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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그늘에서 도박한다 (요 19: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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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그늘에서 도박한다 (요 19:23-25)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3-25)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려고 서울 상공에서 고도를 낮추게 됩니다. 창문으로 서울의 야경을 보면 얼른 눈에 뜨이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들이 여기 저기 눈에 뜨이게 됩니다.
목에 금십자가를 걸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십자가를 오른쪽으로 꺽으면 독일 나치 마크입니다.
십자가를 왼쪽으로 꺽으면 절 표시입니다.
십자가를 네 군데 똑같이 하면 적십자가입니다. 구급 봉사 기관 마크입니다.
우리 교회는 십자가가 700 종류 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사형틀이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가 사형틀이 된 동기가 있습니다. 폐르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폐르샤인들은 이 땅은 페르샤인들의 신인 올무즈(Ormuzd)에게 바쳐진 신성한 땅이라고 여겼습니다. 중범 죄를 저지른 죄인들을 처형할 때 신의 소유물인 땅을 더럽혀서는 안된 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죄인의 시체를 땅에 닫지 않도록 높이 들어올리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십자가 처형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가의 처형이 폐르샤에서 북 아프리카 칼타고로 건너갔습니다. 칼타고에서는 다시 로마로 전해졌습니다. 인간이 생각해낸 사형방법 중에 가장 잔인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로마인은 로마 사람이나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처형을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처형 방법이 있습니다. 사형언도를 받은 현장부터 십자가 처형 장소까지 죄인이 십자가를 메고 가야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형벌이 시작됩니다. 이왕 죽일 사람이기에 채찍으로 반쯤 죽이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면 피를 흘리게 됩니다. 갈증이 시작됩니다. 박힌 못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피 냄새를 맡은 파리와 모기떼들은 극성스럽게 몰려듭니다. 상처를 빨고 물어뜯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며 사형수는 죽어 갑니다. 긴 시간 아주 오랜 시간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유대인 저술가 “클라우스너”(Klausner)는 십자가의 처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복음 복수의 수단으로서 지금까지 고안해낸 방법들 중에도 가장 지독하고도 잔인한 죽임이다.” 

키케로도 말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잔인하고 가장 가공할 처형이다.”
타키투스도 말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오직 노예에게만 적합한 처형이다.”

예수님을 이렇게 죽였습니다. 그 후부터 십자가는 지구 상에서 가장 거룩한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전쟁터에서도 적십자가를 그린 차는 양쪽 모두가 공격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습니다. 환자를 실어 나르는 차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사랑과 구원, 평화와 축복의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중세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에서 유명한 화가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화가는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세밀하게 연구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화가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모습을 그려서 교회에 가지고 갔습니다. 그림을 보는 이들은 까무라칠 뻔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완전 나체였습니다. 도저히 그 그림을 벽에 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완전 나체로 그렸습니까?”
화가가 대답하였습니다.

“성경대로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완전 나체로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증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입으셨던 옷을 모두 벗겼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대중 앞에 벌거 벗겨 놓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수치가 없습니다.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할 때 임신한 여자들을 발가벗겨 행진하게 한 후 죽였습니다. 발가벗고 대중앞에 걷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 나체로 달리셔서 고통을 당하시면서 피를 흘리고 계실 때 그 밑에서 도박하는 도박꾼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입고 있는 옷 모두를 벗김을 당한 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모두 벗겼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23)

예수님 당시 옷은 그대로 돈이었습니다. 직조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일일이 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손으로 일일이 한 올 한 올 짜야 합니다. 그래서 옷은 너무나 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부터 아침 9시 정도까지 계속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옷은 찢겨지고 피가 낭자하게 묻었습니다.
그래서 옷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병정은 네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부수입이 생겼다고 좋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다 벗긴 후에 나누어 가지면 술값정도는 나올 것같았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을 벗겨서 네 조각으로 나누었습니다. 각각 한 깃씩 가졌다고 한 것을 보면 네 명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옷 조각도 돈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피가 묻었어도 빨면 됩니다.
지금 성경 학자들은 네 조각으로 예수님의 나눈 것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복음이 퍼져 나갈 것에 대한 예표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겉옷을 벗기고 나서 속옷을 벗기려고 할 때 로마 병정들은 놀랐습니다. 속옷은 보통 옷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원문에는 <키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키톤이라는 말은 놀라운 단어입니다. 직조술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이지만 모두 한 조각입니다. 한 통으로 짠 옷입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23)

이런 옷은 보통 사람이 입을 수 없는 옷입니다. 제사장들만이 특별히 입는 옷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정교한 옷을 만들고 또 아론을 위한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출 39;1)

제사장들은 성소를 섬기기 위하여 <정교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정교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쉐라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너무나 정교하여 바느질 자국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제조된 옷입니다. 꿰메지 않은 옷입니다. 천을 잇지 않은 옷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역사가는 요세프스입니다. 요세프스는 이 옷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었다고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성경 기록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옷은 너무나 비싼 옷이라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통 채로 한 사람이 가져야 제 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 가졌습니다.
흔히 겉옷이 비쌉니다. 속옷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겉옷을 도박하듯이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속옷은 나누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키톤 제사장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계셨습니다.
그 십자가 그늘 밑에서 도박하는 도박꾼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시나요?

이기주의 현장

찢어지는 아픔으로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는 밑에서 도박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시나요? 예수님의 옷 한 조각이 10만원짜리가 될가요? 5만원짜리가 될 가요? 식사 한번 할 수 있는 것을 가지려고 도박 제비를 뽑고 있는 이들의 현장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 가요?
이것이 우리들의 세계입니다.

내가 슬플 때 나보다 더 슬픈 사람이 있나 생각해보는 여유를 갖어 보았는 가요?
내가 아플 때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이 있나 생각해보는 여유를 갖어 보았는 가요?
내가 고독할 때 나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있나 생각해보는 여유를 갖어 보았는 가요?
내가 돈이 없을 때 나보다 더 돈이 없는 사람이 있나 생각해보는 여유를 갖어 보았는 가요?
내가 고통스러울 때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나 생각해보는 여유를 갖어 보았는 가요?

어떤 직장에서 생긴 사건입니다.
같은 직장에서 두 사람이 기독교인인 데 티를 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둘이 술을 마시던 중 싸움이 되었습니다. 사소한 말 한 마디가 격한 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사람은 코뼈가 부러지고 다른 사람은 이 하나가 부러졌습니다. 둘은 파출소로 끌려 갔습니다.

두 사람의 양 쪽 교회 목사님들이 소식을 듣고 파출소에 왔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기독교인인 것이 밝혀졌습니다. 한 사람은 장로였고 다른 한 사람은 집사였습니다. 사과하고 파출소에서 나오면서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너 장로라고 하면서 여태 티 한번 안 내냐?”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너 집사라고 하면서 그렇게 술을 잘 마시냐?”
그리고 헤여졌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둘은 모두 회개하고 더 좋은 장로, 더 좋은 집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극도록 이기주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어가는 십자가 밑에서 도박하는 도박꾼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아픔을 당하는 이와 함께 아파하고 같이 아픔을 나누는 세상이 주님이 원하는 세상입니다.

영국 근대 대정치가 중에 글래드 스턴이 총리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국회에서 네 번째로 야당의원들의 거센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창 열띤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직원 한 명이 총리곁으로 오더니 귓속말로 무슨 말인가를 하고 내려 갔습니다. 총리는 일방적으로 말했습니다. “공격을 연기하여 주십시오.”
그는 다급하게 말하고는 국회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국회에서는 야유가 터졌습니다. “답변 기피다. 직무유기다. 우리를 무시한 처사다. 이유를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않고 떠나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집기를 던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수라장이었습니다. 국회를 뛰쳐 나간 총리가 찾아 간 곳은 병원이었습니다. 그의 마차를 끄는 마부가 죽어가는 침상이었습니다. 늙은 마부가 막 운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늙은 마부는 자기 평생을 섬겨온 주인의 손을 꼭 잡고 웃으면서 행복하게 운명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국회에셔 들었습니다. 총리가 다시 국회에 들어 왔을 때 국회위원들은 기립박수로 그를 맞았습니다. 물론 공격도 그쳤습니다. 

아픔을 당하는 사람 곁에 가서 아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 사랑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서 도박판을 벌리는 잔인한 세상에서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입니다. 이기주의의 극치를 본문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조금만 손해가 되어도 공격형으로 바뀌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인내의 현장

절규하는 인생 최대의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도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몸부림을 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지릅니다.
“남은 구원하면서 너는 너를 구원하지 못 하느냐?”
“기적을 행하던 자여! 기적을 행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이 때 만일 주님이 참지 못 하고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시고 내려 오셨다면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지 못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12영이나 되는 천사를 동원시키지 못 할 줄 아느냐?”
그리고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12만명 천사를 동원시키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셨습니다. 그럴 수 없이 야속한 사람들이 자기 옷을 벗겨 놓고 제비뽑아 나누어 가지는 모습을 보시면서도 인내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인내의 극치 현장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참을 수 있었을 가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예수님은 한 마디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러 오셨기에 그 목적을 이루실 때까지 참으셨습니다. 목적을 이룰 때까지 모든 것을 참아야 합니다.

아니꼬운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합니다.
화가 나는 것이 있어도 참아야 합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 생겨도 있어도 참아야 합니다.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 보여도 참아야 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다가와도 참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현장은 인내의 극치 현장입니다.

내가 번역한 미드라쉬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천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데려가시려는 계획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원을 그려놓고 그 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515번을 기도했습니다. 하늘에 모세의 기도소리가 상달되자 하늘에서는 비상에 걸렸습니다. 천국에서는 하나님 귀에 모세의 기도가 들리지 않도록 문을 잠그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그렇게 간절하게 그리고 그렇게 끈기있게 기도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방의 천국 문이 다 막혀 있어도 모세는 515번을 기도하였습니다. 인내의 철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모세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들은 그렇게 기도하는 모세를 데려올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하나님은 모세와 타협을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네 장례에 내가 꼭 참석할 터이니 너는 내게 오기를 두려워 말아라.”
모세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받고 기도를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장례를 치우어 주시겠다고 하는 데 반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성공은 인내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은 인내의 현장입니다.

예언 성취의 현장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인 이들은 예수님의 겉옷은 나누고 속옷은 제비뽑았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24)

시편은 이미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실 때 옷을 나누기도 하고 제비도 뽑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8)

예수님은 이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래서 레위인 제사장이 아니면서도 이 옷을 이 날을 위하여 제사장 옷 키톤을 준비하여 두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그렇다면 그렇게 사시고 성경이 안 그렇다면 안 그렇게 사신 분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말씀으로 사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은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시는 성취의 현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면서 사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두 가지 예언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하나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리라는 예언입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예언의 현장에서 살아야 합니다. 도박꾼들은 하나님의 예언과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시며 찢어지는 아픔으로 죽고 계신 현장입니다. 우리는 오직 복음 전파로 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로 살아야 합니다. 땅끝까지 복음이 누룩처럼 퍼질 때까지 전도와 선교를 멈추면 안 됩니다.

교회에 가장 열심히 다닌 사람 기록이 발표되었습니다.

1976년까지 통계입니다. 미국 아이오와주 케오쿡(Keokuk)에 있는 제일침례교회의 성도 린퀴스트 여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1888년부터 88년 동안 꾸준히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88년 동안 모든 예배에 단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88년 동안 그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15번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8,000번 이상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4,000번 이상 기도회에 참여하였습니다. 29,000번 이상 취침기도를 드렸습니다. 

린퀴스트 여사는 50년 이상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였습니다. 제자들 중에 목회자가 수없이 나왔습니다. 열심있는 사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가장 열심히 복음을 증거한 성도로 기록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예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리라는 재림의 예언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현장에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신다고 할 지라도 “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미국의 패턴 목사님이 어느 날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중에 주님이 나타나시더니 물으셨습니다.
“네 교회에서 목회가 몇 년이냐?”
“20년입니다”
“성경에 재림한다는 예언이 2,163절이나 되는 데 너는 몇 번이나 재림설교를 하였느냐?”
생각하여 보니 단 한번도 재림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워서 한번도 하지 못 하였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부끄러워 하는 데 주님이 슬픈 빛을 하고 사라지셨습니다.
그 후부터 패턴 목사님은 재림설교에 치중하였습니다. 틈만 나면 재림 설교를 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지겹다고 그만 하라고 불평이었습니다. 재림하면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주일 저녁 패턴 목사님은 집사 한 분에게 나팔를 들고 천정에 숨어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이 오십니다”라고 외치면 나팔을 불어 대라고 말했습니다. 저녁 설교를 하던 목사님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이 내년에 오실까요? 이번 달에 오실까요? 지금오실까요? 주님이 지금 오십니다!”
이 때 천정속에 숨어 있던 집사님이 나팔을 불어 댔습니다. 성도들은 놀라서 모두 의자 밑
으로 숨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나팔불던 집사님을 내려 오게 한 후에 성도들을 자리정돈
을 시키고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왜 숨었습니까? (Why did you hide?)
성도들은 모두 부끄러워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 징조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는 십자가 현장은 이기주의 극치의 현장이었습니다. 인내의 극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시는 성취의 현장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공산주의 박해를 피하여 몰래 가정에서 숨어서 예배를 드리는 진실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30여명은 늘 똘똘 뭉쳐서 늘 지하실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들중에 어머니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내세의 소망과 부활을 바라보며 예배시간마다 결석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늘 집을 비우는 아내와 아들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늘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믿는 며느리가 싫다. 절대로 예수 쟁이와 결혼하지 말아라.”
그러나 아들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예수 안 믿는 처녀와는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몰래 예배드릴 때 경찰에 고발하여 버렸습니다. 경찰에 붙잡혀간 이들은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있는 돈이란 모두 선교비에 사용하였기에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몸으로 때우기로 하고 유치장에 들어 갔습니다. 이들은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늘 기도하고 찬송을 붙렀습니다. 유치장에 들어 온 이들을 모조리 전도하여 예수믿게 하였습니다. 늘 유치장이 시끄러웠습니다. 거기에다가 하루 세끼 밥까지 해다 주어야 했습니다. 경찰들은 골칫거리였습니다. 낭패였습니다. 경찰은 고발한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까짓 것 가지고 남자가 째째하게 고발을 합니까? 더구나 자기 마누라와 자기 자식까지 있는 데... 고소를 취하하십시오.”
그리고 30명 교인들을 다 내보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도박의 현장이 아니라 십자가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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