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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세 종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마 27: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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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마 27:32-38)

오늘도 행복한 주일되시길 축원합니다. 

“옆 사람에게 인사 합시다. 오늘도 큰 은혜 받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의 형벌 중에 최고의 형벌이 뭔지 아시지요? 사형입니다. 

그러나 이 사형 집행은 15년 동안 한번도 집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후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까지 15년 동안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 현재 사형수는 60명이 넘는다 합니다. 그런데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으니 있으나 마나한 형벌이 되고 있습니다. 사형 제도에 대해 찬반 논쟁이 있으나 저는 개인적으로 사형제도에 찬성을 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이라 믿습니다. 

대부분 국가의 사형 방법은 교수형입니다. 일부 국가에서 약물을 투입하여 사형을 집행하거나 전기의자에 앉혀 감전시켜 집행하지만 우리나라는 교수형으로 집행합니다. 교수형이란 목을 매달아 집행하는 것입니다. 

옛날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두가지로 사형 집행을 했습니다. 

하나는 참수형입니다. 참수형은 칼로 목을 베어 처형하는 것으로 로마 시민이나 자유인이 범죄 했을 때 시행하는 제도입니다. 옛날 우리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했습니다. 

둘째는 십자가형입니다. 이 십자가형은 노예나 살인강도, 또는 반역자 등을 처형할 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골고다 언덕에는 세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한사람은 예수님이시고 나머지 두 사람은 흉악한 강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십자가를 진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첫 번째는 구레네 시몬입니다. 죄가 있어서 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진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지고 올라간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강도들이 진 십자가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문제는 이 세 종류의 십자가가 오늘날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우리는 이 세 종류의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인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받기를 축원합니다. 


1. 자기의 죄로 진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강도들이 진 십자가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하나님이 천지 창조시에 매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날만 빼고 매일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6일째 인간을 만드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작품입니다. 

인간이 왜 최고의 작품일까요?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심히 좋았던 존재인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그렇게 창조한 인간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었다는 것은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언약을 맺은 것이 없습니다. 그냥 명령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과는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을 깨면 어떤 벌이 주어지는지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그 언약을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왜 하나님이 다 아시면서 선악과 언약을 맺었느냐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 선악과 언약은 사람을 사람대우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이시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라는 최소한의 울타리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탄이 개입을 합니다. 사탄이 사람을 유혹합니다. 그리고는 언약의 당사자인 아담은 넘어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하와에게 찾아왔고 결국 하와는 그 유혹에 넘어 갑니다. “그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들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그 말에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었고 그것을 남편 아담에게 건네줍니다. 

그때 아담이 “이것이 무슨 짓이냐? 절대 먹을 수 없다.” 거절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언약은 깨진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책임은 있었지만……. 

그런데 아담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아담 할아버지는 그 하와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받아먹었습니다. 이때부터 모든 남자는 여자가 시키는 대로 행하고 살아야 행복한 존재가 되는 줄 알고 산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ㅎ ㅎ 

그런데 선악과를 먼저 먹은 것은 하와지만 언약의 당사자는 아담이기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책임을 묻습니다. 그때 아담은 회개치 않고 하와에게 책임을 넘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었기에 그 죄에 대한 책임은 벗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책임전가는 /회개가 아닙니다./ 

결국 그의 범죄는 모든 인류의 타락을 가져 왔습니다. 
그때부터 사람에게 죄가 들어 왔고 모든 인간은 타락하여 선한 것이라고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롬3: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롬3:23절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노예의 자식은 부모의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노예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양반제도 시절에는 양반의 자식은 태어날 때부터 양반이고 상놈의 자식은 태어날 때부터 상놈입니다. 자식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없이 부모에 의해서 정해졌듯이 우리는 첫 사람의 죄로 인해 죄인으로 태어났고 그 죄의 값을 치러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강도의 십자가는 오늘 나의 십자가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 강도들은 자기들의 죄 값을 치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자기의 죄 값을 치루는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십자가 강도처럼 남의 탓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우리를 구원하라”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강도처럼 패역한 죄인인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고 사람 몸을 입고 찾아오셨습니다. 그 사건이 성탄 사건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어야 할 십자가를 예수님이 대신 지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분은 내가 담당해야 할 죄의 수치를 대신 당하셨습니다. 내가 담당해야할 고난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살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머리에는 가시를 엮은 관을 쓰셨습니다. 얼마나 지쳤기에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를 질 수 없어 넘어지고 쓰러지고 했을까요? 그가 발걸음을 옮겨질 때마다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밤새 채찍에 맞았기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셨습니다. 하나님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립니다. 제 6시 어두움이 임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도 그 고통과 수치가 너무도 큰 것을 미리 아셨기에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이 취미생활인줄 아시나요? 
신앙생활에 한가한 사람들의 여가생활인줄 아시나요? 

신앙생활은 핏 값입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엄청난 피를 흘리신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생활입니다. 그 주님의 육체를 밟고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나요? 

예배가 뭐지요? 날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代贖(대속), 대신 값을 치르신 주님의 은혜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영을 새롭게 하네/ 

그 보혈이 우리 죄를 씻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구원은 내가 값을 치르지는 않았습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결코 값싼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성자 하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희생으로 얻은 구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은혜를 잊고 삽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생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굴 위해 예수를 믿나요? “나를 위해” 
누굴 위해 예배를 드리나요? “자기만족을 위해서”입니다. 
누굴 위해 기도하고 있나요? “자기소원 성취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제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 죄로 내가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신 주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누굴 위해 예수를 믿어야 하나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누굴 위해 예배 드려야 하나요? 주님이 기뻐하시고 만족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누굴 위해 기도해야 하나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의 목적이 뭔가요? 내가 받은 은혜가 정말 귀하고 귀한 것임을 알았다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고 전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빚진 자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옥 가는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죄로 인한 십자가를 저어야 하는데 주님의 은혜로 해결 받은 자의 마음입니다. 
  

2. 타인의 죄로 짊어진 십자가입니다.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원래 그 십자가는 내가져야 할 내 몫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어서 주님이 대신 지신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뭐지요? 십자가는 목걸이가 아닙니다. 

제가 어느 모임에 갔더니 어떤 아가씨가 십자가 목걸이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반가워 인사하며 “예수님을 믿나보죠?” 인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멋 있어서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교회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고 심판의 표시입니다. 내가 내 죄로 저주 받아야 하고 내 죄로 심판받아야 하는데 주께서 대신 지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분은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히 천국에서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에게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려고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갈3:13절을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라고 했는데 실상은 “나를 위해서”입니다. 

전에 말씀 드렸지요? 이 세상에 인간이라고는 오직 나 한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죄도, 흠도 없으신 분이기에 우리 죄 값을 완벽히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이란 말을 씁니다. 대신 값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결과로 우리가 의롭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義(의)가 뭡니까? 義(의)는 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째서 우리가 죄 없는 상태가 되었나요? 우리 행위가 의로워서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이 의의 하나님이기에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믿기만 하면 그 흠 없는 피로 깨끗함을 받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1:18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의 피로 씻어져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이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아멘입니까? 새로워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존재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이제 우리의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롬14:8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주의 피로 산 주의 것이 되었으니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가 이 진리를 알지 못할 때는 교회를 그토록 핍박하고 믿는 자들을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고 난 후에는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삽니다. 그러면서 고전9:16절에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합니다. 복음의 결과가 뭔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주님의 은혜를 믿습니까? 
그 은혜로 오늘의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값을 치루고 사신 분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대속의 은혜를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구별된 자이기에 갈 곳 안 갈 곳을 구별해야 합니다. 할 것과 안할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3.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억지로 진 십자가라 표현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정말 재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왔다가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 행렬을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주 넘어지고 쓸러지니 군병들이 답답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눈에 시몬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원치 않게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지고 올라갔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아마도 피부색이 좀 검다고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십자가도 현재 우리가 지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이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지리고 요구하신 십자가입니다. 

눅9:23절을 보세요.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 자기 십자가가 뭘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싫어도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억지로라도 져야 할 것입니다. 싫다고 벗어 버린다면 주님께 대속의 빚을 진 자로서 합당한 성도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를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저는 목회를 오래 하면서 보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기 십자가를 포기하고 벗어 버리는 사람은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시킨다고 교회를 떠납니다. 
어떤 분은 원치 않는 직분을 주었다고 나갑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이라고 무시하고 내 팽개칩니다. 

그러면 복이 없습니다. 왜죠? 그것은 직분을 주신 주님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힘들고 어려워도 묵묵히 주어진 직분을 감당합니다. 
거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환경이 어려운데도 묵묵히 감당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지시고 복을 주십니다.   

구레네 시몬을 보세요. 그는 이 십자가를 억지로 졌습니다. 그런데 그 골고다 십자가 사건 때문에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을 전도하여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결국 그의 부인은 나중에 사도바울의 협력자가 됩니다.   

막15:21절에는 이 시몬이 누군지를 소개합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라고 했습니다. 

시몬이 루포의 아비입니다. 그런데 롬16:13절을 보세요.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억지로 십자가를 진 시몬은 그 가족을 구원하고 그 자녀들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우리가 억지로 지는 십자가라도 감사함으로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주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고난이 따르고 핍박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가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 길을 포기하지 마시고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 종류의 십자가는 모두 우리와 관련이 있는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달렸어야 할 십자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이런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복을 받았고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남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고 복입니다. 
이 세 개의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어찌하고 계십니까? 
(최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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