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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사 52: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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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사 52:13-15)

: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나라와 이 한반도에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소원합니다.  

부활의 상징 중에 하나는 ‘백합’입니다. ‘부활 백합(Easter Lily)’이라고 까지 부릅니다. 부활절 강단 장식을 백합으로 하는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교회 부활절 꽃꽂이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백합이 부활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습니까? 먼저 그 화려한 흰색은 흰옷 입은 성도를 나타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흰옷을 입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백합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 백합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신부의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연상하게 합니다. 또한 백합꽃의 모양이 나팔과 같아서 나팔백합(trumpet lily) 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부활의 승리로 나팔을 부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부활절 백합이 생명이 없어 보이는 구근(球根)에서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부활의 상징이 되었다는 설명은 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죽은 것 같아’ 보이는 것에서 생명이 깨어나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완전히 죽은’ 것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어느 기독교 단체에서 부활절을 맞아 각 교회에서 사용하는 계란을 생명이 살아있는 유정란으로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이 단체는 “각 교회에서 부활절을 기념해 계란을 나눠주지만, 대부분 부화되지 않는 무정란을 사용하고 있다”며, “부활의 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유정란을 공급하고 있다.”고 광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예수님의 부활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정란이 건강에 좋기 때문에 먹으라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유정란과 부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남자 없이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은 무정란에서 태어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삶은 계란이나 썩은 계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히 죽으신 분이 다시 사신 것입니다. 

우리교회 교회학교에서는 먹기 좋고 맛이 좋다는 구운 달걀을 부활주일에 나누어 준다고 하는데, 구운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이 부활입니다. 도무지 불가능한 것에서 생명이 태어나고 다시 사는 것이 예수님의 탄생이고 부활입니다. 

부활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구근에서 백합이 피어나는 정도가 아닙니다. 완전히 죽은 것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합꽃이 주는 순결, 신성, 우아, 그리고 소망의 이미지를 통하여 부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백합처럼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은 의로운 종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난 받은 종이 하나님께 저주 받았다고 손가락질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는 의로운 종에게 사람들의 죄를 담당시키셨습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사람들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고난의 종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우하십니까? 이사야 53장의 말씀은 내용적으로 52:13 말씀부터 시작됩니다. 53장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이루신 결론이 52장의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먼저 결론을 기록하고 이어서 그 내용을 풀이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사건의 흐름을 따라서 이제 고난 받는 종의 결국을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고난 받은 의로운 종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존귀하게 하셨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I. 존귀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살렸다는 것만으로도 그 고난은 값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난 받은 종을 높이십니다.

13절 말씀입니다.
: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사 53:10)하신 고난의 종을 얼마나 높이시는 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형통하다[lk'c/싸칼]’는 말은 ‘번영하다’는 뜻입니다. 즉 받들고, 높이 들리고, 존귀하게 하십니다. 한 마디로 높이높이 솟아오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받들다[!Wr/룸]’는 말이 ‘솟아오르다’, ‘우뚝 솟다’는 뜻입니다. ‘높이 들리다[ac;n:/나싸]’는 역시 ‘들어 올리다’, ‘높이다’는 뜻입니다. ‘존귀하게 되다[Hb'G/가바]’도 ‘솟아오르다’, 즉 ‘높아지게 되다’, ‘높임을 받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지극히[daom]/]’ 즉, ‘대단히’, ‘열렬하게’라는 뜻이니 얼마나 높이신다는 것입니까?

1. 지극히 존귀하게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심으로 존귀하게 하신 것입니다. 고난을 부활로 갚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빌립보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빌 2:6-11).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 즉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9 말씀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얼마나 뛰어나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는 계속하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고 하였습니다. 

이 뿐입니까? 예수, 그 이름으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군병들에게 끌려가서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바로 그 곁에서 지켜보면서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이 충만하여 예루살렘 사람들 앞에서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복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요일 2:12). 

또, 예수, 그 이름으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 그 이름으로 사단을 결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로 칠십 명을 세우셔서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 후, 칠십 명은 기뻐하며 돌아와서 말하기를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고 하였습니다. 그 후,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결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초라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모욕을 당하신 그 이름으로 어떻게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처럼 보인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떻게 사단이 굴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높이시고 또 높이시되 지극히 존귀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탁월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심으로 지극히 존귀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에게 지극히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심을 믿음으로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다음으로, 부활하여 존귀하게 되신 예수님의 영향이 누구에게 이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나라는 어디까지입니까?
  

II. 나라  

나라는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김정은 비서의 영향력이 미치는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은 박근혜대통령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입니다. 미국 대통령의 영향력은 미국을 뛰어넘기에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향력은 어디까지 입니까?

먼저, 14절 말씀입니다.

: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이 말씀은 고난당하시는 종의 모습입니다. 고난의 종의 얼굴은 남들보다 더 안 되어 보였고,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상해서, 그를 보는 사람마다 모두 놀랐습니다. 여기에서 ‘놀라다[!mev;/솨멤]’는 말은 ‘아찔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너무나도 그 모습이 흉하여 사람들을 오싹해지게 하고, 아연실색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을 놀라게 한 고난의 종이 이번에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셨다고 하였습니까? 15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5a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너무 초라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던 고난의 종이 이제는 많은 나라를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 앞에서 입을 다물 것이라는 것입니다. 끔찍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랍게 하더니, 이번에는 지극히 존귀한 모습으로 나라들을 놀랍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시더니,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놀라다[hz:n/나자]’는 말은 본래 ‘물을 뿌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에 피를 뿌려 정결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레 4:6, 8;11). 제사장이 제물로 받친 양을 잡아 그 피를 뿌릴 때 죄가 사라지고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1. 세상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피를 뿌려 정결하게 하시는 일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세상을 정결하게 하실 때,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는 왕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 주시자,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서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마 12:2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쫓겨날 때 진정으로 세상은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또 하나의 목적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 후반절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히 2:14b)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이 그들의 입을 봉하여 아무 말도 못하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왕인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 분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사람들이 가장 놀랐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는 일을 꾸민 사단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데는 사흘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의 입을 봉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죄의 값을 요구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더 이상 치러야 할 죄의 값이 우리에게 없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사단이 우리에게 요구할 어떤 권리도 없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존귀하게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세상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모든 원수들의 입을 봉하셨습니다. 이 소식은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어야 할 복음입니다.
  

III. 전파 

이어지는 말씀은 왜 세상이 놀라고 세상의 임금들이 입을 봉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5b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예언자 이사야는 “왕들은 이제까지 듣지도 못한 일들을 볼 것이며, 아무도 말하여 주지 않은 일들을 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것도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소식은 고난을 받고 죽은 이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존귀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세상을 정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증거 하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놀라운 일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1. 영생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마 26:33-35) 하지만 그는 너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쉽게 꼬리를 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다시 소리를 높여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 2:14)고 외쳤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행 2:23-24)는 것입니다. 겁쟁이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용감하게 외쳤습니다. 그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영생의 복음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1:23 후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골 1:23b)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우리를 통하여 예수 부활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들이 들어보지도 못한 소식을 듣게 하여야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것을 깨닫게 하여야 합니다. 이 소식은 모든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으면서 단지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라는 것을 단지 주장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자신이 죄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되었음을 경험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전도를 결심하여야 합니다. 

부활은 다른 말로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소식을 듣지 못하여 영원히 죽을 사람이 있는데, 우리만 그 소식을 듣고 우리만 기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준다고 해도 우리의 기쁨이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오히려 이 기쁨은 나눔으로 더욱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부활의 복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 되기를 소원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국 대통령을 지낸 부시가 부통령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그는 소련 브레즈네프 수상의 장례식에 미국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은 공산당의 관례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검정 색이나,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 색으로 덮였습니다. 장례식의 말미에 고인의 부인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녀는 품에 간직했던 백합 한 송이를 꺼내어 관 위에 놓았습니다. 백합은 전통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꽃이었습니다. 그리고 미망인은 남편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순간 식장은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여인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일어선 그녀는 성호를 그었습니다. 이 순간, 여기저기서 미망인을 따라 성호를 긋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조지 부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얼어붙은 소련 땅에 기독교 신앙은 완전히 죽어 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순간 부활 신앙이 부활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습니다. 그 후 소련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교회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교회가 믿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다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을 믿는 사람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부활하심으로 지극히 존귀하게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정결하게 되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증인이 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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