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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네 가지 부활 (고전 1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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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부활 (고전 15:22-24)

16세기 영국의 메리 여왕은 영국의 기독교인들을 많이 핍박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 가면 메리 여왕 시대에 만들어진 독특한 감옥이 있습니다. 이 감옥의 벽은 사방 높이가 1.4m로 매우 낮고, 지붕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담장을 넘어서 집으로 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메리 여왕은 한 젊은 부부와 세 자녀를 이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그래도 예수를 믿는다면 그 안에서 죽어라. 하지만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면 자유롭게 담을 넘어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바뀌어서 예수 안 믿으려면 감옥에서 나와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 감옥에서 순교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부활입니다. 성경 행 24;15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망이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은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에 주를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부활의 믿음이 확실해지고 부활의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성경에 나오는 4 종류의 부활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죽은 자들 가운데 있었던 소수의 부활 
   
성경에 보면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 사건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왕상 17장에는 3년 흉년 때 엘리야를 대접했던 과부의 아들이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살려주신 사건이 있습니다. 

왕하 4장에 보면 엘리사를 극진히 섬겼던 수넴여인의 아들이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서 다시 살려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요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구 나사로의 무덤에서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주의 종들과 주님을 잘 섬겼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 종말 때 말고 역사가 진행 되는 동안에 초자연적으로 죽은 자들이 살아난 사건에 대해서 부활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반대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도 일종의 부활이라고 봅니다. 물론 그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언제가 다시 죽습니다.
   
히 11:35에 보면 두 종류의 부활이 나옵니다. 하나는 세상 종말이 아닌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 세상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을 말하고, 또 하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님 다시 오실 때 죽음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에 부활이라는 용어, 헬라어로는 ‘아나스타시스’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 일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연적으로는 죽으면 몸이 썩게 되어 있지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얼마든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통은 자연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질서를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자연법칙 안에 가두어 놓는 것은 신앙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분이시며 성경에 보면 초자연적인 역사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만들 수 없습니다. 지구상의 인구가 70억입니다. 70억이 힘을 다 합쳐도 죽은 자를 한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죽은 자도 살아날 수 있고,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주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고 우리도 물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고 우리도 한강을 가르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위급할 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이번에 27명이 이스라엘 기도여행을 함께하게 됩니다. 그 중에 목회자가 10명 정도 되는데 어느 목사님께서 골반의 관절에 문제가 생겨서 못 가실 뻔했는데 결단하시고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분인지 그분 동생 목사님인지 모르겠는데 전화 통화를 하면서 작년 이스라엘 기도여행 때 있었던 송경자 전도사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송전도사님은 무릎의 십자인대가 파열되어서 병원에서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이스라엘에 갔습니다. 

그분이 광야를 횡단한다는 것은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그분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해주셨습니다. 기도여행을 하는 11일 동안 송경자 전도사님은 관절의 통증도 별로 느끼지 못했고, 예루살렘 성벽돌기도 걸어서 했고, 유대광야를 무려 2시간 30분 동안 걸어서 횡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지금도 믿는 우리들에게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우리 주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입니다.
   
사단은 부활이 없는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이론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먼저 기절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시체도난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 숨겨 놓고 부활했다고 거짓말 했다는 것입니다. 환상설이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너무 사모한 나머지 환상을 본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먼저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고전 15:3.4을 보면 주님은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말은 성경이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진리의 책입니다. 성경은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빈 무덤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세상과 타종교는 무덤의 크기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나 기독교의 자랑은 빈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무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님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복음서에만 25회 이상 예언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넷째는, 제자들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된 모습이 부활의 증거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를 지실 때 대부분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들이 부활을 증거 하다가 목숨까지 버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목격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섯째, 초대교회의 설교의 내용이 십자가와 부활뿐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어떻게 사역을 했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여러 편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설교는 언제나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라는 내용을 강조합니다. 사도들이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여섯째, 이 세상의 역사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세계제일의 권위를 가진 대영백과사전, 20세기 최대의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 세계역사의 기초를 제공한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 등은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총독 빌라도에게 사형되었고, 자신이 예언하신대로 부활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역사도 주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오늘날에도 기적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성령으로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 우리들의 삶과 사역 속에서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여덟째, 오늘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사실이 부활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성경대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켰습니다.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된 것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아홉째, 성령의 증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증거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본 것처럼 믿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믿는 자 속에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3.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믿는 자들의 부활 
   
23절을 보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라고 말씀하는데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들입니다.
   
고전 15:51을 보니 부활은 비밀입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우리는 순식간에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의 광경을 살전 4:16-17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살아남은 자들이 부활한 자들과 함께 공중으로 들림을 받아서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활시키신 후에 이 땅에 지상재림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흰옷을 입고 흰말을 타고 주님과 함께 이 땅에 내려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천년 왕국을 통과하고 흰보좌 심판을 거친 후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계시며 모든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말은 그곳에는 아픔이 없다는 말입니다. 계21:4에 보면 사망도, 애통도,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합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이 분명한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수원교도소에서 사형을 담당하던 한 직원이 예수를 믿게 된 간증입니다. 자신은 사형수들이 죽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많이 보아왔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아무리 흉악범도 예수님을 진짜 믿으면 변화되는 모습을 보았고, 또 그들이 마지막 죽는 순간 때문이었답니다. 보통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신부님이 아무리 안심하라고 해도 막상 교수대 앞에서면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답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벌벌 떨면서 스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한답니다. 그때까지도 아무 종교도 갖지 않은 독한 인성을 가진 불신자들은 아예 국가와 법을 저주하고 이를 갈면서 교수대에 오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믿고 변화된 사형수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며 환한 표정으로 “목사님 먼저 갑니다” 하면서 찬송을 부르며 죽는답니다. 그들이 죽기 전에 제일 많이 부르는 찬송이 405장으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교회를 찾게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부활은 확실히 있고 믿는 사람들은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4. 최후의 심판 때 불신자들의 부활 
   
부활의 시기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저는 천년왕국설에 대해서 역사적전천년설을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역사적전천년설은 천년왕국을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있을 신자들의 천년왕국으로 봅니다.
   
부활에 관한 역사적전천년설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의인들이 부활하고 천년 왕국 후에 악인들이 부활한다고 봅니다. 이것을 이중부활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중 부활을 믿습니다.
   
23,24을 보면 주님의 부활 외에 두 번의 부활 즉 이중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어떤 사람은 의인의 부활만 있는 줄로 아는데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이 부활하듯이 악인도 부활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단 12:2입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의인과 악인 모두 부활합니다. 롬 5:28,29입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역시 의인과 악인 모두의 부활을 말합니다.
   
성경 계 20:4-6을 보면 천년 왕국 전에 의인들이 부활하여 천년동안 왕 노릇합니다. 그리고 13절을 보면 천년이 찬 후에 백보좌 심판이 있는데 그 때에 두 번째 부활 즉 악인들의 부활이 있습니다.
   
악인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은 끝없는 고통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합쳐도 지옥에서 잠간 받는 고통보다 약한 것입니다.
   
지옥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천국만 있고 지옥이 없다면 믿지 않아도 소멸되어버리니 별 상관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축복입니다. 지옥을 면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도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친척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소유했어도 죽으면 내 것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 천국과 지옥은 한 번 결정되면 변개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전도는 지옥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비결을 전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도만큼 큰 선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부활을 말한 후에 58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을 믿으면 견고하여 흔들림 없이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놓는 환경과 사건들이 많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도 부활과 영원한 세상을 확신하고 흔들림이 없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영국 어느 지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갑자기 석탄광 하나가 무너지는 바람에 그 안에서 일하고 있던 164명의 광부들이 생매장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깊은 슬픔을 가지고 사체발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체 옆에 판자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이 하십니다. 우리는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여 축복하소서. 우리는 대단히 유쾌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한 영광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곧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므로 우리는 이곳에 남지 않고 부활의 생명 가운데 아름답게 꽃 피울 것입니다” 석탄광의 무너지는 흙더미 속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영생의 기쁨을 가지고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10kg의 물건을 들지 못하는 사람이 100톤의 물건을 들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작은 시험에도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대환난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지금 작은 시험을 담대하게 이기십시오. 지금 작은 시험을 꿀떡 삼키십시오. 그래야 대환난을 이길 수 있고, 그래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둘째, 부활을 믿으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 후에 받을 상급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내세를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상을 기대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빌 3:13,14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께서 상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 상을 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주의 일에 힘을 썼던 것입니다.
   
계 2:10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에 보면 장차 받을 고난이 있습니다. 마귀가 십 일 동안 이라는 한시적인 환난을 받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우리들이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정도의 충성을 요구하시죠? 죽도록 충성입니다. 저는 우스갯소리로 제가 착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죽도록 충성해달라는 말을 못하겠으니 코피 나게만 충성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부활을 믿는 우리들이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충성은 무엇입니까? 저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명의 자리, 직분의 자리,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충성이라고 믿습니다.
   
영국 런던 워커 미술관에 콘트러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이 하나 걸려 있답니다. 그 그림은 옛날 폼페이라는 로마의 도시가 베스비어스 산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도시 전체가 용암과 화산재에 완전히 묻혀버린 일이 있을 때가 배경입니다. 하늘에서는 화산재와 불이 폼페이 성안에 쏟아져 내립니다. 사람들은 살아보려고 성문으로 밀려 나가는 혼란스러운 장면입니다. 그때 군인 하나가 성문 곁에 서 있습니다. 이 사람이 그림의 주인공입니다. 이 사람은 그 성문을 지키도록 명령을 받았기에 그 혼란 속에서도 자기 맡은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성문을 지키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기에 다른 명령이 없는 한 자기는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충성’입니다.
   
부활을 확신하는 우리는 자기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사명의 자리, 직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충성입니다.
   
오늘은 4 종류의 부활을 살펴보았습니다.

1.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죽은 자들 가운데 있었던 소수의 부활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3.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믿는 자들의 부활
4. 최후의 심판 때 불신자들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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