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나 1:12-13, 마 11:28-30)

첨부 1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나훔 1:12-13,  마 11:28-30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독생자가 세상에 오는데 앞서 와서 준비한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분주하게 시작하십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지 2년이 지난 때 기원 28년경에 하신 말씀입니다.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이 보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질병의 짐을 지고 살았고 율법의 무거운 짐도 지고 살았고 또 특히 무거운 영적이고 정신적인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마귀에게 그리고 귀신에게 억압받고 시달리고 살았습니다. 또 미래에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큰 무거운 짐은 미래가 없는 것이고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짐은 모두 죄성 때문에 주어진 짐들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이 모양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소망적이고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충만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음으로 그때부터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니시면서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 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짐 진 자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달픈 것입니다. 이 짐 때문입니다. 심방 결과를 들어보면 모두 너무 어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듣게 됩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현재가 어렵고 내일이 어렵고 장래가 불안합니다. 내일이 불투명하고 미래가 없다는 것은 짐 가운데 가장 무거운 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내용이 다른 짐

어떤 분은 질병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지금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의사는 수술해도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더 겁을 먹습니다. 의사는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말해 줍니다. 최악의 경우는 이런데 마음을 건강하게 가지면 나을 수 있다고 해 주면 훨씬 가볍게 이겨 나갈 것인데 최악의 경우만 말해 주니까 환자들이 지는 짐이 더 가중되는 것입니다. 심방을 가서 의사는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말하는데 그런데도 수술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더라 그러니 지레 겁을 먹지 말라고 말해주면 환자는 순간 얼굴이 밝아집니다. 당사자는 얼마나 그 짐이 무겁겠습니까. 

누가 대신 그 짐을 져 주겠습니까. 누구도 대신 져주지 못하고 내가져야 합니다. 큰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무겁고 두려운 짐이 영혼을 짓누르는 아픔을 느낍니다. 경제의 어려움도 무거운 짐입니다. 이 세상은 냉엄합니다. 자식들은 성장하고 오늘 현실은 막막하고 미래는 암담합니다. 그때 밀려오는 고독이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특히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습니다. 가족들 보기에 민망합니다. 그때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고 스스로가 왜소해 지는 느낌은 그야말로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젊은이들도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직장이 있는 젊은이들은 젊은이대로 직장이 없는 젊은이들은 젊은이대로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앞길이 안보입니다. 나이는 먹어가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가고 자신감은 사라지고 나오는 것은 한숨 소리뿐입니다. 저는 어느 젊은이의 한숨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 운명이 어떻게 되려고.” 또 자식이 무거운 짐인 분도 있습니다. 오늘이 이 자식들이 짐입니다. 하나 낳아서 양육하는데 왜 이렇게 힘듭니까. 무거운 빚의 짐을 진 분도 있습니다. 빚 갚을 날은 시간이 너무 빠르게 다가옵니다. 빚진자에게는 날짜가 잠도 자지 않고 달려옵니다. 

그러니까 불면증이 옵니다. 밤이 되어도 잠이 안 옵니다. 뜬 눈으로 지샙니다. 이 짐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이 불면증이 우울증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면 삶에 재미가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하구 한날 이렇게 살자니 얼마나 짐이 무겁습니까. 예수님 돌아다니며 이런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지고 있는 짐은 한결같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정신이 피곤하고 마음이 무겁고 기쁨이 없고 내일이 불안한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지고 있는 짐은 무슨 짐입니까. 여러분은 이 무거운 짐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그냥 지고 있습니까. 대책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처리 

예수님은 본문에서 이 짐을 처리하는 방법을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여기 “수고하고”는 “호이 코피본데스”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스스로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해 지친 상태입니다. 또 하나는 이상에서 말한 여러 짐을 오래져서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여기 “무거운 짐”은 “페포르테스메노이”입니다.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채 계속해서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부과되는 율법과 유전의 짐을 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강요하였습니다. 전통과 유전을 강요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일상의 삶의 짐도 감당 못하고 살아갈 때입니다. 거기에 율법까지 지켜야 하는 무거움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짐과 죽음의 짐 또 죄의 짐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지쳐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로 와서 나의 멍에를 메라.” 여기 온유와 겸손은 메시야임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하나님의 품성이고 성품이고 자질입니다. 또 여기 멍에가 나오는데 이 멍에는 밭갈 때 쓰는 도구입니다. 당시 밭갈 때 소 두 마리를 겨리해서 끌게 하였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라”는 말씀은 “내가 끌 테니 너는 내 멍에만 걸치고 있으라” 는 말입니다. 그러면 가볍고 쉼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예수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서 의논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신앙에게는 약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다가 무거운 짐이 생기면 예수께 가지 않고 수단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상시는 열심히 예수를 찾아갑니다. 그러다가 무거운 짐이 생기면 예수를 버리고 수단을 찾아 나섭니다. 아닙니까. 여러분 자신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무거운 질병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치료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그때부터 용한 의원을 찾아다닙니다. 더 유명한 의원을 수소문합니다. 더 비싼 약을 수소문하기 시작합니다. 웬 좋다는 약이 그리 많습니까. 그러니까 온갖 브로커들이 다 따라붙는 것입니다. 급한 마음에 비싼 약을 사서 먹습니다. 먹었더니 부작용으로 오히려 더 빨리 지레 죽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렵습니다. 별 수단을 다 써도 안 됩니다. 방법이 전무합니다. 카드로 돌려막아 봅니다. 그러다 안 되면 연탄불 피워놓고 죽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미래가 막막합니다. 손에 일이 잡히지 않습니다. 미래가 캄캄 합니다. 그때 너무 다급하니까 사울은 무당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요구합니다. 오죽 답답하면 그렇게 할까 이해는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한 가지 나옵니다. 

질문

그러면 예수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는 누구입니까. 그동안 예수는 왜 믿었습니까. 예수는 평안할 때 예수입니까. 그러면 지금 내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데 지금 예수는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지금 삶이 고달픔 중입니다. 미래 길이 보이지 않는 중입니다. 그래서 자살하고 싶을 지경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때 예수는 여러분에게 누구입니까. 

예수는 여러분에게 무슨 힘이 됩니까. 예수는 액세서리입니까? 예수는 마음이 평안해 보려고 한번 믿어보는 것입니까. 그러면 지금 가장 힘든 때, 가장 어려울 때 그 예수는 여러분에게 누구이고 그는 여러분에게 무슨 힘이 되십니까. 그러니까 예수는 나에게 아무런 힘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상태의 신앙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물을 파고 또 파는데 물이 나오지 않고 그물을 던지고 또 던지는데도 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어떻게 왔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에 오는데 뭔가 힘쓴 것이 한가지나 있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에 오는데 미리 계획한 것이나 미리 손쓴 것이나 미리 준비한 것이 있습니까.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주님은 나를 아셨다고 나를 향한 계획이 있으셨다(엡 1:4)고 말씀합니다. 그 사실을 믿습니까. 그 사실을 믿는다면 그분이 현재 나의 삶도 주관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왜 믿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성령의 은혜를 믿습니까. 성령은 무지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나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고 했는데 그 사실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오늘 내 삶에 그 성령이 임하실 것은 왜 신뢰하지 않습니까. 신뢰한다면 왜 그분에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왜 기도해 보지도 않고 무거운 짐을 지고 한숨만 쉬고 있습니까. 주님은 내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나를 아셨습니다. 그분은 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현재 나의 삶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분명 그분은 내 인생의 내일도 모레도 장래도 주장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억지로 믿을 것도 없습니다. 내가 부모를 믿지 않아도 부모는 나의 삶을 주장하듯이 주님도 그러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더욱 활기차야 하고 재미가 있어야 하고 행복함이 있어야 하고 기다림의 설렘임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삶에 이 설렘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없으니 여러분이 가장 힘들고 어렵고 앞이 캄캄할 때 예수는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병들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 예수는 여러분들에게 누구입니까. 앞 길이 캄캄하고 미래가 두려울 때 그때 예수는 여러분에게 누구입니까. 예수는 뒀다가 무엇에 쓰려고 하십니까. 왜 예수를 활용하지 않습니까. 이력서 써 들고 이곳저곳 다니느라 얼마나 피곤하십니까. 그렇게 이력서를 써 들고 이곳저곳으로 다니는 수고와 노력 중 조금이라도 할애해서 예수를 찾아가 진지하게 상담하여 보았습니까. 몸 병들어 이곳저곳으로 치료하러 다니며 인터넷 뒤져 더 용한 의원 수소문해서 찾아다니는데도 차도가 없습니다. 

더 용한 의원을 찾느라 더 분주하고 온 신경을 쓰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낼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길을 찾아보았습니까. 그 방법이나 그 열정을 중단하고 조용히 그리고 진지하게 예수를 찾아가 호소하고 상담하고 물어보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아이 입시 때문에 부모들이 초죽음이 됩니다. 매일 밤 학원에 데려다 주고 데려 오느라 입술이 부르트고 잠도 못하고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아침 아이가 교회가려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때 부모님들의 생각이 어떻습니까. 교회에 가라고도 못하고 가지 말라고도 못하고 안절부절 입니다. 부모가 그렇게 어정쩡하게 있으니까 아이의 미래도 어정쩡하게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때 과감하게 일찍 일어나 아이 손 잡고 예배에 참석하여 엎드려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한마디 합니다. “너는 예배가 먼저다, 하나님이 도우셔야 한다.” 어떻습니까?

문제는 근본적인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합니다. “주께 나아가 기도하자, 앞길을 주님께 상의 드리자. 앞길을 그분에게 맡자“. 그것이 잘 안됩니까.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되십니까. 여러분 평상시에는 좀 쉬십시오. 형통할 때는 좀 쉬어도 괜찮습니다. 건강할 때는 좀 꾀도 부리십시오. 그때도 열심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만 그런데 인간은 속성상 평안하면 쉬고 싶어집니다. 형통할 때는 꾀도 부리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솔직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교회 중직자들을 가만히 보니까 임직 시간이 좀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시들해집니다. 예배도 슬금슬금 빠지고 합니다. 예배드리는데 카페에 가서 앉아있기도 하고 사무실에 가 앉아있기도 하고 교회마당에 서 있기도 합니다. 임직한지 시간이 좀 지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한결같이 처음이나 나중에나 열심히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평상시에는 슬금슬금 빠져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적당히 살아가다가도 어려울 때가 오면 그 때도 슬금슬금하면 안 됩니다. 몸에 병이 들었는데도 그 때도 슬금슬금 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빨리 죽을 수가 있습니다. 사업하다가 갑자기 어려움이 오고 실패했는데도 그 때도 요령부리고 슬금슬금 하면 진짜 망할 수 있습니다. 평안하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평안이 깨지고 암담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 때에도 하던 대로 적당히 슬금슬금 요령 부리면 더 어두움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지체 말고 예수께 찾아가야 합니다. 신속히 달려가야 엎드려야 합니다. 눈치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눈치 빠른 아이는 윗집 아이가 TV만 본다고 엄마한테 얻어맞고 죽는 소리를 내면 재빨리 TV를 끄고 자기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싸인입니다. 

예수를 활용하십시오.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가벼우니 내 멍에를 메라“. 이 말씀은 나를 활용하고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그 시대 무거운 짐 진 자들은 한결같이 예수께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모두 해결을 받았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가족과 이별하고 격리 삶을 살았습니다. 그 보다 더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그가 그 짐을 지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예수께 찾아가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정으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쉼이고 안식입니다. 

혈루병자도 늘 피가 멈추지 않아 가족과 격리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니까. 그가 예수께 찾아가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치유 받고 가족 품으로 돌아가 안식을 누렸습니다. 중풍병자는 매일같이 꼼짝을 못하고 자리에 누워 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갑니까. 희망이 없습니다.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예수께 갔습니다. 마침내 몸도 죄도 치유 받고 자유하게 되어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이 안식이고 가벼운 멍에로 바꾼 삶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지고 있는 짐은 무슨 짐입니까. 경제의 짐입니까. 질병의 짐입니까. 미래의 짐입니까. 영적인 짐입니까. 왜 짐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그 짐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왜 그냥 지고 있습니까. 왜 속수무책으로 혼자 지고 있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외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런 영광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