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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고난의 가시면류관 (막 15: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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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가시면류관 (막 15:16-20)


I. 서언

일찍이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나르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빼고 설교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챨스 스펄젼은 그의 임종시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나의 평생의 설교와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저도 설교를 하는 목사로서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복음이 없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고, 예수의 보혈이 없는 설교는 설교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설교를 하려면 못내 자신감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설교만큼은 하면 할수록 내게는 무한한 자신감과 확신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II. 당하신 고난의 의미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 형이 결정되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예수께서 로마 군병들로부터 희롱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멜 깁슨의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오래전 우리나라에서도 상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신적인 고통과 영적인 고통 즉 내면적 고통을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한 성서학자는 “이 희롱의 순간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심리적으로는 더 아프고 힘든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을 총독의 관저로 끌고 들어갑니다. 거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님을 부서진 의자에 앉혀놓고 옷을 벗기고 낡은 홍포를 입힙니다. 머리에는 지독한 가시, 팔레스타인 아카시아 나무와 싯딤나무 그리고 잔가시가 많은 스피나 크리스티 나무를 엮어 만든 관을 씌우고 손에는 갈대를 들린 다음 그 앞에 무릎을 끓고 “유대인의 왕 만세”를 떠들며 조롱했습니다. 이어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그 조롱은 비열하고 또 한편 잔인했습니다. 이들의 희롱은 즉흥적으로 꾸며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엔 깊은 계시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그 한토막도 의미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1.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벌거벗은 수치감은 창세기 3장 선악과를 따먹은 죄와 더불어 왔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며 곧 모멸입니다.

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감추시기 위해, 벌거벗기움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② 주님께서는 내가 당할 수치와 창피를 덮으시기 위해 당신이 친히 수치를 감당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은 당신의 옷이 벗겨지시므로 장차 우리가 입게 될 흰옷 - 영광의 옷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④ 옷을 벗기움 당했다고 하는 것은 신분의 박탈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여주시기 위하여 잠시나마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외아들 되심을 만왕의 왕되신 신분을 박탈당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홍포를 입으셨습니다.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신 것은 예수님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는 홍포라고 했고 마가와 요한은 자색옷이라고 했는데 사실 자색옷은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라 아마 로마 군인들의 홍포 망토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홍포는 왕의 홍포가 아니라 죄인의 홍포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1:18).

예수님께서는 주홍도포에 진홍 피를 흘려 주홍같고 진홍같은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죄의 무거운 짐으로 괴로워하며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정죄의식에 시달리시는 분 계십니까? 영혼의 진통을 안고 이곳까지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주님 앞으로 달려오십시요. 당신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눈처럼 깨끗케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채찍을 맞았습니다.

유대 율법에서는 40회이상 채찍질을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5:3에 보면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지 못하는 로마 군병들은 훨씬 더 많이 더 잔인하게 채찍질을 했다고 합니다. 

십자가 형을 지는 죄인은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납과 못, 짐승의 뼈가 주렁주렁 달린 채찍을 맞았습니다. 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몸이 약한 죄수들은 채찍을 맞는 중에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잔인한 망나니를 만나면 물 묻은 가죽 채찍을 옆구리 쪽으로 휘감아 내리쳤고 그러면 창자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엎드려 채찍을 맞으면 등에 고랑이 패여 피 고랑을 만든다 라고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바로 이 말씀을 이루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 류영모가 나음을 받았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김집사 이권사 당신이 나음을 받았도다. 아멘!

4. 그들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워 주었습니다.

갈대로 왕의 홀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무력한 존재라고 놀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반드시 그들을 아니 모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그분을 재판하던 재판관들도 그분 앞에 두려워 떨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를 조롱하던 자들도 그를 찌른 자들도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도, 나도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5. 또한 예수님의 머리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면류관은 왕관이요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금 면류관 대신 우리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조롱했습니다.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에서는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번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만왕의 왕 예수를 조롱하는 이 모습이 바로 인류의 모습이요 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온전히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예수님은 내게 조롱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슴 졸이며 나오신 분 계십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사실 때문에 핍박받으며 조롱받으며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침 뱉음을 당하신 그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습니까?

① 천군 천사들이 흠모하는 얼굴이 아닙니까? 
②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토록 보기를 원했으나 결국은 보지를 못했던 그 영광스러운 얼굴이 아니었습니까?
③ 모든 나라와 권세가 경배하고 천사들이 수중들던 왕중의 왕이 아니셨습니까?
④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그 얼굴에 야만인들의 침이 튀겨야 했더란 말입니까?

III. 가시 면류관

이 수없는 고난의 모습 가운데서도 오늘 아침 우리는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쪽박도 왕이 쓰면 왕의 밥그릇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 거기엔 크고도 분명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므로 저주의 면류관이 속죄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그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부귀, 영화, 존귀를 자랑합니다. 그 대신 저주와 고통과 아픔을 백성들에게 씌웠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왕 -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저주의 관을 쓰시고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백성들에겐 구원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갈3:13) 갈라디아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저주를 받은바 되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저주가 되었다” “저주 덩어리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내려진 저주요 우리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주는 어떤 것입니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15-19) 

이것이 율법의 저주입니다. 이 저주의 가시관이 우리 주님 머리에 씌워졌습니다.  
주님의 머리에 박힌 이 가시가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까? 
이 가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표징으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18).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가시는 인간의 영혼을 짓밟고 말았습니다. 
여기 가시 면류관은 곧 저주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가시관을 쓰시므로 이제부터 이것은 속죄의 면류관, 구속의 면류관, 용서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아픈 가시관을 쓰셨고 내게는 속죄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저주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용서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고통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사랑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2. 주님의 머리에 상처를 주던 그 면류관이 이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은 크고 작고 굵고 가는 가시로 만들어져 그것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병정들이 막대기로 면류관을 내리치자 가시들은 더 깊숙이 찔러 들어갔습니다. 바로 주님을 찌른 이 가시가 우리를 치료하는 가시가 될 줄이야. 당신의 크고 작은 상처, 나의 굵고 아픈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아무리 큰 상처도 혼자 움켜쥐고 있지 마십시요. 주님 앞에 상처를 드러내십시오. 우리 주님, 그 상처를 지금 이 시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피 묻은 손으로, 못 자국난 손으로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가정에도 직장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가시가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경험, 지울 수 없는 쓴뿌리의 아픈 상처들, 용서받지 못했다는 정죄의식들이 가시가 되어 매일같이 나를 찌릅니다. 사랑의 상처, 배신의 상처, 말 한마디, 눈짓 한번도 가시가 되어 서로를 찔러 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상처를 받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다가도 목회를 하다가도 가시에 찔려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일을 하다가도 찔릴 수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불만과 근심, 내적갈등도 가시가 되어 내영혼과 마음을 찔러 피나게 합니다. 인간들은 저마다 가시에 찔린 상처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너 혼자 아픈 것 아닙니다.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습니다.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모두가 상처투성이, 이게 세상사요 인간사 아니었습니까?

이 상처들은 어떻게 고침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우리의 찢기고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흘리신 예수의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그가 가시에 찔림으로 우리의 아픔을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 앞에 그 상처를 보이십시오. 주님께 위로가 있고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울며 도망가려 하지 마십시오. 

울며 울며 달려나와 주님의 손을 붙드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구세주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영원한 승리의 보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예수님 머리에 상처를 준 가시는 신비의 수술도구와 명약이 되어서 인생의 상처를 치료한다”라고 했습니다. 
치료하시는 그 주님 앞으로 나아 오십시다!

3. 가시 면류관이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죽으셨습니다. 마치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찌르고 도전해 오는 고난이 반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가 오는 것을 막아 주시지 아니하시고 가시를 허락하신 분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엮도록 하신 것입니다.

IV. 우리도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자

오늘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시가 괴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바라보고 그 가시로 승리의 면류관을 함께 엮어 가십시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 면류관은 이름 그대로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는 능력이 됩니다. 

성경에서 종종 성도의 모델로 제시되는 사도 바울은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 불렀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 육체의 가시를 
칼빈은 “영적인 갈등”이라고 했고 루터는 “바울이 받았던 핍박”, 
토마스 아퀴나스는 “독신생활에서 오는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했습니다. 
또 터툴리안은 “이유없는 두통” 혹자들은 “외모에서 오는 콤플렉스” 
혹은 “안질”이었다고 말하며, 라이트 후프 같은 이는 “간질병”이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나 괴로워 세 번씩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가시의 고통을 받으면 모르겠거니와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바쳐 헌신한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지 왜 이런 가시의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가 부귀영화 만사형통은 없다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그가 육체의 가시를 지녔다고 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허락한 모든 은혜가 천국의 면류관이 되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넘치도다.” 그가 이 땅에서의 보상을 기대했더라면 그는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땅의 보상보다 하늘의 면류관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았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다음의 영광스런 부활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어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십니까? 
그 십자가가 너무나 무겁습니까? 당신의 면류관도 그만큼 더 클 것입니다.

어느 구두회사의 사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고급 구두일수록 더 많이 두들겨 맞는다.” 다이아몬드도 cutting이 많이 된 것일수록 더욱 빛나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본 차이나는 뼈를 부서뜨려서 분가루처럼 고운 가루를 만든 다음에야 귀한 도자기가 됩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귀한 그릇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크게 쓰시려고 강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모세를 귀하게 쓰시려고 완전 밑바닥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다윗을 고귀한 인물로 쓰시려고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바울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드시려고 육체의 가시까지 주신 것입니다. 

V. 고통의 보상은 천국에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신의 가시가 무엇입니까? 그 가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봅니다. 
주님을 붙잡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을 봅니다. 

․당신이 고난의 가시에 찔려 울고 있을때 주님은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나도 통곡하고 울었다”
․당신이 가난하고 배가 고플때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40일을 금식했다.”
․입을 것 없어 부끄러울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발가벗기움을 당했다.”

․당신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죄없는 나도 흉악범으로 취급 받았다.”
․인생의 짐이 무거워 쓰러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상처난 어깨로 십자가를 졌느니라.”

여러분, 주님 날 위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위해 가시 면류관 기쁨으로 쓰고 가십시다. 우리 주님 내 삶의 아픈 가시를 바꾸어 구속의 면류관, 치유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삼아 주십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과 조롱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당하신 채찍의 의미요, 희롱과 조롱이 의미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 시간에 우리라는 말 대신에 자기의 이름을 넣어서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예수님이 찔리심은 ○○○의 허물 때문이요 예수님의 상하심은 ○○○의 죄악 때문이라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이(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이(가) 나음을 받았도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베드로전서 2:24에는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기에 치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한번 맞으실 때 내 몸의 질병이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실 때 내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아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뺨을 맞고 조롱을 당하는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죽었던 내가 다시 회복되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롱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채찍을 맞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변명하거나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욕하지 않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역사의 희생물이 되어 조용히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는 보상이 없다. 
선을 행하고 희생을 해도 왜 보상이 없는지 아십니까? 보상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세상에서 보상을 받으려고 너무 애를 씁니다. 

직장에서 사람들의 갈등은 무엇입니까? 나를 대접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까? “내 월급이 왜 이런가? 내 지위가 왜 이런가? 내가 몇 년동안이나 수고하지 않았는가. 왜 나한테 보상을 하지 않는가?” 또한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보상을 하지 않는다고 서로 서운해 합니다. 또 며느리는 “내가 시집에서 이만큼 고생했는데 왜 보상을 하지 않는가?”라고 불만을 터뜨립니다. 

여러분, 그것 때문에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까? 거기에 해답이 있습니까? 
누가 여러분의 그 허황된 욕구를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보상해 줘도 보상이 됩니까? 계속 목마른 보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착취당한 내 인생을 보상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의 착취당한 인생을 보상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는 그 보상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채찍에 상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 보상이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보상을 포기하십시오. 사람으로부터 오는 보상을 포기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잊을 수 없는 한이 있다고 합시다. 억울한 사건이 과거에 있었다고 합시다. 그것을 오늘 잊어버리셔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든지, 어떤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여러분에게 평화가 없습니다. 

포기하십시오. 예수님처럼 하나님에게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가세요. 
그리고 울고 싶으면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고 우세요.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시90:15). 
내가 고난을 겪은 연수대로 축복을 주시옵소서.” 

차라리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살고 여러분에게 누명을 씌우고 여러분의 인생을 황충이가 먹어 버리게 했던 그 사람들도 복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살고 여러분의 아내도 살고 남편도 살고 가족도 살고 국가도 살고 다 살게 되는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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