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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된 삶의 방식 (시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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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삶의 방식 (시 1:1-2)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복 있는’이란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하면 ‘복 되어라’가 우리말에 더 가깝습니다. 즉 ‘복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 복 되어라!’라는 문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 대해 본문 1절과 2절에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번역으로 보면 ‘복 있는 사람’이란 문구에서 중요한 것은 ‘복’이 아니라 ‘이런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복(福)아니라 ‘삶의 방식’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런~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복 되어라!’입니다.

시인은 복된 사람의 삶의 방식을 말함에 있어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입니다. 시인은 이 문장에서 목적어로 ‘꾀’, ‘길’, ‘자리’라는 단어를 선택했고 동사로 ‘따르다’, ‘서다’, ‘앉다’라는 단어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발전되어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왜냐 하면 우선 ‘꾀’는 ‘계획’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길’은 ‘구체적인 행동’ 그리고 ‘자리’는 ‘결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이 사용된 문장은 계획이 발전하여 구체적인 행동이 되고, 구체적인 행동은 곧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성장과 발전의 과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사에 있어서도 ‘따르다’라는 것은 ‘좇아가다’라는 말과 같고 ‘서다’라는 것은 ‘함께 동행하다’‘함께 걸어가다’ 그리고 ‘앉는다’라는 것은 ‘함께 동참하고 함께 누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뒤좇아가 따라잡게 되고 따라잡아 이제는 함께 걸어가게 되고 함께 걸어가서 함께 동참하고 함께 누리게 되는 일련의 성장과 발전의 과정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악과 죄의 중요한 특징이 바로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악인’이나 ‘죄인’ 그리고 ‘오만한’과 ‘아니하면’이란 단어를 생략하게 되면 ‘성장과 발전’이라는 의미의 내용만 부각되는데 이는 곧 성장과 발전은 사람이면 누구나 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어지는 3절 말씀에 ‘형통’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형통이란 무엇인가요? 자신의 계획대로 또는 생각대로 일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꾀(계획)가 길이 되고 길이 자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좇아가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기에 부함을 향해 좇아갑니다. 배움에 있는 학생들은 학업을 좇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각자의 목표와 꿈을 좇아갑니다. 좇아가다가 곧 따라잡게 됩니다. 어느 순간인가 자신의 삶이 부해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인가 각자의 목표와 꿈에 가까워지고 그것을 이루고 누리게 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기가 속한 사회 더 나아가 국가가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60년대, 70년대를 뒤돌아보면 성장과 발전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가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의 국민들은 저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잘 살아 보기 위해 애썼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새마을 운동이 중심이 되어 ‘잘 살아 보세’를 외쳤던 시기였습니다. 교회들도 성장과 발전에 같이 동참했습니다. 교회에서는 그것을 부흥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80년대, 90년대 들어서면서 그렇게도 외치던 어느 정도 잘 사는 수준에 다다랐습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성장과 발전이 만들어낸 자리에 앉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 자신의 자리를 만든 사람들을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교회들 가운데에도 성공한 교회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새로 들어선 정부는 국민 행복 시대를 만들겠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정부에서 말하는 행복 또한 성장과 발전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장과 발전은 대부분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또한 사회, 국가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삶의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삶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일이 잘되고 성장하고 발전하고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면 사람들을 기뻐합니다. 반대로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삶은 사람들에게 불안을 주기도 합니다. 성장하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자신이 속한 직장이나 사회 국가가 발전하지 못하고 후퇴할까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IMF는 성장과 발전을 막는 거대한 장벽이었습니다. 그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또 지금 혹 있을지 모를 전쟁의 불안도 자신의 목숨을 잃을까 하는 불안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루어 놓은 성장과 발전이 무너질까라는 불안이 더 큽니다. 이렇듯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삶은 사람들을 웃게도 하고 눈물 흘리게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 속에서 사람들은 쉽게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모습들입니다. 시인은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삶 속에서 ‘악과 죄 그리고 오만함’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이러한 시인의 의도는 본문 1절에서 ‘아니하며’라는 반복된 부정어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정어 ‘아니하며’속에는 발견하고 구별해야 하며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성장과 발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이기 때문이고 오늘 우리도 거기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꾀’라는 것에서 ‘악인의 꾀’를 발견하고 구별해야 합니다. ‘길’이라는 것에서 ‘죄인의 길’을 발견하고 구별해야 합니다.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발견하고 구별했으면 그것을 거부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시인은 복된 삶의 방식을 본문을 통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된 삶의 방식이란 바로 본문 2절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먼저는 발견하고 구별하기 위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묵상’이란 ‘읊조리다’입니다. 뜻을 새기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곧 말씀이 입에 붙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것은 말씀이 책에 기록된 문자가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 혹은 마음과 생각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뜻합니다. 시인은 말씀을 묵상함에 있어 ‘주야’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오늘의 시간으로 24시간 즉 하루 종일을 뜻합니다. 이것은 곧 삶 자체가 말씀 묵상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럴 때 시인은 성도들이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삶 속에서 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제 발견하고 구별 했으면 거부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오직’과 ‘즐거움’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오직’은 ‘다른 것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즐거움’은 말 그대로 ‘즐거워하다’ 또는 ‘기뻐하다’라는 뜻이고 그 속에는 ‘좋아하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발견하고 구별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죄라는 것을 알게 되고도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를 안다는 것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된 일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도 계속 그 일을 합니다. 

그렇다면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삶 속에서 우리가 ‘악, 죄 그리고 오만함’이란 죄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것은 바로 열정에서 나옵니다. 본문의 표현으로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입니다. 죄의 성장과 발전이 주는 기쁨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기쁨을 더 크게 여길 때 그것을 멈출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서 살아서 역사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삶에 함몰되지 않고 만일 그 속에서 죄 된 모습이 발견된다면 단호히 그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지나온 시간들을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어떤 시간을 보내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한국 교회는 지난 시간 동안 성장과 발전에만 함몰되어 왔습니다. 악인의 꾀인지 죄인의 길인지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들이 만들어낸 자리가 결국은 오만한 자의 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만함 중에 가장 큰 오만함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욕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오히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욕하는 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는 어떠한 시간을 보내어 왔습니까? 세상이 하면 다 좇아갔습니까? 누구나 다 하기에 그것이 진정으로 꾀이며 길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습니까? 

이 시대에는 복된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특히 한국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복된 사람들은 성장과 발전에만 함몰되지 않고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을 늘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유념해야 하는 것은 복된 사람의 삶의 방식은 단순히 책을 읽듯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광야교회 모든 성도들은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을 늘 묵상하는 복된 삶의 방식을 택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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