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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안에 있는 권위 (눅 4: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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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있는 권위
누가복음 4:31-37

1994년 마더 테레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대통령 연설문 작성자인, 페기 누난이 기록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워싱톤에 있는 수천 명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정통 카톨릭교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다. 마더 테레사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랑과 가정에 대해서 연설을 했다. 그녀는 “우리는 서로 사랑하여야 하고,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동의한다는 커다란 박수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테레사는 계속해서 다른 점도 지적하였다. 그녀는 우리가 잊고 있기 때문에, 상처받고 있는, 고향에 계신 불행한 부모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의 가족들과 함께 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먼저 여러분의 이익을 두시겠습니까?” 라고 지적을 하자, 청중들 가운데 베이비 부머들이 자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데레사는 계속해서 분명하게 말하기를, “나는 오늘날 평화를 가장 많이 파괴하는 것은 낙태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타협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 이유를 사람들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박수가 터졌는데,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통령과 영부인 그리고 부통령과 부인은, 근육의 움직임이 없는 석고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테레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당시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이야기 했고, 마침내 데레사가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에, 청중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그녀의 말에 거슬리는 감정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페기 누난은 말했습니다.

마더 데레사의 이 연설에 대해서, 그리고 마더 테레사에 대해서, 리더십의 권위자인, 존 맥스웰은 평가하기를, “마더 테레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더라면 분명히 사람들로부터 야유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며, 아우성을 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연사가 마더 테레사였습니다. 그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요,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말에 100% 동의를 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녀의 말을 점잖게 들어주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진정한 힘은, 바로 ‘권위’에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신뢰받고, 존경받으며,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권위, 그런 권위가 사람을 움직이고, 일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람의 자리에서 이런 권위를 지니고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진정한 권위는 어떤 사람의 직책이나 자리보다도, 사람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비록 권위를 부여하는 직분과 직책,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됨이 바쳐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권세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지니고, 행사해야만 하는 권위가 얼마든지 땅에 떨어지고, 초라해지는 경우를 여러분은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특징을 말할 때에, 잘 사용하는 표현이 ‘탈 권위의 시대’라는 표현인데, 문제는 권위를 지닌 존재가 ‘탈 권위’를 이야기 하는 것은,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만, 권위를 누리고자 하는 존재에 대하여,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현상, 다시 말해서 ‘권위의 상실 현상’이 실은 문제이고, 이것은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시대적인 문제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권위자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제자들과 무리에게 하신 교훈과 나사렛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운동을 전개하면서 감당하신 많은 일, 곧 각색병을 고친 일, 귀신을 쫓아낸 일, 물을 아주 좋은 포도주로 변화시킨 일, 떡 사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명을 먹이신 일, 갑자기 일어난 광풍과 파도를 말씀으로만 잔잔하게 한 일 등을 통하여 나사렛 예수는 당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온이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권위 있게 증거합니다. 복음서는 증거하기를 아무도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32절은 기록하기를,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으니, 그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본문 누가복음 4:31-37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마침 어느 회당 안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안에 있던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를 지르며 외치기를, ‘아,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면서 말씀하기를,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을 사람들 한가운데다가 쓰러뜨려 놓고는, 떠나갔는데,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상처는 입히지 않았습니다. 이런 표적을 본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 말이 대체 무엇이냐? 나사렛 사람 예수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니, 그들이 떠나가는구나.’ 하면서 서로 말을 했고, 그 때문에 나사렛 사람 예수의 소문이 주위의 모든 곳으로 퍼졌다. 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귀신이 역사하는 것을 보시고는, 더러운 귀신을 말씀으로 꾸짖어서 내어쫓으십니다. 이런 현장을 본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서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권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36절에서 누가는 증거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 말이 대체 무엇이냐? 그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니, 그들이 떠나가는구나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이 얻어야 할 참된 권위, 곧 여러분이 바르게 배우고, 가져야만 할 권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점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뢰의 권위가 있어야만 합니다.
신뢰의 권위란 진실함에서 나오는 권위입니다. 왜냐하면 신뢰는 진실함에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삶을 보세요, 참으로 진실하게 단신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본문 32절을 다시 보세요.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1:22절에서 마가는 이 부분을 기록하기를,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여러분은 예수님 당시에 예수의 말씀을 듣던 무리가 나사렛 예수의 교훈과 삶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는 먼저, 말씀에서 진실하셨습니다.
나사렛 예수처럼 그리스도인은 말에서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신자에게는 진실하게 말할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설득하고, 움직이는 힘은, 진실함에 있습니다. 형편과 상관이 없이 진심으로 하는 말에 사람은 감동을 받고 진실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나사렛 사람 예수의 말씀은 곧 삶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는 당신이 말씀하고, 가르친대로 행동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르친 교훈과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런 진실함에서부터 예수님의 권위가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약 2: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미국 조찬 기도회장에서 보여진, 마더 데레사의 권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간단하게 표현해서 마더 데레사의 권위는 자신이 말한대로 살았다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증자는 남다른 교육철학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의 부인이 장을 보러 가려고 나서는데, 어린 아들이 따라가겠다고 울면서 보챘습니다. 이에 부인은 아들을 타이르면서 “집에 있으면 돌아와서 돼지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게 삶아주마.”라고 달래놓고 장을 보러갔습니다. 그러나 장바구니에는 돼지고기가 없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증자는 마당으로 나가 돼지를 잡았습니다. 그 돼지야말로 가난한 증자의 집의 큰 재산 중의 하나였습니다. 부인이 놀라서 뛰어나오면서 묻습니다. “아니 왜 돼지를 잡으세요?” 증자는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시장에 갈 때 아이에게 돼지고기를 먹여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건 아이를 달래려고 그냥 한 말일 뿐인데 정말로 돼지를 잡다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내의 말에 증자는 단호하게 대답하기를, “부모가 거짓말을 하면 자식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는 것이며, 끝내는 부모가 하는 말을 믿지 않게 됩니다. 약속했으면 약속대로 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오.”라고 했답니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질 줄 아는 삶이 바로 진정한 교육입니다. 자기가 가르침을 받은대로, 자기의 삶을 사는 사람이 정말 신뢰를 받는 사람이고, 진정한 권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보여주신 삶을 그대로 닮아가고, 실천하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신실한 믿음의 본을 보이고, 성경말씀대로 행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함의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함은 가장 중요한 믿음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레19:2절에서 모세는 말하기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마 5:18절에서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만이 거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거룩할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권위가 섭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자, 귀신이 먼저 알고 말하기를,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거룩’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라고 하는데, 의미는 ‘구별된다’, ‘다르다’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과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만이 가진 성품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거룩함을 가지셨습니다.  귀신이 이것을 알고, 세상 사람이 이것을 압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예수 앞에서는 꼼짝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이 유혹을 받고,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대답을 한다면 거룩함의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감독, 목사, 장로란 지위를 가졌다 하더라도, 거룩함의 권위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거룩함의 권위를 지니고자, 구별된 삶을 살려고, 세상과 다른 삶을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섬김의 권위를 가져야만 합니다. 
요즈음은 리더십에 대하여 관심이 모아지면서, 다양한 리더십에 관한 이론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미래의 진정한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이라는 주장입니다.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실력을 가지고 있고,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섬기지 못하는 사람은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권위의 힘은 섬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섬김의 리더십, 섬김의 권위를 배워야 합니다. 섬김의 권위는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창조주이고,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 자체가 바로 섬김입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을 긍휼히 여기고, 병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서 치유하고 구원해주는 것 자체가 섬김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사렛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의 고난은 섬김의 완성이고,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막 10:45절에서 말씀하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여러분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섬김의 자세로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구원해주는 예수님을 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찾아가신 것 자체가 사실은 예수님의 긍휼하신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막 6:34절에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라고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행하신 가르침과 치유의 사역은 진실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진실한 사랑에서 나사렛 사람 예수의 권위가 나왔습니다. 여러분도 이제부터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하여 먼저 섬기는데 정성을 다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994년 테레사 수녀가 미국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연설하기 훨씬 이전에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교도소에 갔다가, 거듭나서, 교도소 전도자가 된, 척 콜슨이 기억을 하고 한 말이 있습니다. 척 콜슨은 말하기를, “미국 의회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다면, 인도 캘커타의 고(故) 테레사 수녀가 미국 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했던 때다. 미국 사람들은 연설자에게 박수를 잘 보낸다. 그런데 마더 테레사의 연설이 끝났을 때에는, 한 사람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5분 동안 완전한 침묵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박수를 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숨막히는 감동이 그들의 목과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지막에 테레사가 던진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지도력, 곧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섬김의 권위가 있는 사람에게, 다스림의 권위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멀리 가지 말고, 바로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섬기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연약한 이웃과 교인을 섬기는데서부터 지도력이 나오고, 권위가 나옵니다. 구체적인 섬김의 생활을 통해서 여러분도 높임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20:26-27절에서 말하기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주어진 권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권위는 진실한 생활에서 나왔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의 권위는 세속적인 것과 더러운 세상과 구별되고 다른 삶을 사는 거룩한 생활에서 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와서 세상을 섬긴 섬김의 생활에서 나왔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예수의 삶을 구체적으로 닮아갈 때에 누구도, 심지어는 영물인 사탄 마귀까지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진정한 지도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믿으시면 아멘) 

이런 영적 권위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얻고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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