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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 (요 2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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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요 20:19-20)
  

들어가는 말

지리산 반달곰의 야생 방목은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겨울잠을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반달곰 가족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미 반달곰이 탈진해 죽은 것입니다. 
30% 정도의 체중 감소와 탈진이 주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달곰 곁에는 4마리의 새끼 곰이 살아있었습니다. 지난해 도토리의 작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야생동물의 겨울나기가 힘겨운 절대빈곤의 겨울이었습니다. 

이 반달곰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했습니다. 
적은 양의 양식으로 어미 반달곰은 새끼들을 위해 아예 금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새끼를 낳고 기르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 이 숭고한 모성애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아마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것일 겁니다. 
우리말에 “흉년이 들면 어미는 굶어 죽고, 자식은 배 터져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포기하는 근성이 가장 강하고 숭고한 분은 어머니입니다. 

보릿고개를 넘는 생명줄은 어머니의 희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밥을 푸는 주걱을 쥔 자는 자기 밥을 먼저 푸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사회에 대하여 절망하는 이유는 이 사회의 주걱 잡은 자들이 먼저 자기들의 밥을 푸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제 신문(2013년 3월 30일)에도 ‘고위공직자 10명 중 7명 불황에도 재산 늘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늘이 죽고, 땅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선포한 ‘평강’은 이런 십자가 사랑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문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것은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두 개의 이야기로 나누어 전해줍니다.
하나는, 요20:1-18절의 말씀인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간 빈 무덤의 현장입니다.
또 하나는, 요20:19-2절의 말씀인 안식 후 첫날 저녁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오신 일입니다.
요한은 부활사건이 일어난 상황을 자세히 밝혀 이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이고, 동시에 자신이 목격자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오신 일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제자들의 상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왔을 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19절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문들을 닫았더니’
대문만 닫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쪽문도 닫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모여 있던 집의 모든 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닫아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될 때 겪게 될 어려운 일들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이란 부정적인 감정에 감염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환경적으로 꽁꽁 얼어붙어 있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그의 재능, 경험, 역량이 아무리 풍부하고 대단하다할지라도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교회의 역량이 아무리 풍부하고 대단하다할지라도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두려움의 영을 묶게 되길 축원합니다. 

2.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

이런 제자들을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1)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선포하신 말씀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19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1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인사였습니다.
‘샬롬!’
그들은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5:21), 헤어질 때(삼상1:17), 이웃을 방문할 때 샬롬이라고 인사했습니다.

샬롬이란 단어는 ‘안녕, 평화, 평안’이란 말입니다.
병든 자에게 샬롬은 건강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샬롬은 부요함입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샬롬은 용기입니다.
갈등하는 자에게 샬롬은 화해입니다.
죄로 인하여 번민하는 자에게 샬롬은 사죄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가진 자에게 샬롬은 천국 소망입니다.
전쟁의 샬롬은 평화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두려움입니다.
예전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질병에 대한 두려움, 노후의 삶에 대한 두려움,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무너지는 사업에 대한 두려움........ 
어떻게 하면 평강할까요?
예수님을 모실 때입니다. 할렐루야.
본문에도 예수님이 오셨을 때 비로소 기쁨이 왔습니다.
20절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1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일 처음 부탁하신 말씀은 선교명령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마다 선교명령을 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가장 중요하게 하신 말씀이 선교명령이었습니다.

마28:18-20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실 때에 하신 말씀도 선교명령이었습니다.
행1:8-9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출애굽의 이스라엘은 예배공동체이면서도 군사공동체였습니다.
성막에 구름이 덮이면 이스라엘은 예배공동체가 되고, 성막에서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은 군사공동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면서 영적인 군사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군사 공동체라는 것은 영적인 전쟁을 감행하는 선교공동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면서 선교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선교를 반드시 일으켜야 합니다.
또 교회는 선교를 통하여 예배를 반드시 세워야 합니다.
예배는 선교를 지향해야 하고, 선교는 예배로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부탁의 말씀인 선교명령을 어떻게 받습니까?
‘나와는 상관이 없다.’라고 이 명령을 거부하시겠습니까?
‘아직은 아니라.’고 이 명령을 미루겠습니까? 
‘주님께서 선교하라고 명령하셨는데 나는 어떻게 하지?’라고 최소한 고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주님의 선교 명령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응답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3) 성령을 받으라

22절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지 않으면 선교명령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숨을 내쉬며’(엠퓌사오)라는 헬라어가 구약성경(70인 역)에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창2: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에서 ‘불어 넣으시니’가 바로 그 말입니다.
또 겔37:9절에서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에서 ‘불어서’가 바로 그 말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몸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자 그가 곧 생령이 된 것처럼,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골짜기의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가자 군대가된 것처럼 사람을 살리는 선교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불어넣으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선교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는 것은 예배당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이 교회를 존경하는 것은 교인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로부터 성령의 역사하심을 발견할 때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존경하는 것은 교회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때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현현이 두 번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시내산 현현(Sinai theophany)이 있었습니다.
이 시내산 현현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오순절 현현(Pentecostal theophany)이 있었습니다.
이 오순절 현현으로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하나님의 현현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증거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출19:16절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행2: 3절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성령의 외적 증거가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방언, 예언, 방언통역, 지식, 지혜, 영분별, 능력 행함, 믿음, 신유가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고전12:8-11절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이런 성령의 외적 증거가 풍성한 교회가 되길 축원합니다.
이런 성령의 외적 증거가 확실한 교우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흔히 한국 교회 부흥이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올해로 꼭 110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산에 부흥을 주실 때 쓰셨던 분이 바로 감리교의 로버트 하디 선교사입니다.
1903년 여름, 한국에 와있던 선교사들이 원산에 있는 한 남 감리교 여선교사의 집에 모여 한 주간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이 모임에는 총 7명의 선교사들이 참석했는데, 원산 지역에서 가장 오랫동안 선교했던 하디 선교사가 말씀을 전하도록 되어있습니다. 
하디는 “효과적인 기도를 위한 세 가지 필수요소들”이라는 주제를 놓고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첫째 날에는 요한복음 14:12-14절을 본문으로, “그리스도를 믿음(faith in Christ)”이란 제목으로 준비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둘째 날에는 요한복음 15:7절을 본문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abiding in christ)”라는 제목으로 준비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리고 셋째 날에 요한복음 16:23-24절을 본문으로, “오순절 성령세례의 경험(an experience of Pentecost)”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디는 정작 자기 자신은 주님을 능력을 믿지 않았으며, 주님 안에 거하지 않았으며, 성령 충만을 구하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보다는 자신의 학력을, 의사라는 직업을, 영국시민이라는 자부심을 의지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회를 인도하는 동안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선교의 결실이 없었던 원인이 자신의 교만과 강퍅함, 믿음이 부족한 연고라고 공개적으로 통회했습니다.

하디의 고백은 동료 선교사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들도 역시 회개하였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한국 교인들 앞에서도 낱낱이 고백하고 눈물로 참회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후 하디의 성품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같은 토론토 대학을 졸업한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 은혜를 받은 후 하디는 마치 40일을 금식한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얼굴에 광채가 나던 모세의 얼굴과 같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하디는 한국 교인들에게 진정한 회개의 모델을 제시해준 것입니다.
하디는 자신의 회개로 “사람들은 처음으로 죄의 자각과 회개가 실제적인 경험(삶) 가운데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죄를 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차례로 일어나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했는데 기도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한꺼번에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 세계에 한국식(Korean style) 기도로 알려진 통성기도의 시작입니다. 
하디가 1906년 8월에 평양에서 선교사들의 성경공부모임에서 한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잘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심과 믿음의 부족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영적이 힘이 없다면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영적인 힘은 계속적인 기도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오직 하나,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며 기다리십시오.
성령 받는 것만이 교회가 살길이요, 한국 감리교회가 살 길이요, 성도의 살 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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