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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집과 길(I) (요 1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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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길(I) (요 14:1-14)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아버지께서 그 당시 제가 살던 시카고에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제 장인 어른, 그리고 저희 부부 이렇게 넷이서 함께 뉴욕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시카고에서 뉴욕까지는 장장 1천 킬로미터 정도 되니까 한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만큼의 거리였습니다. 
그 먼 길을 자동차를 몰고 갔는데, 그 찾아가는 목적지, 즉 뉴욕에 사시던 어느 목사님 댁이 우리 모두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이었습니다. 
제 장인 어른이 주로 운전을 하셨고, 그 옆 조수석에 앉아서 지도를 보며 길을 찾는 것이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달려서 밤늦게 뉴욕에 도착했는데, 곁길 한번 빠지지 않고 번지 수 하나 틀리지도 않고 정확하게 바로 그 목사님 댁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 다 왔어요. 이 집입니다."라고 말씀드리니까, 뒷좌석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께서는 정말 눈이 휘둥그레지셨습니다. 
생전 처음 오늘 길을 그냥 지도만 보고 찾아와서 또한 생전 처음 보는 집을 가리키면서 '바로 이 집이예요.'하고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리니까, 아버지께서는 "정말 이 집이 맞나? 우째 그래 바로 찾아 왔노?"라고 마치 무슨 기적이라도 보신 듯이 신기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방향 감각만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시지만, 그 대신에 지도를 읽고 도로 표지판을 보면서 처음 가는 길을 찾는 데에는 전혀 받은 은사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날 제가 지도만 보고 천리 길을 달려서 그 뉴욕 뒷골목 구석에 있는 어느 한 집에 정확하게 도달하니까, 정말 바로 찾아왔는지 의아해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네비게이션이 나와서 편리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미국에 살려면 지도를 가지고 길 찾아가는 것 하나만큼은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특히 목사는 집 주소만 가지고 심방을 가야 할 경우가 많으니까 더욱 그랬던 것입니다. 
집과 길, 이 두 가지는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방문하려는 집이 있을 때에 길을 알아야 그 집을 찾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우리에게 알려 주고 가신 것이 바로 한 '집'과 그 집을 찾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동안 삼년 간 밤낮 얼굴을 맞대고 살았던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이제 서로 헤어지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던 도중에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너희는 지금 내가 가는 그 곳에 따라올 수 없다."라고 고별선언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라서 "주님, 어디로 가시기에 우리가 따라갈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올 것이다."라고, 잠시이기는 하지만 그들과 육신적으로는 이별하게 될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 말씀은 제자들에게 실로 충격적인 폭탄선언이었습니다. 
만찬석상의 분위기는 일순간에 무거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신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주님께서 우리 곁에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침울한 생각이 그들에게 덮쳐왔기 때문이었습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영어 속담이 있습니다. 
'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입니다. 
사람끼리 어떤 친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바로 '서로 만나서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랫동안 못 보게 되면 아무래도 그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지기 쉬운 것이며, 그래서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제 예수님이 우리 곁을 떠나시면 앞으로 주님과 우리 제자들의 관계란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삽시간에 근심이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제자들의 심정을 잘 아셨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저 유명한 말씀, 곧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씀을 남겨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예수님의 제자들뿐 아니라 오고 올 모든 우리 기독 신자들에게 똑같이 남겨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들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 
제자들이야 그래도 삼 년이나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따라다닐 기회가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 중에는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즉 오늘날의 기독신자들은 자기가 단 한 번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믿고 따르는 형편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견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에 내 곁에 있지 않는 사람을, 내가 평생토록 단 한 번도 대면해 볼 기회가 없는 사람을, 과연 어떻게 나의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그런 우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음성으로 '너희는 조금도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위로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비록 지금 우리가 육신으로는 예수님을 만나 뵙지 못한다 할지라도 조금도 근심할 필요 없이 그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다시 만나게 될 한 '집'을 약속해 주셨으며 또한 그 집을 찾아갈 수 있는 '길'까지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종려주일과 다음 부활주일에 걸쳐서 저와 여러분은 그 '집'과 '길'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나라에 예비된 '아버지의 집'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 예수님께서는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지금 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라고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불가시적이요 그래서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 내세의 세계를 가리켜서 이처럼 '집'이라는 말로써 그 누구라도 쉽게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게 표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예비해 놓을 내세에는 너희들이 살 수 있는 거소가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결코 애매모호한 추상적, 관념적 세계가 아니라, '실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실존 공간'임을 분명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 '만약에 그런 천국이 실존하지 않는다면 너희에게 벌써부터 그런 곳은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는 재차 강조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 신자들이 가게 될 '내세'를 가리켜서 "내 아버지 집"이라고 아주 쉽고도 자연스럽게, 마치 정말 자기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처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람도 내세를 가리켜 이처럼 쉽고 간단하면서도 또한 구체적이고도 명료하기 짝이 없는 표현을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한다하는 성인들이나 현자들이 가르친 내세라는 것은 모두가 지극히 애매하고 알아듣기 힘든 관념적인 말들로만 가득 차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가장 도를 많이 닦고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들조차 가장 대답하기 힘들어 했던 그 이승의 세계를 두고 '아, 그것은 바로 내 아버지의 집이다.'라고 이처럼 쉬운 한마디로 말씀하실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화육하시기 전에 그 곳에 진짜로 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천당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주 막연한 상상의 세계이지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있어서는 원래 당신께서 거주하고 계셨던 지극히 확실한 현실의 세계인 것입니다. 

미국에 오래 살다가 한국을 방문하게 된 교포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미국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것이 조금도 어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아주 쉽고도 명백하게, 그리고 듣는 사람이 절로 확신할 수 있는 말로 미국을 묘사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생 미국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미국에 대하여 설명하려 한다면 그 말은 자연히 어렵고 복잡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책을 읽어 보고 사진을 보고 인터넷 검색을 하고 거기에다 자신의 상상의 나래까지 보탠다 하더라도, 미국에서 살아 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 말하는 미국이란 듣는 사람에게는 자연히 불확실하며 애매하며 의심쩍은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자들이나 우상종교의 교주들이 내세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그처럼 어려운 것이 된 이유 역시 바로 그들 자신이 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가 본 적이 없는 장소, 살아 본 경험이 없는 공간에 대해서 설명하자니 자연히 말이 안 되는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언어의 난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내세의 거소, 영원의 세계에 대하여 지극히 익숙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이전에 실제로 그 성부 하나님의 집, 저 천국에서 살다가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그처럼 '하나님의 집'에 살고 계셨던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신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아침에 집을 나왔다가 저녁에 돌아가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도 "나는 지금 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알아듣기 너무나도 쉽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당신의 목적지를 분명히 밝혀 주신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기가 막힐 정도로 엄청난 약속까지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제자들과 완전히 이별하려고 천당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을 그 곳에서 당신과 함께 살게 할 준비를 하시기 위하여 가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 '예비'되고 나면 반드시 다시 '재림'하셔서 당신의 제자들을 그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영접'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사실상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영원한 동거'를 위한 잠시 동안의 이별일 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조금도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장차 반드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저 천국의 집으로 영접해 주실 것이라는 이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마음 푹 놓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갈 때에 아내와 자녀들은 우리나라에 남겨두고 남편만 일단 먼저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남편이 아내에게,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어떤 약속을 하고 가겠습니까?
"여보, 내 먼저 미국 가서 몇 개월 동안 열심히 일해서 생활기반을 좀 닦아놓고 돌아오겠소."라든지, "얘들아, 아빠가 먼저 가서 우리 가족 함께 살 집 한 칸부터 일단 마련해 놓으면 다시 와서 너희들도 미국으로 데려갈게."라고들 약속할 것입니다. 
  
그런 약속을 받은 아내나 자식들이라면 자기 남편, 자기 아버지와 잠시 이별한다고 해서 무슨 근심을 하겠습니까?
반면에 가장이 회사 부도가 났다든지 해서 가족에게조차 무슨 약속은커녕 편지 한 장도 남기지 않은 채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면 물론 태산 같은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는 그런 식으로 버림받은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신 우리 예수님께서 예비하고 계시는 저 '하늘나라의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될 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실로 행복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주님의 신부'들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논산 훈련소에 들어가 있던 어느 날 연대장의 검열과 사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전날 밤에 우리 중대의 조교들이 각 내무반별로 관물정돈을 시켰는데, 이것은 개인 소지품들을 관물함 속에 단정하게 정돈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말이 간단해서 관물정돈이지 군복들을 앞에서 볼 때에 두께와 폭이 똑같고 더구나 가장자리가 '두부모'처럼 직각이 되도록 접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군대에서나 이런 일에는 선천적으로 재주가 없는 '문제 사병'들이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 내무반의 조교가 '관물정돈 잘 하는' 훈련병들을 뽑아서 그 '문제 사병'들의 관물정돈까지 대신해 주도록 했는데, 손재주 하나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고 자타공인하고 있는 저는 당연히(?) 전자에 뽑혀서 다른 몇 동료들과 함께 밤을 완전히 꼬박 새면서 우리 내무반원 전체의 관물정돈을 정말 완벽하게 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 대신에 다음날 조교는 각 소대에서 우리처럼 전날 밤잠 한숨도 못 자고 관물정돈을 했던 훈련병들을 열병식에서 살짝 빼 준 덕택에, 한 열댓 명 정도의 '열외자'들이 훈련소의 어느 한쪽 구석에 모여 휴식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반나절 동안 멍하니 앉아 있기가 심심하니까 인솔 조교가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라고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 주로 하찮은 유행가를 한 곡씩 부르고들 있었는데, 어느 한 훈련병이 나가더니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 다 잘 아시지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내 집뿐이리'라는 유명한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노래의 첫 구절이 제 귀에 들어오는 순간 제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습니다. 
군대 오기 전에 사회에서 부를 때에야 뭐 그저 그런 흔한 노래였지요.
하지만 이제 집을 떠나서 '푸른 제복'을 입고 매일같이 '뺑뺑이'를 쳐야 하는 고달픈 훈련소에 와서 그 노래를 한번 불러 보세요.
이게 보통 감동을 주는 명곡이 아닙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 내 쉴 곳은 작은 내 집뿐이리' - 그냥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입니다.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다 나랑 똑같이 머리를 빡빡 깎은 스무 살 전후의 머슴애들밖에 없는 삭막하기 짝이 없는 곳에 와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집 생각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가사 구구절절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집 내 집뿐이리' - 앞에 나가서 그 노래를 부르는 친구는 물론이요, 곁눈질로 보니까 함께 듣고 있던 녀석들 모두가 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눈이 벌개졌습니다. 
저는 노래를 따라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저 역시 노래가 끝날 즈음에 가니까 목구멍이 아플 정도로 이미 목이 메어 있었던 것입니다. 

왜 '내 집'이란 곳이 그처럼 '스위트 홈'(sweet home), 정말 달콤하고도 행복한,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집이 됩니까?
먹고 잘 수 있는 곳이라서 그렇겠습니까?
훈련소에서도 '일식삼찬'으로 삼시 세끼 꼬박꼬박 밥 잘 먹여 주었고, 스폰지 매트리스를 깔고 편히 잘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집으로 가고 싶은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그 집에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에 살 때에는 아침저녁으로 뵈어도 전혀 반가운 느낌이 들지 않았던 부모님의 얼굴이 정말 그립고, 같이 살 때에는 티격태격 싸우기만 하던 형제자매가 그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래서 군입대하는 모든 장정들은 누구나 다 훈련소에 들어가는 첫날부터 첫 휴가 갈 날을 문자 그대로 손가락 꼽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먹고 자고 싶어서가 아니라, 집에 가서 내 사랑하는, 그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모처럼 휴가 얻어 집에 갔는데, 만약 그 집에 자기를 기다려 주는 가족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면 그 얼마나 실망스러운 휴가가 되겠습니까?

우리 부부가 미국에서 아들 영은이를 낳고 몇 년 지난 후 제 아내가 영은이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시댁에서 약 반년 가까이 지내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입대하기 전까지는 계속 부모님 집에서 살았고 제대 후에 곧 결혼했기 때문에 그렇게 몇 달씩이나 혼자 살아보기는 제 평생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원래 손재주가 좋은 데다가 결벽증(?)까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저는 다른 사람이 우리 아파트를 찾아와도 전혀 '홀아비' 생활이 티도 안 날 정도로 집안을 깔끔하게 해 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낮에 교회에서 근무를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올 때였습니다. 
그 전에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가 "자기 왔어?"라고 반가이 맞아 주고 영은이 역시 제게 쪼르르 달려오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집에 가도 저를 반겨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깨끗하고 안락하게 정돈되어 있는 집이라 해도 그 분위기는 그저 썰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집은 똑같은 집이지만 이제 그 곳은 아무 기쁨이나 행복이 없는, 그냥 잠만 자는 여관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집이란 것은 거기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을 때에만 정말 '스위트 홈', '즐거운 나의 집'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족이 없는 빈집은 그냥 '하우스'(house)이지 결코 '홈'(home)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 가고 싶은 것도 똑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천당이란 것이 그저 열두 진주문, 유리같이 맑은 황금 길, 온갖 보석으로 꾸민 집, 이런 것들만 있는 유토피아라면 뭐 그리 가고 싶은 곳이 되겠습니까?
강남의 화려한 호텔이나 서울랜드 같은 유원지에만 가도 저 같은 사람은 눈이 휘둥그렇게 될 만큼 잘 꾸며져 있습니다. 

하지만 천당은 그런 '고급 하우스'가 아니라 '스위트 홈'입니다. 
그곳은 날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우리의 '본향 집'입니다. 
이 삭막하기 짝이 없는 장망성에 살던 우리들이 꿈에도 그리던 그 사랑스러운 신랑을 만나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진짜 '스위트 홈'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도 우리 기독신자들만의 '즐거운 나의 집'을 찬송하지 않습니까?
'괴로운 인생 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 ...날 구원하신 주 모시옵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리라 그리던 성도들 한자리 만나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 우리는 이 '하늘 아버지의 집'을 두고 '오 사랑 나의 집'이라고 노래 부르는 천국가족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주님 계신 곳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사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 잠시 '우거하는 곳'일 뿐인 까닭에 절대로 정이 들 수가 없습니다.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 천국을 내 집으로 알고 있는 진짜 자녀들은 한시바삐 그 영광스러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꿀떡같이 간절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아무 행방도 밝히지 않고 세상을 갑자기 떠나 버린 분이 아니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목적지를 분명히 밝혀 주셨을 뿐 아니라, 다시 만나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까지 해 주고 이 세상을 잠시 떠나셨던 유일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우리 곁에 육신으로 계시지는 않는다 해도 조금도 근심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오실 그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않으시리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부푼 기대를 가지고 그 주님을 만나 영원히 함께 살 행복한 날을 확신 중에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만 그 예수님께서 예비해 주시는 '하늘나라의 집'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그처럼 사랑하던 예수님을 만나 그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 '스위트 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을 바로 믿는 사람은 천당 역시 확실히 믿게 되는 것이며, 반면에 예수를 믿노라고 하지만 천당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래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 죄인을 그 행복한 천당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까지 내려오셨고 십자가를 대신 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수난'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영벌의 고통'을 면하게 되었으며, 이 예수님의 '대속 공로'를 거저 입게 된 까닭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양자'의 자격으로 천당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을 꼭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 천국에 '아버지의 집'을 예비해 놓으시고 반드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리로 '영접'해 주시겠다는 우리 예수님의 이 약속을 굳게 붙잡고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근심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 믿음'과 '구원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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