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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의 생활 (빌 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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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생활

빌립보 단거리 100미터를 달리는 선수가 트랙에서 한가롭게 두리번거리면서, 마치 공원을 산책하듯이 걸어간다면, 어느 누구도 그가 메달을 딸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라면, “준비 땅!”하고, 출발 신호가 울리는 동시에, 앞을 바라보고 마치 총알이 발사되듯이, 출발선에서 튀어나가서 전력으로 질주를 해야만 합니다. 옆에서 달리는 선수를 바라볼 겨를도 없습니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야 합니다. 앞에 다른 선수가 보인다면 그 선수는 이미 뒤진 것입니다. 

사람은 역할적 존재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역할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고,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명작으로 만들고, 걸작으로 만들고, 대작으로 만들고자 정성을 다해야만 합니다. 이왕에 사는 인생,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부끄러운 흐적을 남긴 삶이 되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여러분의 삶을 명작으로 만들고, 의미 있는 남이 부러워하는 삶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본문 빌립보 3:12-16절의 말씀을 가지고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바울은 본문에서 믿음으로 달려가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그렇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에게 본문 12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은 끊임없이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유념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란 누구나 영원한 본향, 곧 하나님의 나라에 도착하는 날까지, 믿음의 경주를 뛰고 또 뛰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도, 삶의 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의 삶이란 것이 실은 끊임없이 여러 알지 못하는 모퉁이를 돌고 돌아야만 하는 나그네길을 가는 존재란 것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아무리 험하고 어려운 인생길을 걸어간다고 할지라도, 나사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에게 고백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르고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만을 의지하는 사람, 곧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능력이 곧 바른 믿음을 가진 여러분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곧 내가 능력자로 바뀐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대로 있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한 순간부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연약한 나와 함께 해주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모두 사도 바울처럼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가집니다.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다는 것은 담대한 생활을 가능하게 합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삶에 대하여 담력과 힘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56:3-4절에서 노래하기를, ‘두려움이 온통 나를 휩싸는 날에도, 나는 오히려 주님을 의지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찬양합니다.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니, 그 어느 것이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가 항상 유념해야만 하는 것은, 지금 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선하신 섭리와 계획 아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늘 확신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선하신 섭리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 당한 형편이 어려워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것 같은 증거가 보여도, 원망하지 않고, 신령한 노래와 감사의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세요, 빌립보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한 귀신이 들려 점을 치는 여인이 바울의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바울의 일행 뒤에서 소리치기를,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하도 그러니까 참다가 못하여 바울이 그 점을 치는 여인을 사로잡고 있던, 더러운 귀신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냅니다. 여인은 d제 온전한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감사해야 할터인데, 그 여인은 노예였기 때문에, 여인의 주인들이 이제 자기들의 수입원인 여자가 정성이 되어서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바울 일행을 관원에게 고발합니다. 관원은 행색이 유대인인 것을 보고는,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을 재판도 없이 때려서, 지하 깊은 감옥에 가둡니다. 

바울로서는 얼마나 억울합니까? (1) 선한 일을 하고도 오히려 매를 맞고,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2) 로마제국의 시민권자에게 무조건 태형을 가했습니다. (3) 성령의 강한 역사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도 전도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주님을 향하여 시비하고 원망하면서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함께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끝까지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신령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옥에 갇혀 잇으면서도 감사함으로 그리스도 예수에게 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지진이 나서 감옥의 터전이 흔들리고, 감옥의 문이 열리며, 바울과 실라를 얽어맸던 착고 가 풀렸습니다. 이 일로 감옥의 간수가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고 할 때, 바울과 실라가 그것을 말렸고, 그 일로 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가정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빌립보 교인이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는 어린 아이에게는 문제가 됩니다. 아장아장 걸어가다가 탁하고 걸려 넘어집니다. 하지만 청년에게 돌멩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뜬히 밟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들에게 근심거리란, 밟고 가느냐?, 걸려 넘어지느냐?의 차이입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라도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담을 쌓든지 건물을 짓는데 사용되는 건축자재가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를 의지하는 사람은 근심과 걱정을 극복하고, 마치 길가의 돌을 이용하듯이 근심걱정을 선하게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지도자 여호수아와 갈렙은 야훼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정탐꾼들은 지금 이스라엘의 실력으로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말한 사람에게는 말한대로 되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야훼만을 의지하고, 야훼의 말씀대로 가나안 정복을 소망하고 말했던, 지도자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이 믿은대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거인족속이자 가나안의 본래 주인이었던 아낙자손을 쫓아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이 쓸데없는 걱정을 합니다. 할 필요도 없는 걱정, 안 해도 되는 걱정을 하고, 일어나지 않을 걱정을 하고, 이미 지나간 것을 가지고 걱정을 합니다. 이제부터는 걱정하다가 세월을 다 보내지 말고, 모든 것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여호수아처럼 바울처럼 오직 믿음으로 달려 갈 길을 달려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바울은 본문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생동감 있게 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부지런히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한 번 가만히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부지런히 좇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생동감이 있습니까? 

사람이 열등감과 좌절감을 가지고 살면, 그런 사람에게서는 생동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생동감이란 살아 움직이는,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씩씩한 힘을 말합니다. 살아있는 것은 움직입니다.  반면에 죽은 것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동감이 있는 삶을 살자면, 먼저 여러분의 삶의 자리와 주위에 자리 잡고 있는, 생동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요소를 없애 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비관주의, 소극적인 자세, 부정적인 생각, 냉소주의, 방관적인 태도, 무사 안일주의 등이 생동감을 죽이는 요소들입니다. 

속담에 ‘죽은 호랑이보다 살아있는 강아지가 더 무섭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은 호랑이는 아무리 이빨이 강해도 물지 않습니다. 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강아지는 뭅니다. 그래서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살아있다면, 누워있지 말고 일어나 앉아야 합니다. 앉지 있지 말고 일어서야 합니다. 일어서지 말고 걸어야 하고, 걷지만 말고 뛰어가야 하고, 뛰지 말고 날아가야 합니다. 인생은 한가롭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들이하는 산보가 아니라 달리기 시합이요, 싸움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조용히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 돼서는 안됩니다. 감나무 아래서 감 떨어지기를 기대하고, 입만 벌리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라면 남을 감동시킬 정도로 생동감 있게 살아야 합니다. 승리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는 가만히 있어도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여정에서 승리하려면, 누구나 여호수아처럼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바울처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전도자 실라처럼 기도하며, 악한 마귀의 새력과 싸워야만 합니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렘 33:3절에서 예언하기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마귀가 도전을 할 때마다 피하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굳게 서서, 성령의 뜻을 굳게 붙잡고,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마귀를 대적하기 바랍니다. 그 때마다 주님께서 여러분이 승리하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3) 바울은 본문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자기 몸을 바칠 곳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본문 15-16절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권면하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찌했든지 우리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같은 길로 계속 나아갑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이 죄악 된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고, 여러분을 통하여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를 원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있고, 해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일이 있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하고 싶지 않으면 못 하는 것입니다. 해야 한다고 판단이 들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그럴싸한 일이라도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없으면 못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해야만 한다고 판단이 되는 일, 그리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여러분의 소명입니다.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지금 여러분이 여기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시간은 세상에서 돈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시간이 남았다고 다른 사람에게 팔 수도 없습니다. 시간이 모자란다고 빌려 쓸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간처럼 중요한 재산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금보다도 귀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이야 없으면, 부지런히 일하고 알뜰하게 모으면 생깁니다. 하지만 지나간 물이 다시 흘러 되돌아오지 않고, 지나간 바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이, 한 번 가버린 시간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시간이기에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세상을 지혜 있게 살아가라고 하면서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낀다.’라는 단어의 뜻은 ‘구속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구매한다, 댓가를 주고 산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세월을 아끼라.’는 표현은 곧 ‘세월을 댓가를 주고 사라.’하는 의미가 됩니다. 값진 댓가를 지불하고 산 것은 누구나 귀중하게 여깁니다. 세상에 시간을 돈을 주고 산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은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마치 돈을 주고 구입한 사람처럼, 그렇게 시간을 귀하게 여기고, 아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믿으시면 아멘)

여러분이 믿음 여정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모든 일에서 전력투구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영어로 표현을 하면, “Do your best”입니다. 언제나 감당하는 일에 대하여,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애벌레는 작은 돌멩이나 나뭇가지가, 모두 힘겹게 넘어야 하는 장애물이지만, 나비에게는 모두가 구경거리에 불과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도록,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주님을 향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항상 성도가 유념해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상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점을 믿고,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상을 주시고자 기다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언제나 상을 받고자 생동감 있는 믿음생활을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제부터는 내가 이 일을 하다가 나의 삶이 끝나도 좋다는, 그런 열정을 가지고 세월을 아끼면서, 몸 바쳐 충성하는 삶을 사는데 후회가 없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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