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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시키는 힘 (요 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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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시키는 힘
요한복음 3:1-15

진화론의 창시자인 다윈은 1883년, 진화론을 전개하면서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진화론을 설정한 다윈에게는, 원숭이와 사람 사이의 중간 고리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이론의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윈은 중간 고리를 찾기 위해 배를 타고 미개한 원주민이 사는 섬을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다윈이 남양군도의 어느 섬에 도착했을 때, 다윈은 분명히 사람으로 생겼으나 원숭이처럼 생활하는 집단을 만납니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닥치는 대로 먹었습니다. 도저히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다윈은 저들이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고리쯤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 일부러 그 섬에 가본 다윈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을에는 교회당이 서 있고, 깨끗하게 옷을 차려 입고, 손에 성경을 들고, 교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30년 전에 다윈이 보았던, 그 미개한 원주민이 아니었습니다. 30여년 만에 문명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존 패이턴’이라는 선교사의 노력으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를 보고 돌아간 다윈은 런던 선교협회에 거금을 헌금했다고 그럽니다. 이처럼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복음입니다. 오늘은 본문 요한복음 3:1-15절의 말씀을 중심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그러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은 먼저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 곧 환경에 따라서 변화됩니다. ‘삶의 자리가 어떤 환경이냐?’에 따라서 사람의 삶의 방식과 의식 수준, 그리고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누구라도 열대우림지역에서 살아야 한다면,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나갑니다. 삶의 방식과 의식이 변합니다. 단 자신의 가치와 목적이 분명한 경우는 환경에 적응은 하지만, 오히려 주어진 환경에서 변화를 주도해 나갑니다. 그런 예로 열대우림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원주민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삽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삶과 의식과 가치관을 복음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다음으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교육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교육시키면, 분명히 교육을 받은 사람은 의식과 가치관과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교육받으면 받을수록 인간의 모습과 삶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동물도 나름대로 훈련이 되어지면, 조금 달라집니다만, 인간만큼은 변화되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참된 교육이 이루진다면 사람은 변화됩니다. 교육을 통하여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됨의 변화’입니다. 단지 지적인 변화, 의식의 변화, 삶의 질의 변화만이 아니라, 인간됨의 변화가 교육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이 변화는 생명으로의 변화도 가능하게 합니다. 여기서 ‘생명으로의 변화’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원래의 형상을 회복하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는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서 변화와 성숙이 필요합니다. 만일 교육이 없었다면 인간의 문화와 문명이 어떻게 발달되어 왔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교육이 사람을 더 황폐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육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교육이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거짓말하게 만드는 요소를 제공하기도 하기 때문에, 교육이 고상한 죄인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게 됩니다. 교육이 잘 이루어지면, 사회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세상은 더 평화하고 성숙한 삶을 살게 되어야 하는데, 교육이 잘 이루어져서 범죄가 사라지고, 갈등이 없어져야 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실망을 하고는, 깨닫고 말하기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인간의 성품을 변화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가 소망하고 목표해야 하는 것은, 해 아래 사는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을 회복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을 하면 생명으로의 변화요, 바른 사람됨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자, 거듭남으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생명과 온전한 사람됨을 갖추도록 변화하는데 필요한 힘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점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밤에 찾아 온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진정으로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의 의미를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밤중에 남들의 이목을 피해서 은밀하게,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비단 니고데모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율법이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율법에 매이게 되면 오히려 사람이 율법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온전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끄러움만을 발견하고 인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자 갈망하면, 먼저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여러분의 사람됨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런 성령에 의한 변화가 있어야만 여러분이 바른 믿음생활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 수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구름을 타고 승천하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말씀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라고 하지를 않으시고, 행 1:8절에 의하면,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갈망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기를 사모하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가져야 할 가치관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야 할 삶의 모습과 방법,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감당할 성품 등, 이 모든 것을 거룩한 것으로 차근차근 바꾸어 주십니다. 성령의 역사하심 때문에 여러분의 삶의 자리 가운데,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 모두를 포함하여, 전반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영국감리교회 교리문답서 15항에 보면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하기를, ‘거듭남은 하나님에 의해 우리가 죄의 수렁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내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을 통하여 성장한다.’라고 했고, 제 21항 ‘신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하기를, ‘신생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후계자로 세운 사람들에 의하여 영위되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삶을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거듭남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심령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맺어가는 거룩한 삶의 열매를 거듭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삶입니다. 따라서 항상 성령 안에서 살고자 내 몸이 성령께서 거하는 전이라고 생각하고 거룩한 삶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 1:22-23절에서 말하기를, ‘여러분은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영혼을 정결하게 해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거듭났습니다. 그것은 썩을 씨가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납니다. 여러분이 거듭난 것이 세상적인 것들 때문이 아닙니다. 마치 풀이 마르고 꽃이 지듯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썩어지고 소멸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여러분을 거룩하게 변화시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그동안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롬 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라고 말씀한 것처럼,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얻게 되었고, 믿음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복음을 계속해서 들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변화시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깨닫게 하심으로, 복음 안에서 자신의 어리석음과 미련함, 무지함을 깨닫고,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진리를 사모하게 되고, 결국은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 4: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역동성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려고 갈망할 때에, 진리의 성령께서 여러분을 변화시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항상 진리의 성령과 함께, 하나님 말씀 안에 있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만 합니다. 세상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해야만 합니다. 먼저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사람이 들어야 하고, 들은 말씀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아멘 할 때에, 성령께서 아멘 한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바로 그 때에 세상 속에 거룩한 생명에 이르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 모두가 그런 역사를 이루는데 한 몫을 감당하고자 성령 안에서 겸손하게 노력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드립니다.  

(2) 변화시키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생명으로의 변화, 거룩한 변화를 이루자면 먼저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의 소욕이 육신의 소욕을 누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주장하고, 나를 이끌어 가시도록, 성령님께 나를 전적으로 맡기고, 의탁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사모하고, 갈망하면 살아야만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언제나 기도할 때에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만족합니다. 주님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제자 듣겠나이다.’라고 할 때에, 성령께서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고, 성령충만 한 삶을 삽니다. 바로 그 때에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서 역사 하시고, 움직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항상 성령의 충만한 삶을 감당하기 위하여 늘 기도하고, 자신의 삶의 자리를 정결하게 하고, 겸손하며, 거룩한 것을 가까이 하고, 하나남의 음성을 듣고자 자기의 소리를 의식적으로 죽이려고 노력하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 삶을 살 때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거듭난 삶을 살아가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예언자 에스겔은 겔 36:26-27절에서 예언하기를,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과 함께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에게,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하고, 성령 안에서 부드러운 마음을 줍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갈 5:22-23절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열매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열매 맺은 것입니다. 죄만을 따라서 살던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자기의 삶의 열매로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세요. 행 19:11-17절을 보면, ‘에베소에서 성령께서 바울과 함께 하시자, 바울의 손을 빌어서 비상한 기적들을 행하셨는데,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이 몸에 지니고 있는 손수건이나 두르고 있는 앞치마를 가져다가 앓는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물러가고, 악한 귀신이 쫓겨 나갔습니다. 심지어는 귀신을 쫓아내는 퇴마사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는 몇몇 유대 사람까지도,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하고 말하면서 악귀 들린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내쫓으려고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스게와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도 이런 일을 했는데, 귀신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하고 말하면서, 악귀 들린 사람이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달려들어서, 그들을 짓누르는 바람에, 스게와의 아들들이 귀신을 쫓아내기는 커녕 몸에 상처를 입고서 벗은 몸으로 도망을 치는 사건까지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도와 이렇게 역사하시자, 에베소에 사는 모든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두려워하고,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늘 성령충만 한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하고, 정결한 삶을 사는 것 뿐 만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하고자, 최선을 다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3) 변화하자면, 거듭나자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복음은 여러분을 온전케합니다. 복음은 여러분을 성경적인 사고와 가치관과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 말씀을 말씀되게 해야 합니다. 깨닫게 하시는 성령을 힘입어, 온전히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 1:22절에서 말씀하기를, ‘여러분은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영혼을 정결하게 해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에는 새로워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죽어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복음에 순종함으로써, 자기 안에 있는 욕심과 탐심과 육신의 소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바울은 새로 살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여러분을 거룩하게 합니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처럼 복음에 순종하면서 변화되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죽는 날까지 계속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도 변화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 안에 죄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소욕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을 하고, 변화를 거부하고, 때로는 심각한 의심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주님께서 하라는 일을 하고, 성숙한 소망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러면 늘 성령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 안에 있고자, 늘상 정결하고, 겸손하며, 거룩한 것을 사모하고, 정직하며,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을 말씀 되게 하며, 나보다 연약한 이들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돌보며, 날마다 자기의 허물을 회개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삶을 살고자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믿음의 성숙과 변화가 복음 안에서 이루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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