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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필요합니다 (요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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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필요합니다 (요 13:31-35)

남자가 나이 들면서 필요로 하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 마누라, 둘째 아내, 셋째 애들 엄마, 넷째 집사람, 다섯째 와이프랍니다. 반면에 여자들이 나이 들면서 필요로 하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딸, 둘째는 돈, 셋째는 건강, 넷째는 친구, 다섯 번째는 찜질방이라고 합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결코 웃을 수만 없는 것이 나이가 들면서 남녀가 원하는 것이 이렇게 달라진다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사랑을 사모하고, 여자는 현실적이 되어간다는 해석도 할 수 있겠고, 남자는 나이 들수록 독립성을 포기해 가고, 여자는 나이 들수록 해방을 꿈꾼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남자는 나이 들수록 곁에 있을 부인이 필요하지만 여자에게는 나이 들수록 아예 남편이 필요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남자들이 깊이 생각하고 살아야 됩니다. 나이 들어 필요도 없고, 버리고 싶은 남편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아내를 정말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될까 말까하다는 것을 남편들이여 아십시오. 

여러분, 사랑하고 있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되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며 인정받는 사랑입니까? 소설가 [양귀자] 씨가 <모순> 이라는 책 속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재미있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거리에서나 비어있는 모든 전화 앞에서 절대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전화만 보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올 것 같고, 또 전화만 보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 걸고 싶어 못 견디는 것이다. 전화벨이 울리기만 하면 그 사람인 것 같고 오랫동안 전화벨이 울리지 않으면 그 전화가 고장 났나 생각된다. 그것이 사랑이다. 또한 모든 거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는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 그것이 사랑이다.” 그랬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기다리며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행복해합니다. 그를 보면서 행복해합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냥 행복합니다. 사랑이면 어떤 일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어떤 고통이라도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몇 가지의 모드의 사랑이 있습니다. 먼저는 “네가 나를 사랑하듯 내가 너를 사랑할 것이다.” 식입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율법적인 사랑입니다.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네가 어떻게 대하든지 상관없이 나는 내 방식대로 너를 사랑하노라.” 는 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독선입니다. 이것 또한 서로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네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  는 식입니다. 멋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건 사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서운 집착입니다. 집착은 대부분 그 마지막이 좋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랑한다고는 하나 결국 우리의 모든 사랑이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때론 상처를 주기고하고, 이 사랑 때문에 병이 나기도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사랑이 곧 미움으로 바뀌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이 사랑이 조금만 잘못 되면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어 가고 맙니다. 사랑이 빗나가서 범죄가 되고, 살인이 된다면 이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결국 인간의 사랑이란 언제나 불완전한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 이런 불완전한 사랑의 홍수 속에서 우리들이 찾아야할 사랑의 형식은 무엇일까요? 그 사랑의 동력을 어디에서 얻어야하느냐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랑을 하되 상처입지 않고, 병들지 않을 사랑의 시작을 어디로부터 할 것이냐의 문제는 정말 중요한 사랑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요한 문제의 해답을 오늘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무엇입니까? 34절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자, 우리가 사랑해야할 모티브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내가 너를 사랑할 것이다.” 

이것입니다.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미워하고 싶어요. 어떻게 되든 상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건 내 마음이요, 내 감정이지만 다 접어 두고 내가 받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실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사랑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앙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받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내가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에 대해서 아예 모른다면 할 말이 없지만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받은 자의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35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바꾸어 이해해 볼까요. 그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아는 제자라면 내가 보여 준 그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라고 말씀하시는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는 사랑의 모델, 사랑의 속성, 사랑의 길, 사랑의 지혜, 사랑의 가능성, 사랑의 결과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그때에 주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한 겁니다. 절대로 의인을 사랑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마음에 드는 의인만을 골라서 사랑한다고 하다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꼭 알고 있어야합니다. 사랑이란 애당초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요, 원수 같은 자를 그대로 사랑하는 겁니다. 참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은 의롭다 하시는 겁니다. 죄인을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아가 값을 대신 지불하는 사랑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는데 그 죄의 대가로 벌을 받아야 한다면 주님이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값을 지불해야 할 것을 주님이 지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바로 의롭다 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랑을 짜증내시거나 억지로 하신 것이 아니라 기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목숨을 내 주는데 즐거워했다는 것은 보통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1절을 봅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그 사랑의 결과를 영광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하면서 징징 울고 짜는 우리식의 사랑의 결과와는 다른 기쁨과 감사와 영광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받은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었단 말입니다. 

요1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즉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제자들과 더불어 마지막으로 만찬을 드시기 위해서 빌린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대나라는 어떤 집을 방문했을 때 발을 씻겨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사막지대였기 때문에 샌들을 신고 하루 종일 다니다보면 발이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손님을 맞이하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집집마다 현관에 놓인 물동이와 대야를 가지고 그 손님의 발을 씻기는 일이었고 당시 발을 씻겨 주는 일은 주로 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모여 있는 이 다락방은 빌린 장소이기 때문에 집주인이 나와 지켜 서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물동이와 대야는 물론이거니와 수건까지도 준비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씻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마땅히 종들이나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 종의 자리를 자원하겠습니까? 한참 저녁식사가 무르익을 즈음에 주님께서 일어서십니다. 그리고는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차례로 씻기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실천, 봉사의 실천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나를 희생하며 사랑의 본을 보여야하는 종의 자리를 자처해서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랑을 보여주셨고, 이런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다툼 보다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미워하기보다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기 하는 것보다 서로 도와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트집을 잡기보다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손가락질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향해 흉보는 것도 멈추고, 오직 사랑만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특별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는 몸을 사리는 비겁함 보다는 희생하는 사랑, 봉사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발을 씻어주기를 바라는 것보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어주는 봉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한다하면서도 내 아픔을 쏟지 않으려고 하고, 사랑한다하면서도 내 고통을 쏟아 붓지 않으려는 사랑은 순전히 사랑의 욕심일 뿐입니다. 주님의 사랑처럼 성숙한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서 자기를 비우는 행위요,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상대방의 발을 씻는 헌신이며 남을 대신하여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희생의 사랑입니다. 

오늘 주님은 그 사랑의 행위를 원하고 계십니다. 교회를 위한 자리에 즐거이 희생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리에 기꺼이 봉사할 줄 아는 사랑의 사람이 필요하다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보여주신 사랑, 그대로를 서로에게 보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나타내는 길은 주님의 그 사랑을 보여 주는 행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그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내가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할 사람임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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