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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를 베푸는 주님 (요 1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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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베푸는 주님
요한복음 10:7-15

본문 요한복음 10:7-15절의 말씀은, 이 험한 세상에서 그리스도 되신 나사렛 예수와 예수만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마음에 모시고 따르는 사람과의 관계를 비유로 말씀합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1) 나사렛 예수가 진정한 양의 우리이자, 양들이 들고 나는 양우리의 문이라고 하는 비유이고, (2) 나사렛 예수만이 ‘선한 목자’라는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의 전제는,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영접한 사람은 모두가 나사렛 예수가 기르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만이 참으로 믿을 수 있고, 의지할만한 가치가 있는 ‘선한 목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크게 분류를 하면, 오직 임금을 벌기위하여 목자의 일을 하는 ‘삯꾼 목자’가 있고, 양을 생명처럼 여기고 사랑하면서 목양하는 ‘선한 목자’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삯꾼 목자는 평안 할 때에는 양을 잘 키우다가도, 갑자기 이리를 비롯한 생명을 위협하는 맹수가 나타나면, 양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양을 버리고 도망을 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삯꾼 목자’의 특징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자신이 땀을 흘리고 일한 노동의 댓가인 ‘삯’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당연히 양보다는 자기생명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당연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선한 목자’란, 양을 키우지만 반드시 ‘받을 삯’ 때문에 양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양을 사랑하고, 양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에서 목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 목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런 목자는 평시에는 다른 목자와 다른 것이 없지만, 양이 맹수에게나 도적에게 위협을 받을 때에 보면, 다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가 기르는 양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과 능력을 동원하여, 그것이 맹수이든지 도적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비록 자기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하니 있을지라도 담대하게, 양의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과 싸워서 양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양은, 이런 선한 목자를 만나야만, 험악한 세상을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은혜를 덧입게 되고, 뿐만 아니라 위기에서도 생명을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이런 점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나사렛 예수는 양의 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본문 7절에서 말씀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집에 누군가 초인종을 “띵동~”하고 누릅니다. 집안에서 “누구세요?” 라고 합니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철수 있어요? 철수 친군데요.”라고 하니까, 안에서 “그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하고는 잠시 뒤에 문이 활짝 열립니다. 문이 열린 것은, 그 집 아이의 철 수란 이름 때문에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립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선행이나, 지식이나, 지위나, 수행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보려고 노력을 하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된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로 여러분을 태우고 가는 구원방주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악해도, ‘양의 우리’는 양에게 있어서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입니다. ‘양 우리’ 밖에서 아무리 밤새도록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친다고 할지라도, ‘양 우리’ 안에 있는 양은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양 우리’의 밖이 춥고, 매서운 바람이 불고, 어둡다고 할지라도, ‘양 우리’ 안에서는 따뜻하게, 편안하게 밤을 지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양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된 공동체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성령의 능력 아래 있고,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교회’는 나사렛 예수께서 감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이 바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제물이라는 점을 믿고, 겸손히 이런 엄청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멘’하고, 믿고 받아들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믿음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런 나사렛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라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렛 예수를 인류의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은, 내가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믿어지게 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먼저 당신의 피조물인 사람에게 베푸신 선행은총이고, 아버지 되신 분의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한 번 가만히 돌아보세요. 지난 한 주간을 살면서도 얼마나 아찔한 순간을 만나고, 불안하게 살아왔습니까? 사실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이것저것 얽매이는 것이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을 하면,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두운 밤에는, ‘양 우리’안에 들어가 있어야 안전합니다. 어떤 겁이 없는 양이 ‘양 우리’에 답답하게 갇혀 살기 싫다고, 들판으로 나가서 자유롭게 돌아다녀 보세요. 당장은 아마도 속이 후련합니다. 넓은 들판이 편하고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사나운 짐승이나 도적을 만나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거이 우리를 벗어난 양의 운명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지난 한 주간 말씀과 함께 있고, 예수와 동행한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양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비유를 하셨는데, 그 의미는 예수에게 속한 사람은 ‘하루의 삶의 시작과 끝이 예수에게서 시작되고, 예수님으로 끝을 맺어야 한다.’라는 것을 표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란 문’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의 꼴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지금 지구상에 거하는 60억이 넘는 인구 가운데서,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으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은혜의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배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러운 귀신들과 사탄의 역사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함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삽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큰일을 하자면, 반드시 날을 받고, 벽에 못 하나 치는 것도 벌벌 떱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 담대하고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양 우리’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하고, 언제나 성령의 도우심 아래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언제나 가장 좋은 안식처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양 우리로 들어가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본문 9절에서 말씀하기를,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목자와 양은 서로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서로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서로가 신뢰하고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의 음성을 알고 있다는 것은 서로가 신뢰하고 믿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목자는 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우리 밖으로 양을 불러내서, 이끌갑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양이 많아도 목자와 양의 관계는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는 개인적인 만남이고, 인격적인 관계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지나온 믿음생활을 한번 가만히 돌아보세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씩 그 이름을 아시고 불러주시고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이 잘났든지 못났든지 똑같이 사랑하고 아껴주셨습니다. 목자는 한시도 양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기르는 양을 어느 곳으로 데리고 갈까? 어디서 물을 먹일까?를 늘 궁리합니다. 더 좋은 곳으로 끌고 가고 싶고, 더 영양가 있는 꼴을 먹이기 위하여 안간힘을 씁니다. 이것이 목자의 사랑입니다. 이런 목자를 따라가는 양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머무는 양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처한 환경에 대한 염려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다 알아서 책임을 져주기 때문입니다. 

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나의 전 삶을 맡기고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양은 목자가 이끄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목자를 전적으로 믿고 신뢰해야만 합니다. 언제나 문제는 내 생각을 목자의 판단보다 앞세울 때에 발생합니다. 목자의 인도함보다 자기의 생각이 앞설 때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가 길을 가면서, 엄마의 손을 뿌리치면, 몇 걸음 못 가서 넘어져 무릎을 깨고 아프다고 웁니다. 하지만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으면 놓치지 않고, 넘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예수께서 붙잡아주신 그 손을 놓지 말고, 예수께서 인도하신대로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3) 목자가 주는 꼴을 먹으면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을 누립니다. 그렇습니다, 본문 10절에서 예수는 말씀하기를,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얻게 하려고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름철에 한강변에 치렁치렁 늘어져 있는 수양버들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 집니다. 그리고 도심을 지나다가 솟아오르는 분수를 보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풍성함이란 바로 이렇게 차고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요즈음 기름 값이 비싸서 걱정입니다. 그런데 기름 값보다 물 값이 더 비싸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기름이야 안 쓰면 조금 불편해서 그렇지, 견딜 수가 있지만, 물은 사정이 다릅니다. 그러면 공기는 어떻습니까? 물과 공기와 햇빛을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시편23:1-4절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보세요.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쉬움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시편 23편을 통해서 야훼가 목자가 된 삶은 아쉬움이 없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 가지 일에서 실패하고, 부족함을 잔뜩 가지고 홀로 허덕거리는 사람을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목자로 여기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풍성한 생명이 됩니다. 풍성한 은혜와 평안과 만족을 주고, 누리게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내가 원하는 것과 내게 필요한 것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원하는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필요한 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있어도 그만, 없으면 단지 조금 불편한 것을 가지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다른 은혜까지도 안 받은 것으로 여기고, 감사에 인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주위에는 의외로 많습니다. 참으로 답답할 노릇입니다. 이제부터는 그런 어리석음을 온전히 회개하고, 언제나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풍성히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풍성하게 감사로 응답하고 살고자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선한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14-15절에서 말씀하기를,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온 인류를 위한 선한 목자입니다. 반면에 삯군은 거짓 목자입니다. 삯군은 양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양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습니다. 삯군도 평안할 때에는 선한 목자와 다름이 없이 목자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씀씀이를 보면, 참 목자인지 거짓 목자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삯꾼 목자는 양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삯을 바라고, 돈을 바라고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삯꾼 목자란 예수께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을 가르쳐서 비유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삯꾼 목자는 정작 어려운 일을 만나면,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고, 양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자 달아나고 맙니다. 그래서 예언자 에스겔은 겔 34:8절에서 예언하기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내 양 떼가 약탈을 당하고, 참으로 내 양 떼가 온갖 들짐승에게 공격을 당하고 살육당하여 그것들의 먹이가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다. 내 목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내 양 떼를 찾으려고 나서지 않았다. 그 목자들은 양 떼를 잡아서 자기들의 배만 채우고, 내 양 떼는 굶겼다.’라고 한 것입니다.

중국 쓰찬성에서 큰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은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특히 학교 건물이 무너져서 수업을 받던 아이들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느 학교의 선생님이 제자를 내버려두고 지진 피해 현장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반면에 어떤 여순경은 자신의 갓난 아기에게 먹일 젖을 다른 아기에게 물리는 미담이 소개되어 나중에 특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선한목자의 자세이고, 삯꾼목자의 자세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기의 선 자리를 분명히 해야만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려서는 안됩니다. 아합과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니까 삼년 육개월의 가뭄이 온 것입니다. 

850:1의 기도 대결을 벌였던 엘리야처럼 모든 것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여러분을 온전하게 돌보아 주십니다. 예수께서 돌보아준다는 것은 여러분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엘리야처럼 기도하는데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하되,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문이 되고, ‘은혜의 우리’ 안에서 사는 사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여러분 물질의 문제나, 건강의 문제, 직장의 일이나 사업이나, 자녀의 문제가 있습니까? 선한목자 되신 예수는 여러분의 문제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기노스코’인데, 이 말은 깊은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속 깊은 것까지 속속들이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풍성한 은혜를 베푸는 주님은 여러분의 문제와 꿈을 압니다. 마음의 소원을 압니다. 여러분의 약함을 압니다. 부끄러움을 압니다. 아픈 상처를 압니다. 여러분이 겪은 파란곡절을 압니다. 그런 선한목자께서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선한 방법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돈도 귀하고, 보석 덩어리도 귀하고, 학벌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생명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는 거룩한 생명을 죄인을 위하여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사렛 예수가 준 풍성함에 감격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감사하는, 구체적인 삶을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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