 책임, 말씀을 듣고 행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돌아보고, 위로하고, 바로 잡고, 바르게 살아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조건들에 대하여도 책임을 져야합니다.  생명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직장에 대하여, 사업에 대하여, 재산과 소유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합니다.  

가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고, 민족과 국가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생존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면서 살아야합니다.  내가 남보다 나은 조건을 갖췄습니까?  그런 조건을 주신 하나님께 책임을 지세요.  공중에 나는 새도 새끼를 품을 줄을 알고, 먹이를 날라다 먹이고, 스스로 날기까지 돌아봅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 백성입니다.  위에서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기꺼이 지도록 하세요.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위해서 기꺼이 체포 당하셨습니다.  양들의 죄 값을 책임지고, 양들의 질병을 책임지고, 양들이 갇히고 억눌린 것을 책임지고, 양들의 생명에 대하여 무한 책임을 지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무한 책임 아래서 영생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 책임지는 인생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사람들에게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10)  예수님을 체포하려던 말고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가졌던 칼은 단검(mavcaira)입니다.  

J. Jeremias에 의하면, 유월절에 검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불법이었으나, 장신구로써 가지는 것은 괜찮다고 했습니다.(Mishnah  Shab.6:4, 랍비 R. Eliezer의 교훈)  누가복음에 보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은 그들이 지닌 두개의 칼을 주님께 보여드렸고, 그 때에 주님은 “족하다”(눅22:38)고 하셨습니다.  

족하다는 말씀은 무기로서의 용도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 검을 다른 용도로 지니고 다녔는데, 겟세마네에서는 사람을 찌르는데 사용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당황하고 흥분해 있었습니다.  다급하게 칼을 뽑아 휘둘렀습니다.  그 바람에 예수님을 체포하려던 대제사장의 하인이었던 말고의 귀가 잘렸습니다.  
  
칼을 뽑아 휘둘렀던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말고의 신분(대제사장의 하인이란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D. Daube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대제사장직을 박탈하는 수단으로 귀를 잘라버리는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귀가 잘린 것은 대제사장의 결격 사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말고의 귀를 자름으로써 대제사장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모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때에 베드로가 고의적으로 말고의 귀를 자른 것이 아니라, 머리나 얼굴을 노린 것이 투구 때문에 실수로 귀만 잘랐다고 합니다.  아무튼지 베드로의 행동은 과격하고 무모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검에 대하여 주님은 즉시 “칼을 칼집에 꽂으라”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검은 실패작입니다.  당연히 도로 거두어져야만 했습니다.  검을 거둬야만 되는 까닭은 세 가지 입니다.  
  
첫째로, 검을 휘두르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검을 휘두르러 오신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러 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  “잔”이란 말은 십자가 죽음을 의미하는 말로써, 겟세마네 기도 중에도 나타납니다. (마26:39,막14:36,눅22:42)  

구약성경에서 잔이란 말은 하나님의 진노와 고난을 의미했습니다. (시23:5,75:8, 사51:17, 22, 렘16:7,25:15, 겔23:31-33, 계14:10,16:19)  예수님은 이 잔을 “아버지가 주신 잔”이라고 하셨습니다.  체포당하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 죽음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어떤 분은 베드로의 검을 가리켜서 “반역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 가로막는 검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6:5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예수님은 무능해서 당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의 행동 원리이기도합니다.  우리는 나의 뜻을 관철하고자 행동할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관철하고자 행동해야 될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의 전쟁은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에 눈에 보이는 무기는 소용이 없습니다.  Wiersbe 목사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네 가지로 꼽습니다.  wrong enemy, wrong weapon, wrong motive, wrong result!  잘못된 상대를 향하여, 잘못된 무기를 사용하고, 잘못된 동기에서,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다!  

콜레라나 페스트를 없애기 위해서 원자탄이나 수소탄을 사용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파리나 모기를 잡기 위해서 탱크나 자동 소총을 사용한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예수님은 마귀와 싸우고 죄와 싸우려고 하시는데, 로마인들이나 공회원들은 칼과 몽치를 들고 나섰습니다.  거기에 대항하여 베드로까지 식칼을 뽑았습니다.  웃기는 모습들입니다.  주님이 없애고자 하신 것은 죄와 사망입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상대는 죄를 짓게 만드는 사탄과 악의 영들입니다.  그들은 칼로 대항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2-17)  
  
우리가 정말 가져야 될 칼은 성령의 칼이요, 말씀의 칼입니다.  종교 개혁자 Calvin은 베드로의 검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베드로가 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 한 것은 매우 경솔한 짓이었다. 믿음은 그의 혀로 증명됐어야 했다. 그는 신앙을 고백해야 될 순간에는 부인하고, 오히려 명령받지 않은 일에는 소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례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열심을 순화시키는 법을 배워야 된다.  육신의 충동적인 요구는 하나님의 명령 이외의 것을 감히 행하도록 만든다.  하나님 말씀 이외의 것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무식한 열심이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진정한 용기는 칼에 있지 않고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는 칼을 휘두르는 용기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는 용기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잘라놓은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주셨습니다.  말고는 예수님을 체포하려다가 두 번 놀랐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가 자기의 귀를 잘라버리는 통에 놀랐고, 두 번째는 예수님이 자기의 귀를 도로 깨끗이 붙여주심으로 놀랐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혹시 말고가 예수님의 사랑에 감화되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어떤 전쟁을 하고 계십니까?  육의 전쟁입니까, 영적 전쟁입니까?  영적 전쟁이라면 세상 무기는 버리세요.  신령한 무기를 가지세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원하신 무기는 사랑의 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의 칼입니다.  사랑의 검은 누구에게나 휘둘러도 좋습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원수에게든 마음 놓고 휘두르세요.  싸움을 하려거든 분내고 헐뜯어서 남 눈물 나게 만들지 말고, 마귀와 싸우고 죄와 싸우세요!  베드로처럼 혈기부리고 남의 귀나 잘라 내지 마시고!  
  
셋째로, 우리가 주님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지키기 위해서 칼을 뽑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자신을 지키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목자요 우리는 양입니다.  우리는 가끔 건방진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내 칼로 지키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나의 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키시므로 지켜집니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을 보세요.  성지 회복을 외치면서 교권자들이 일으킨 전쟁이 바로 십자군 전쟁입니다.  결과는 아무 소득도 없었습니다.  말이 십자군이지 나중에는 천당 팔아서 어린이 십자군까지 만들어 가는 도중에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약탈과 살상을 일삼아 복음을 가로막고, 오늘날 터키는 회교나라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완전 실패작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회는 인간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키시는 것이요, 총과 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칼 들기 좋아하지 마세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  우리는 칼을 들지 않아도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칼을 들지 않아도 안전합니다.  교회도 안전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즐거워라.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2) 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나를 못 위로해 주나, 거기서 평화를 누리리라.  (3) 주 날개 밑 참된 기쁨이 있네. 고달픈 세상길 가는 동안 나 거기 숨어 돌보심을 받고,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


맺는 말

우리는 겟세마네로 주님과 함께 가야합니다.  겟세마네는 고난의 처소입니다.  죄와 싸우는 고난의 처소, 구원을 이루는 고난의 처소입니다.  겟세마네는 순종의 처소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복종의 처소입니다.
  
겟세마네의 주님은 자기 책임을 완수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아버지의 잔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사명, 책임, 본분, 임무.  겟세마네는 그 모든 것이 완벽히 수행된 곳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 사명에 책임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 사명을 위해 희생도 감수해야 합니다.  
  
겟세마네에서 베드로는 칼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그 칼은 거두어졌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칼을 뽑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전쟁은 마귀와 죄악과 사망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 말씀, 믿음, 사랑, 신령한 은사들로 싸우는 전쟁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칼을 뽑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몸과 영혼을 전적으로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라 겟세마네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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