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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증인 (행 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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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증인이 되자
사도행전 3:11-21

1746년 클로덴 전투에서 하일렌드 주민들은 완전히 패망했습니다. 스튜어트 왕조의 군대는 단번에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전투 후 정부군 사령관인 컴벌렌드 공작은 전투지역을 둘러보다가 유일한 생존자인 하일렌드 부상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상병을 향하여 사령관인 컴벌렌드 공작이 물었습니다. “너는 어느편이냐?”, 최후의 힘을 모아 부러진 칼을 치켜들면서 이 병사는 외쳤습니다. “나는 내가 섬기는 왕의 편이요.”, 사령관은 단칼에 그를 잘라 죽였습니다. 이 부상병은 자기가 분명히 죽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섬기던 왕에 대하여 자기의 충성심을 숨기지 않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피 흘리며 죽어 갔습니다. 

상황이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뜻을 정하고 목숨을 걸면 안되는 일도 없고, 못할 일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도 이렇게 충성된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개의치 않고, “나는 나사렛 예수의 증인이요.” 라고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예수님은 간절하게 바라십니다. 

진정한 용기는 큰 소리가 아닙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분명하게 가려서 해야 할 말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용기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변화가 됩니다. 해야 할 말만 한다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여러분 모두가 진정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사도행전 3:11-29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예수를 증언하는 사람에게는 표적과 간증이 있습니다.
본문 11-12절을 보세요, 누가는 기록하기를,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에 머물러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서, 솔로몬 행각이라고 하는 곳으로 달려와서, 그들에게로 모여들었다.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 사람’이란, 누구인가하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 ‘아름다운 문 곧 美聞’이라고 불리는 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말하는데, 이 사람이 마침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올라가던,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만났고,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보고 나서는, 그에게 "우리를 보시오"하고 말하였더니, 그 앉은뱅이가 무엇을 얻을까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는데, 바로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하면서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더니,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나 걷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 사람’은 바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다가, 베드로의 믿음 때문에 일어나 걷게 된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만남을 통하여 변화되고 성장합니다. 그래서 한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과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이유로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위하여,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고 해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도 생긴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남에 따라서,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만남에 따라서 경험한 것을 가지고, 생각이 자라고, 마음이 자라고, 인격이 자라게 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그 날 처음으로 그 자리에 나와 앉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제도 그제도 지난달에도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여러 문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문이라고 해서 미문이라고 불리는 문 앞에 가장 초라한 인생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전 같았으면, 그냥 못 본척하고 지나치거나, 그냥 동전 한 닢을 던져주면서 지나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충만한 눈으로 보니까, 베드로와 요한의 안목이 달라졌습니다. 앉은뱅이가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순간, 베드로와 요한은 엄청난 생각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이 역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불붙듯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쭈그리고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당당하게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면서, 앉은뱅이의 손을 붙잡고 일으켰습니다. 그 순간 참으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의 손을 잡은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납니다. 그러더니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걸어 들어갑니다. 참으로 놀랍고 굉장한 사건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누구든지 이런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문제는 내 심령이 메말라 있는 것입니다. 한번 가만히 여러분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의 자리와 가정과 기업에, 그리고 함께 믿음생활을 감당하는 우리 속회와 선교회에도, 이런 표적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런 간증이 계속되어지고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표적이 없고, 간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 표적과 간증거리가 생겨나지만, 나 자신의 영안이 어두워서, 간증거리로 알아보지 못하고, 모든 부분에서 ‘그러려니’ 하고,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여러분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덤덤한 이유가 자신의 믿음 없음이라고 깨달아지면 이 시간 먼저, 나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사도들은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난 후에 사람들이 자기를 향하여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표혀으로 스타가 되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표적을 행했으면서도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를 나타내고, 자신이 영광을 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데만 집중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곧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만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오직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언하기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기의식과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정체성이 분명해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영광 받도록 헌신하고, 충성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증인 의식’이 충만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보여준, 가장 중요한 것은 ‘증인 의식’입니다. 여기서 ‘증인 의식’이란,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이웃에게 증언하는 것이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게 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증인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사나 죽으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상관하지를 않고 항상 먼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 삶을 삽니다.  

당시 유다에서 기득권을 지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은 나사렛 예수를 정치적으로 빌라도의 재판에 넘기어, 억지로 예수에게 ‘자신을 왕으로 칭했다.’라는 죄를 뒤집어 씌워서, ‘반란의 무리의 괴수’라고 정죄를 하고는, 당시 로마제국의 유다총독인 빌라도를 협박하여, 빌라도로 하여금 예수를 십자가형으로 처형할 것을 요구하여, 결국 예수는 갈보리 언덕에서 처참하게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십자가 형은 조세거부운동을 벌였거나, 세금을 강탈했거나, 독립운동을 벌였거나, 반체제적인 사고를 가지고 백성들을 선동했거나 하는 정치범 아니면 사상범 등을 처형하는 사형법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전혀 비정치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정치적인 범죄자로 몰려서 처형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의 제자들은 이렇게 처형된 나사렛 사람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영화롭게 하셔서 인류의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면 그런 증거가 무엇이냐? 라고 묻는 이에게, 예수의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하기를, ‘예수가 죽은지 사흘만에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모두가 나도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고 담대하게 증거합니다. 

제자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세요,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당장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자라고 낙인이 찍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충만한 사도들과 당시 은혜받은 사람들은, 그런 말을 아주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증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증거를 안하면 속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죽음에서부터의 부활을 모두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기 전에도, 머리로는 분명하게 나사렛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부터의 부활을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 알고 있을 때는 입으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몸이 따라 주지를 않고, 가슴이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자기가 믿고 알고 있는 바를 위해서,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을 “충성스러운 증인”이라고 부릅니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증인은, 어떤 고난과 역경 앞에서도, 자기가 믿는 바를 절대로 굽히지 않습니다. 물에 술을 탄 듯, 술에 물을 탄 듯, 이 맛도 아니고, 저 맛도 아닌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말한 베드로의 증언이 바로 여러분의 고백이고, 간증이고, 외침이 되기를 원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싫든지 좋든지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증언하는 증거자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여러분이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증인의 사명을 바르게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오직 겸손하게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고, 덧입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증거자의 삶을 사는데 부족함이 없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3) 증거자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에 연결되어야 합니다.
본문 16-17절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또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에 힘입어서 된 것이니, 예수로 말미암아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하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의 이름을 통해서 표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이름이 능력이 있습니다. 이름이란 그냥 홍길동, 박철수, 이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이름을 통해서 온 나라가 움직입니다. 장관의 이름으로 크고 작은 사업들이 이루어집니다. 회사의 대표이름이 적힌 서명으로 수천억원이 왔다 갔다 합니다. 회사가 흥하느냐? 망하느냐?는, 회사 대표가 어떤 사업에 어떤 이유로 서명을 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처럼 이름은 한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가 속한 기관을 대표하는 능력이 되기도 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크고 작은 모든 표적과 기사들은, 미련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어째서 하나님이 되시는가!를 무지한 인간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는 사건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추상적인 진리나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를 말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한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예루살렘 사람 모두가 보고, 경험한, 역사적인 사건을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해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눈을 벗어나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앉은뱅이 걸인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것도 여러분의 마음대로 구별하지를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만 하세요. 예수의 이름을 거역하고, 물리칠 세력은 온 우주 안,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 앞에는, 병마도 더러운 귀신도, 인간의 정욕도, 이생의 자랑도, 아무 힘이 없습니다. 다 예수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잘못을 회개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오직 베드로처럼 예수의 이름만 의지하고, 이웃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증거자는 증언할 말이 있습니다.
본문 18-19절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미리 선포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전도하러 가서 현관문에 달린 초인종을 누르고, 짧은 시간에 “안에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든다면, 총은 있지만 총알이 없는 병사와 같습니다. 자기 간증이 없는 사람은 바로 총알 없는 병사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살았던 삶의 모습과 예수를 알게 된 계기와 예수를 구주로 믿고 난 이후에, 변화된 삶의 모양을 정리해서 3분 정도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사건은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예비하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본문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세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 ‘너희는 죄 없이 함을 받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요구하는 것이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을 향하여 살았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거스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2)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주시는, 첫 번째 삶의 열매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쾌하게 된다는 것은, 세상의 자랑과 물질이 주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늘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사로잡혀 있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인인 삶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항상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 2:6-7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분명하게 빌립보 교인에게 설명하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의 이 증언은 나사렛 사람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낸 분이라는 것입니다.(믿으시면 아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믿어지게 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도권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지혜와 계획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따라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로 뒤틀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증거자들을 통해서 하나씩 죄의 구름을 거두어 내고, 복음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어 보이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지 않고,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장마철에 흘러 내려가는 빗물과 같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속한 사람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펼쳐 갑니다. 그래서 사람이 영적으로 사는 길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람을 통해서 구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온전하게 전할 예언자를 세우고, 당신의 말씀을 증거하게 합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언자의 말을 애써 외면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분명한 자기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크든지 작든지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필요합니다. 찬송하다가, 길을 가다가, 말씀을 읽다가, 아니면 병상에서, 삶의 위기에서, 나와 함께 하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누가 어떻더라!는 이야기만 가지고는 분명한 믿음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내가 만난 주님께서 내게만 주신 복이 무엇인지 밝히 알고, 그것을 증거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증인다운 삶입니다. 이제부터는 그런 삶을 살고자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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